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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꿈이…" 50년 후 돌아보는 마틴 루터 킹의 신앙과 신학

하마사 2013. 8. 28. 18:40

 

28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미국 워싱턴DC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이라고 연설한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에선 이날을 맞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린다.

흑인과 백인이 조지아의 푸른 초원에서 함께 손을 잡고 달리는 꿈이 이젠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키는데 까지 현실화됐다. 미국 언론의 여론조사를 보면 여전히 인종 차별이 존재한다는 응답이 많지만 적어도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킹 목사의 꿈이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최신호 커버스토리에서 킹 목사를 조지 워싱턴·애이브러험 링컨과 같은 ‘국부(國父·Founding Father)’라고 칭하면서 흑인과 백인의 통합을 주창한 그의 ‘아메리칸 드림’이 미국의 정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킹 목사의 꿈은 천국의 꿈

생전의 킹 목사는 여러 차례 꿈을 주제로 연설했지만, 1963년 8월 28일 워싱턴DC에서 행한 연설 중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대목은 사실 즉석에서 나온 대목이었다. 몇시간째 이어지는 긴 행사에서 킹 목사는 가장 마지막 연사로 연단에 올라갔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열린 차별 철폐 행진을 마무리하는 이날의 행사에는 무려 25만명이 모였다. 흑인 사회 안에서도 “자칫하면 폭력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며 집회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비폭력 투쟁을 주장해왔던 킹 목사는 흑인들의 뜨거운 열망을 고취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자극하지 말아야 했다. 킹 목사는 자서전에서 그날의 집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연단에 서서 준비해간 연설문을 낭독하자, 청중들은 놀랄만큼 정숙하게 귀를 기울였다. 나는 준비해둔 연설문과 다른 내용의 연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수 없지만, 새벽 4시까지 준비한 원고 대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리톤 목소리의 연설은 단번에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성경에서 천국을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어놀고 어린이도 같이 뒹군다’고 묘사한 것처럼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미국을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안게 되는 꿈이 있다”고 외쳤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어린이들이 백인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킹 목사의 묵시론적인 연설은 25만명의 흑인과 백인을 하나로 묶기에 충분했다. 성경의 언어는 흑인과 백인이 모두 익숙한 언어였고, 이들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한 형제로 묶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유니온신학대 제임스 콘 교수는 “킹 목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적들이 그를 방해하려고 어떤 짓을 하든,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힘을 사랑에서 얻었다”며 “그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 하나님이 함께 하리라는, 온갖 돌발 사태가 있더라도 사랑과 비폭력이 증오와 폭력을 누르고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한 점 의심하지 않았다”고 그의 책 ‘마틴, 맬컴, 아메리카’에서 평가했다.

남부의 흑인교회 목사 가정에 태어난 킹 목사는 당시 미국에 팽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과 철학에서는 자신이 싸워야하는 이유도 해법도 찾지 못했다.

1956년 1월 27일 저녁, “사흘 안에 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집을 날려버리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고는 킹 목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엌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기도하고 의지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 순간 절감하고 밤새 기도를 시작했다. 자신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어느 곳에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목소리를 들었다. ‘마틴, 고결함을 위해 일어나라. 정의를 위해 일어나라. 진리를 위해 일어나라. 그리고 보라. 세상 끝날가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때 이후 나는 무엇과도 맞설 준비가 되었다.”

며칠뒤 그는 자신의 집 앞에 모인 흥분한 흑인 형제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폭력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백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든 말입니다.”

당시 흑인 사회에는 흑백 통합을 주장하는 킹 목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맬컴 엑스다. 맬컴 엑스는 “미국은 흑인의 악몽”이라며 “나는 매일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흑인 무슬림 운동을 주창한 그는 백인과 흑인이 평등하게 어우러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오히려 철저하게 분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흑인들만의 영토를 확보하고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맬컴 엑스는 킹 목사와 마찬가지로 흑인 형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흑인 해방 운동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와 증오에 기반해 있었다.

이런 맬컴 엑스와 비교해보면 킹 목사의 꿈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다.

진리를 외면한 교회를 향한 비판

킹 목사의 흑인 해방 운동은 철저히 기독교 신앙에 기반했기 때문에, 그는 인종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백인교회는 물론,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천국만 바라보라고 외치는 흑인교회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킹 목사는 흑인 교회가 감정에 치우치고 내용보다 목소리의 크기에 영향을 받으며 영성을 힘과 혼동해 예배를 파티로 타락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흑인 교회를 향해 “목사라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지옥 같은 현실을 무시한 채 천국의 영광만 설교해서는 안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는 것으로 시간 낭비를 할 수만은 없다. 공부를 해야 한다.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의자를 발로 차 넘어뜨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그들이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는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다.”

백인 교회를 향한 비판은 더욱 날카로웠다. 그는 사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투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백인 교회와 목사들이 흑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백인 목사 중 흑인들의 투쟁을 지지한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었고, 그도 흑인 루터파 교회에서 목회하는 인물이었다. 다른 백인 목사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오히려 인종 차별을 옹호하면서 킹 목사가 종교를 정치로 오염시켰다고 비난했다. 킹은 그런 백인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1962년 네이션지 기고문 제목)라며 이렇게 말했다.

“흑인들이 고통 받을 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단 하나도 기억해낼 수 없었을 때, 내가 느낀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그곳에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그들의 하나님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그러나 흑인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백인 교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백인 교회를 향해 쓴 ‘버밍햄 시립 감옥에서 쓴 편지’는 바울의 옥중 서신을 떠울리게 했고 수백만부가 팔려가며 백인들의 양심을 일깨웠다.

“인종 차별은 기독교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단일성에 대한 노골적인 부정입니다. 차별은 전적으로 비기독교적인 비극적 죄악입니다.”

이 편지를 읽은 신앙단체들이 모여 ‘전국 종교와 인종 문제 협의회(NCRR)’를 만들었고, 여기서 마틴 루터 킹은 흑인과 백인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그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연설하기 시작했고, 같은 꿈을 꾸는 흑인과 백인의 그와 함께 행진을 시작하면서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국민일보, 2013/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