한국이 워커家 못잊듯, 워커家도 한국을 못잊습니다.
할아버지·아버지는 6·25 영웅, 손자도 한국서 軍생활… 군인 4代
'백선엽 한·미동맹상 수상' 故 워커 장군 대신해 한국 찾은 손자들
"일면식도 없는 祖父 기리려 33년간 헌신한 한국인에게 감동"
단호했다. 야수 같은 월튼 워커(Walker) 중장의 눈빛이 장병 하나하나를 향했다. 포기란 건 그의 사전엔 없는 단어였다. "죽어도 함께 죽는다. 내가 죽더라도 한국은 꼭 지킨다." 워커 중장의 일성(一聲)이 터질 때마다 늘어졌던 장병의 어깨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우린 이길 것이다!" 워커의 마지막 연설이 끝나자 장병의 함성이 쏟아졌다.
서 있기만 해도 등골에 땀이 차던 1950년 8월 대구. 미 8군사령부가 차려진 그곳에 작고 단단한 체구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적을 잡으면 숨통을 물고 절대 놓지 않는다는 불도그처럼 호전적이며 저돌적이어서 '불도그'란 별명이 붙었던 워커 중장이었다. 6·25가 발발한 그해 7월 13일 초대 미 8군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그의 급선무는 흐트러진 군의 사기를 잡는 것이었다. 북한군의 남침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점령당했다. 낙동강은 피로 물들었다. 메케한 화약 냄새는 시체 썩는 냄새와 뒤엉켜 코를 찔렀다.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1·2차 세계대전을 지휘하며 각종 공훈을 세워 '별 3개'를 단 '불도그' 워커는 한국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군의 무선 통신을 감청·해독해 비밀 작전을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 아들은 아비를 닮는다.‘ 6·25전쟁 영웅’월튼 워커 장군의 뒤를 이어 아들·손자·증손자 모두 직업군인을 택했다. 맨 왼쪽부터 월튼 워커, 아들 샘 워커, 손자 월튼 워커 2세와 샘 워커 2세, 증손자인 샘 벤저민 워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손자 월튼 워커 2세는 신기하게도 할아버지 얼굴과, 아버지의 이름을 딴 샘 워커 2세는 아버지 모습과 복사한 듯 닮아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고, 손자 샘 워커 2세는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 조선일보 DB·채승우 기자
또 낙동강 주변의 지세를 읽어 효과적으로 방어막을 치는 법을 연구했다. 8월과 9월 2개월여간 마산·왜관·영천·포항 일대를 잇는 낙동강 전선, 일명 '워커 라인'을 성공적으로 사수하며 전세를 만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워커의 지휘 아래 참전 용사와 학도병, 유엔군은 하나가 돼 최후 저지선을 지켜냈고,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바탕이 됐다. 낙후된 무기에, 훈련이 덜 된 보병들을 이끌고 증원병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한 상황에서 투지 하나로 상대의 위협을 잠재운 것이다.
하지만 워커의 한국 생활은 너무나도 짧게, 그것도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추운 날씨 탓에 전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그해 12월 23일. 의정부 24사단과 27여단 소속 사병들에게 '표창'이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고 서울에서 떠났던 그의 지프가 경기도 양주군(현 서울 도봉구 도봉동 596-5)에서 마주 오던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그 자리에서 숨진 것이다.
그날 워커 중장의 표창을 받기로 한 미군 가운데에는 6·25에 참전한 또 한 명의 '워커', 그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도 있었다. 그는 24사단 소속 중대장으로 의정부 북방의 최전선 전투에 투입됐다. 북진(北進) 때의 전공(戰功)으로 미 정부가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 훈장을 아버지 워커 중장이 직접 아들에게 달아줄 계획이었다.
사망 뒤 4성 장군으로 추서된 월튼 워커 장군의 명성은 아들 샘을 통해 이어졌다.
아들 샘 워커는 6·25 참전에 이어 베트남전에도 참전하는 등 32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은성훈장, 수훈비행장 등 훈장을 받았고, 52세엔 육군 최연소 4성 장군에 올랐다. 미 육군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이 4성 장군에 오른 건 이들이 처음이다.
워커 가문의 참전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故) 월튼 워커 장군의 손자, 즉 샘 워커 장군(88)의 두 아들 월튼 워커 2세(64) 예비역 대령과 샘 워커 2세(61) 예비역 중령은 수십년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면서 걸프전 등 전장을 누볐다.
"군인 외엔 다른 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이 손자들이 이번에 한국을 찾았다. 65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국방부가 주최한 '제1회 백선엽 한·미동맹상' 수상자로 선정된 월튼 워커 장군의 대리 수상 자격이었다.
'하늘이 열리고 우리나라가 세워졌다'던 지난 3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호텔에서 이들을 만났다. 주한 미군의 휴양 시설 용도로 1963년 완공된 이 호텔은 '한국을 구했다'고 칭송받는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 '워커힐(워커의 언덕)'로 불리게 됐다.
그런데 이날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워커 장군 손자인 샘 워커 2세의 아들, 즉 워커 장군의 증손자 샘 벤저민 워커(32) 역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라크전에 참전한 직업군인이라는 것이다. 4대째 전장을 누빈 것이다.
◇"할아버지가 지금의 한국 봤다면 '헛되지 않았다' 생각할 것"
이들은 워커 장군 기념비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우리 할아버지가 지금의 서울 모습을 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 하늘에서 보시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내 목숨이 헛되지 않았구나. 내가 그래도 좋은 일 했구나.'"
동생 샘 워커 2세는 1981년 아내와 워커힐호텔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고 했다. "서울은 찬란하게 변했군요. 그때 내가 봤던 서울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거대한 변혁이란 단어는 바로 한국을 두고 하는 말일 거예요."
형 월튼 워커 2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한국은 언제나 자랑스러웠다고 덧붙였다. 그는 "난 미국서 현대자동차를 타고 다녀요!"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내가 현대차를, 한국이 만든 그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게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친구들에게도 현대차가 최고라고 추천하곤 해요!"
"지금 한국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우리와 똑같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잖아요. 우리와 공생(symbiotic) 관계를 누리며 미국 못지않게 민주주의 나라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걸 보니 뿌듯해요. 할아버지의 희생이 보상받는 거라 생각합니다."
- 지난 2010년 6월 서울 용산 미8군 부대에 세워진 워커 장군 동상. / 조선일보 DB
"죽더라도 한국은 꼭 지켜주겠다"
워커 장군의 '사수하라,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문구는 6·25 전쟁 중 등장한 가장 유명한 말이 됐다. 손자 샘 워커 2세는 "할아버지 성격을 정의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라며 "항상 앞장서서 전우들을 지휘하던 최전방 리더(front-line leader)였으며, '나를 따르라(Follow me)' 스타일의 리더였다"고 말했다.
"2차 대전 중에도 총상을 입을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죠. 실제 그의 운전병이 총에 맞은 적도 있고요. 정찰을 하면서 적진 깊이 30마일(48㎞)까지 파고든 적도 있고, 15피트(4.57m)로 저공 비행하기도 했죠. 미친 짓이라는 이도 있었어요.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그런 저돌적인 사령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워커 장군이 항상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건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른 전우들을 독려하고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워커는 "사령관이 맨 앞에 있는 걸 부하들이 본다면 최소한 전장 상황이 그렇게 나쁘게 돌아가진 않을 거라 생각할 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을 때까지 싸우자'고 외치는 그에 대해 반발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미국 현지에선 전쟁 반대 여론도 생겨났다. 더군다나 언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딱딱한' 성격의 워커 장군에 대해 '꼬인 시각'을 보인 기자도 여럿이었다.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병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내 목숨부터 먼저 내주겠다'던 워커의 진심이었다.
손자인 월튼 워커 2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사령관이라도 절대 부하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일방적인 상명하복이 아니라 상호 존중 관계에 있어야 전우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배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군인 중의 군인(soldier's soldier)이었죠. 지휘를 내세워 권력을 남용하는 일은 절대 없었어요. 사병들과 식사하고 같은 이불 덮고 잤어요. 오히려 부하가 먼저 먹고 난 뒤 맨 뒤에 남는 음식을 먹었고, 부하가 잠든 모습을 확인한 뒤 다시 한 번 적진의 동정을 살피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었어요.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낮은 데로 임해야 한다셨죠."
◇4대째 군인… '이것은 운명이다'
1889년 미 텍사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워커 장군은 어린 시절 동화책보다는 병법과 무기에 관한 책에 빠져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법률사무소를 운영해보라"는 어머니의 조언에 "변호사가 되느니 사업을 하겠다. 하지만 그 둘 중의 하나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응수했던 그였다.
- 6·25 전쟁 중 전선을 시찰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앞줄 맨 왼쪽)에게 아들 샘 워커 대위(왼쪽에서 셋째)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워커 미8군 사령관(왼쪽에서 둘째).
할아버지의 외모를 빼닮은 월튼 워커 2세는 "그런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할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지 않으냐'고 응했다더군요. 그 나라가 미국이든 들어보지 못했던 나라든 할아버지에겐 상관이 없었습니다. 자기 임무이자 주어진 소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워커 장군의 오랜 친구이자 전우였던 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런 워커 장군을 가리켜 "군인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샘 워커 2세는 이같이 덧붙였다. "6·25 당시 할아버지에겐 두 가지 소명이 있었어요. 자신이 형제라고 불렀던 한국인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돼 있었어요. 이 땅의 공산화는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 하셨어요."
워커 장군의 '군인 정신 DNA'는 아들,또 손자에게 이어졌다. 모두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고, 전장에 파병됐다. 웨스트포인트는 지난 2005년 '최우수 영예 졸업생 상'을 받은 샘 워커 장군에 대해 "학교의 모토인 'Duty, Honor, Country(의무, 명예, 조국)'를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워커 장군의 장손인 월튼 워커 2세는 1971년부터 2001년 대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아이티 등에 파병됐고, 샘 워커 2세는 1975년부터 1996년까지 복무 동안 걸프전 등에 참전했다. 격오지 근무때 한국행을 자원해 1987년부터 1991년 걸프전 발발 전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
"3대째 직업군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4대째예요!"라며 크게 웃었다. 샘 워커 2세의 아들 샘 벤저민 워커 역시 2005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벤저민은 그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더군요. 그가 2001년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뒤 얼마 안 돼 9·11 테러가 발발했어요. '두렵지 않으냐. 다른 학교로 옮겨도 된다'고 물었더니 '아버지, 제가 군인이 돼야 할 이유가 더 명확해졌습니다. 가족을, 친구를, 나라를 지켜주고 싶습니다'고 답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 그게 내 아들이다'며 등을 두드려줬습니다." 샘 벤저민 워커는 사관학교 졸업 뒤 대위로 이라크전에 투입돼 15개월간 전투를 했고, 아프가니스탄에 9개월간 머무르면서 전장을 지켰다고 한다.
◇"조국이 있어야 내가 있다"…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천
6·25에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은 총 142명. 이 중 35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일반 사병보다 두 배나 높은 비율이다. 위험한 지역에 자원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워커 장군 부자는 물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역시 소령으로 참전했다. 월튼 워커 장군,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뒤를 이어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임스 밴플리트 중장의 아들은 6·25 때 자원해 북한 지역을 폭격하다가 실종돼 전사 처리됐다.
- 워커힐 호텔에 세워진 워커 장군(초대 미8군 사령관) 기념비를 바라보는 손자 월튼 워커 2세(왼쪽)와 샘 워커 2세./ 채승우 기자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들이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원천은 무얼까. 워커 장군의 손자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배웠기 때문"이라며 "조국을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바치겠다는 욕망을 키울 정도의 배짱은 갖고 태어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응했다. 그들은 또 "아이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배우기 마련"이라며 "아버지가 뭘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지켜보면서 아버지가 아이들의 롤 모델이 되고 멘토가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샘 워커 2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제 아들이 군인이 돼 워커 가문의 이름을 훌륭하게 이은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지만 전장에 홀로 보내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군인이라는 건 전쟁이든 훈련 중이든 항상 위험과 함께 사는 직업이거든요. 실제로 죽어가는 전우를 눈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 아내는 매일 노심초사하며 아들이 무사하길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게 부모 된 마음이겠죠. 하지만 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용기를 가진다는 것, 그걸 실천한다는 것, 그런 아들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습니다. 제 아버지도 저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한국은 제2의 고향'… 우리를 기억해주는 한국인을 존경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죽음은 너무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 대면 언제나 미소로 응답하셨지만 눈으로는 우는 듯했죠. 아버지 스스로 1950년 크리스마스를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로 꼽으셨으니…. 하지만 저희에게 항상 이야기하셨어요.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것, 그것이 군인으로서 명예롭게 생을 마감하는 최선이라고요."
목소리는 무거웠지만 의외로 표정은 담담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많은 한국인에게 기억되고 있다니…. 이번 한국행을 통해 알게 된 김리진 워커장군추모기념사업 회장님과의 만남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33년간 노력하셨어요! 이런 게 한국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샘 워커 장군은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해를 운구하라는 상관의 명령 때문에 후퇴 작전 중이었던 동료를 두고 한국을 떠야 했던 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숙제요, 미안함이라고 하셨어요. 한국에 오기 전 아버지는 '우리를 기억해주는 한국인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전해달라셨지요. 다음엔 저희 아들, 손자 데리고 한국에 다시 와 볼 생각입니다. 손자의 눈이 휘둥그레질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렙니다. 우리가 서울에 발을 내디뎠던 그 순간처럼!"
-조선일보, 201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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