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 전사(戰史)에서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돼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베트남 식민지를 유지하고 싶었던 프랑스는 1953년 북부 국경도시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군대를 투입했다. 베트민(Viet Minh·베트남 독립동맹)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앙리 나바르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1만5000명의 병력과 전차·야포를 배치하고 군용기 활주로까지 건설한 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확신했다.
▶그의 확신이 깨지는 데는 5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1954년 3월 중순 베트민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000명이 죽고 1만2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 철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 승리의 주역은 보응우옌잡 장군이었다. 그는 보급부대원들 몸에 밧줄을 묶어 200문이 넘는 대포를 한 번에 1인치씩, 하루에 800m씩 옮기는 방법으로 3개월 동안 프랑스군 모르게 무기를 전선에 집결시켜 기습에 성공했다.
- 만물상 일러스트
▶허를 찌르는 잡 장군의 전술은 미군과의 전쟁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1968년 1월 베트민군은 남북 베트남 국경도시 케산에 2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미군의 관심을 돌린 뒤 최대 명절인 구정(舊正)에 맞춰 남베트남 주요 도시의 관공서를 기습 공격했다. 이른바 구정 공세다. 이 전투에서 베트민 측은 3만5000명이 죽는 큰 손실을 입었으나, TV를 통해 미 대사관이 일시 점령당하는 것을 보여줘 미국 국민들의 월남전에 대한 생각을 뒤집었다.
▶잡 장군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미국 같은 강대국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나는 세 가지를 하지 않았다. 적들이 원하는 시간,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 그들이 예상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른바 3불(不)전략이다. 1979년 초 중국이 8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 국경을 공격했다가 3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철수한 것도 잡 장군의 철저한 대비 때문이었다.
▶미국 언론이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칭찬했던 잡 장군(102세)이 그제 노환으로 사망했다고 베트남 정부가 발표했다. 생전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키 160㎝ 정도에 학교 선생님 같은 인상에 놀라곤 했다. 교사와 언론인 경력을 가진 그는 한 번도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1960년대 그는 프랑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힘의 원천은 도덕성과 인민의 지지에서 나온다"면서 "인민의 마음만 단결시키면 소국이 대국을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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