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는 길에 여동생 한번 봤으면…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 이근수씨는“상봉 때 갖고 가려던 선물 가방은 풀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고 말했다. 울산〓남강호 기자
천막에서 반공 포로 심사할 때 심사관과 포로 한 명만 대질
‘가겠나? 남겠나?’ 질문뿐 각각 왼쪽·오른쪽 문으로 나가
볏짚 낟가리를 방바닥에 풀어 그 속에서 잠들었다 눈 떠보니
국군 두 명이 총 겨누고 있었지 “빨갱이 새끼 그냥 쏴버리자”면서
왜소한 노인은 "내 나이가 올해 여든여섯 살, 1928년생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자신의 삶에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근수씨는 북한의 일방적인 통보로 연기된 '이산가족상봉'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대한적십자사 자료에는 '83세, 함흥 출신, 인민군 참전 포로'로 나와 있었다. 그는 중풍에 걸린 부인과 함께 울산시의 한 전셋집에 살고 있었다.
"24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짐을 다 꾸려놓았지요. 북의 여동생에게 줄 내복과 인삼 엑기스 등 50여만원어치를 장만했어요. 두 아들은 회사에 연가(年暇)를 내고 속초까지 나를 태워주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연기됐다는 뉴스를 보고, 대한적십자 통보를 받았을 때는 떨리고 캄캄했지요. 마음을 진정 못해 나흘째 집 앞 도로변의 잡풀을 벴습니다. 다른 잡념이 안 생기게, 오늘도 오전까지 그 풀을 베다가 들어왔어요. 상봉 때 갖고 가려던 선물 가방은 아직 풀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1990년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고 기다렸던 그는 이번에 뽑혔다. 모친은 생존해 계시면 106세, 그는 상봉 대상을 동생으로 정했다. 적십자사로부터 "북측에 확인해보니 동생 둘은 죽고 막내 여동생만 살아 있다. 여동생과 조카 한 명이 나올 것이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여동생 기억은 납니까?
"여동생 이름이 향자였는데, 얼굴은 어슴푸레해요. 가족과 이별한 게 1948년이니, 65년이 흘렀어요. 이제 와서 서로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는 우황청심환도 준비해놓았어요."
- 중위 시절(왼쪽에서 첫째).
"서로 만나도 그 자리에서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못한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 '용케 살아남았구나'같은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적십자사에서 그랬어요. 하지만 같은 형제로 나서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야지요."
―설령 상봉이 성사돼도 딱 한 번으로 끝이고, 계속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지요. 만나면 이별인데 오히려 더 한(恨)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한번 봤으면, 언제 저승으로 갈지 알 수 없는 나이 아닙니까. 어머니와 두 동생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산소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소식을 알고 싶어요. 자식들 사진을 넘겨주려고 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기면 조카들끼리 서로 찾아보라고 해야지요."
그는 함경남도 북청농고 2학년 때(1948년)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됐다. 학교에 늦게 들어가 그때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8월인가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민주청년회 회의가 있다'며 모두 불러냈어요. 교복 차림에 책가방을 메고 군 트럭에 올라탔어요. 읍내에 가는 줄 알았는데 함흥으로 갔어요. 거기서 군복으로 갈아입혔지요. 그게 부모 가족과의 생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평양에 있는 '민청훈련소'에서 두 달간 군사훈련 받고 의주에 배치됐어요."
―집에 알리거나, 왜 강제징집 됐는지 물어보지는 못했습니까?
"북한 정권이 인민군을 창설하고 병력을 확충하던 때였어요. 군 입대 사실만 집에 통지됐어요. 편지는 썼지만 전달이 안 됐는지 답장이 없었어요. 나 같은 어정쩡이는 어디 말도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지요."
―북한에서 '민족해방 전쟁'이라는 6·25가 터졌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우리 같은 졸병이 무얼 알겠어요. 전쟁 났다고 하니까 '이제는 죽었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6·25가 발발하고 한 달쯤 뒤 평양으로 복귀했어요. 인민군 제10사단 소속이 됐지요. 우리 부대는 평양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개성까지 내려왔어요. 하지만 미군기의 폭격 때문에 거기서부터 열차가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의 부대는 야간 행군을 해서 청량리까지 진입했다. 그 뒤 다시 소대별(40여명)로 태백산맥을 타고 경북 왜관까지 걸어 내려왔다. 그때가 9월 초쯤이었다.
"왜관시 안으로는 못 들어갔어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대치했어요. 드물게 총을 쏘긴 해도 서로 거리가 멀었기에 교전 상황은 벌어지진 않았어요. 이미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으로 전세가 역전됐어요. 우리는 미군의 공습으로 움직일 엄두도 못 내었어요. 참호 속에서 보름간 틀어박혀 있었어요. 다른 부대 병력들이 후퇴할 때까지 최후 방어선을 지키는 임무였어요. 마침내 우리에게도 퇴각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의 소대는 인민군 10사단 본부가 있는 경북 김천 쪽으로 퇴각했다. 도중에 미군을 만나 소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되돌아갔다. 낮에는 자고 밤에만 걸었다. 그렇게 해서 38선 부근인 강원도 양양까지 왔다.
"9월 말이라 산속은 쌀쌀했지요. 그때 말라리아 증세도 있었지요. 피란을 가서 비어 있던 집에 들어갔습니다. 마당에 쌓아둔 볏집 낟가리를 방바닥에 풀어서 그 속에 들어가 잤어요.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바깥에서 고함이 들렸어요. 국군 병사 두 명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한 명이 '빨갱이 새끼 그냥 쏴버리자'고 했을 때, 다른 한 명이 '체포해서 소대장께 데려가자'고 말렸어요.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강릉 임시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다시 부산 서면의 임시수용소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포로 번호를 받고 거제도로 넘겨졌다.
"당시 수용소는 관리 인원이 부족해 포로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했어요. 그 안에서 좌우 대립이 심했어요. 소위 '빨갱이 포로'와 '반공 포로'로 나눠졌어요. 내가 배치된 거제도 74수용소는 빨갱이들이 잡고 있었어요. 나는 '가짜 빨갱이'로 찍혀 밤마다 불려나가 엄청나게 맞았어요."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잡혔는데 왜 '가짜 빨갱이'로 찍혔지요?
"나는 출신이 남쪽이고…. 북에서 살면서 말 한마디 할 때도 조심하고 눈치를 봤고, 나 자신은 정말 공산 체제가 싫었어요."
그의 고향은 원래 전남 고흥이었다. 1943년 부친의 일자리를 따라 함흥으로 이사했다. 부친은 함흥에서 역사(驛舍) 건축과 저수지 방제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그 뒤로 북에서 한약재를 채취해 38선을 넘나들며 장사했다. 남쪽에서 광목과 비단을 사 와서 북에서 되팔았기도 했다.
―선생은 어떻게 해서 '반공 포로'로 풀려났나요?
"휴전(1953년 7월 27일)을 앞두고 포로 교환 논의가 있었어요. 반공 포로를 심사할 때 수용소 안이 뒤숭숭했어요. 자칫 반공 포로로 알려지면 집단 테러를 당하니까. 천막 안에서 심사관 한 명과 포로 한 명만 들어갔어요. '가겠나? 남겠나?' 딱 그 질문뿐이었습니다. 남겠다면 오른쪽 문, 가겠다면 왼쪽 문으로 나가라고 했어요. 나와 같은 반공 포로들은 광주수용소 등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북에 가족이 남아 있는데 왜 남쪽을 택했지요?
"내가 못살겠는데…. 공산 치하에서 안 살아본 사람은 내 말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지요. 일본 강점기 때도 그렇게 감시와 제한을 받지는 않았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추진하려는 미국과 불화를 빚었다. 협정을 지체시키기 위해 반공 포로를 석방시킨 것이다(1953년 6월 18일). 일종의 급습이었다. 미국은 결국 이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한·미 방위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0시를 기해 수용소의 철조망을 끊어라'고 지시했어요. 수용소는 미군 관리하에 있었으니까, 우리 측 경비원들이 몰래 철조망을 끊은 겁니다. 그런 뒤 감방을 돌며 '어느 쪽의 철조망을 끊어놓았으니 빨리 일어나 도망가라'고 외쳤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어요. 북한 체제에서도 감옥에서도 모두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으니까요."
그는 포로들과 함께 전남 함평 쪽으로 달아났다. 면사무소에 닿았을 때 집결된 포로만 700명쯤 됐다. 면사무소 직원들이 미리 통보받은 듯 나와서 맞이했다. 그 뒤 부락 이장들을 불러 '당신 마을에는 반공 포로를 몇명 받아라'며 분배했다.
"내가 배치된 집에서는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잘 대해줬습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어요. 한 달 반쯤 뒤 반공 포로 집회가 열렸을 때 내가 '우리 반공포로들이 나서서 국군에 입대하자'고 연설했어요. 손가락 깨물어 '반공'이라고 혈서를 썼습니다. 그때 혈서가 집에 보관돼 있을 겁니다."
―인민군 전력(前歷)으로 혹시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 그런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고요?
"아무리 반공 포로지만 '빨갱이' 낙인은 없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면도 있었지요. 또 의지할 데가 없고 몸뚱아리 하나로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군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이번에는 논산훈련소에 신병으로 입소했다. 두 달 간 훈련 뒤 통신부대에 배치됐다. 그 뒤로 승진 시험으로 부사관을 거쳐 소위가 됐다. 하지만 전방 근무 시절 부하 사병의 월북사건으로 그는 특무대에 붙들려가 곤욕을 치렀다. 결국 1961년 중위로 전역했다.
"나를 사상적으로 의심하는 시선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내 할 일을 똑바로 했어요. 내가 국군에 근무하는 동안 아버지 소식을 들었어요. 아버지는 한약재를 팔려고 내려왔다가 6·25가 터지는 바람에 못 올라갔어요. 전남 고흥의 친척집에 얹혀살다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는 군에서 제대한 뒤 전남 고흥으로 내려가 연탄보일러 대리점을 했다. 그 뒤 큰처남이 있는 울산으로 와서 건축 현장에서 일했다.
"울산대를 지을 때 그 건물 중에서 내가 쓴 상량문(上樑文)이 여섯 개나 됩니다. 우리 집사람은 '페인트 최씨'로 통할 만큼 도색 일을 잘했어요. 1992년 중풍이 와서 반쪽이 시원찮지만. 어쨌든 네 아들 모두 대학 보내고 결혼시켰어요. 이제 남은 소원이 있다면 북한의 동생을 만나 내 어머니와 동생들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다만 물어보려는 것인데…."
이념과 체제로 가족과의 만남을 60년 넘게 막아놓은 데는 세상에서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고, 편지나 전화도 할 수 없다. 이 앞에서는 어떤 위대한 명분도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이들은 13만명쯤 된다. 그동안 세월을 못 기다려 이 중 5만 5천여명이 숨졌다.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정은은 독재를 세습해도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조선일보, 201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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