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증권회사 사장, 교도소 간 뒤 결국, "다 잃었다는 생각에 괴로웠지만 '감사 노트'를 쓴 후…"
[매일 '감사노트' 쓰며 세상과 화해하는 법 배워]
"감사한 일 적다보면 세상 보는 눈 달라져요" 배우 김혜자씨가 1000권 기증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니까 세상의 부정적인 면만 보던 과거의 삶 반성하게 됐어요"
- 수형자들이 쓴 감사 노트들.
'바람피우고, 매일 속상하게 하기만 했던 제게 편지를 보내주는 아내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갈망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서울 남부교도소에 수감된 이모(56)씨가 '감사 노트'에 적은 글들이다. 감사 노트는 1번부터 1000번까지 번호가 적힌 빈칸에 감사의 마음을 기록하는 노트다. 잘나가는 증권회사 사장이었던 이씨는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5년째 복역 중이다. 이씨는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는 생각, 내 삶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에게 감사 노트는 '작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이씨는 "가끔씩 '그래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모든 것이 사실은 다 감사한 것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흙 냄새를 맡고 흙을 밟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매일 밥과 국이 뜨거워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남부교도소 수형자 950여명은 감사 노트를 갖고 있다. 이 중 324명(34%)이 감사 노트를 쓰고 있다. 감사 노트는 배우 김혜자(72)씨가 기증한 것이다. 지난달 24일 김씨는 남부교도소에서 수형자 400여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던 중 감사 노트를 써보라고 권했다. 김씨는 "1년 반 동안 감사 노트에 1000가지 감사한 일을 적었다. 다 쓰고 보니 세상 보는 눈이 달라져 있더라"고 말했다. 강연이 있은 지 4일째 되던 날 남부교도소에 감사 노트 1000권이 배달됐다.
200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장모(41)씨는 툭하면 건의 사항을 올려 교도관들 사이에서 골칫덩이다. 장기수이다 보니 그동안 가본 교도소도 많아 이래저래 비교하며 투정이었다. 국이 좀 싱겁다, 빨래하기가 불편하다, 너무 덥다고 하다가 또 춥다고 하는 식이었다. 감사 노트를 받은 장씨는 "내가 감사할 게 어디 있느냐. 지금 날 놀리는 거냐"며 따졌다.
"그러지 말고 한 개만 써보라"는 동료의 말에 장씨는 노트를 받기는 했다. 처음엔 거창하고 대단한 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몇 개 적지 못했다던 장씨는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쓴 게 '오늘 주임이 번호가 아니라 '○○아'라고 내 이름을 불러줘서 감사'였다. 써놓고 자꾸 읽어 보니 정말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후 장씨의 눈엔 감사할 거리가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20개 넘게 적은 날도 있다. 장씨는 "밤에 누웠는데 창 밖에 둥근 달이 떠 있었다. 작은 창인데 달이 딱 거기로 온 거다. 얼른 일어나서 '창문 한 귀퉁이로 달을 볼 수 있어 감사하다'고 쓰고 잤다"고 말했다.
- 지난 18일 오후 서울 남부교도소에 복역 중인 이모씨가 3명이 함께 생활하는 수용실(약 2.5평)에서 감사 노트를 쓰고 있다. 이씨는 주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동료 수형자들이 밖에 나가 혼자 있을 때와 잠들기 전 감사 노트를 쓴다. /박상기 기자
교도관들에 대한 '감사의 글'도 제법 많다. '○○○ 주임이 귀찮을 텐데 매일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다 줘서 감사하다', '○○○ 주임이 웃기는 얘기를 많이 해줘서 감사하다' 등이다. 김화섭 주임은 "자꾸 감사할 거리를 찾다 보니 교도관들의 예쁜 점도 보이나 보다"며 웃었다.
상습폭행으로 3년형을 선고받은 박모(31)씨는 하루 한 개씩 빠짐없이 감사 노트를 쓴다. 하루 한 개지만 쓰기 전에 30분 가까이 고민을 한다.
"감사한 것들을 쓰면서 지난 생활을 돌아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후회와 반성을 합니다. 남 탓만 했는데 내 인생을 처음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습니다. 남은 형기 동안 꾸준히 쓰면 출소 때는 감사 노트 1000개가 꽉 찰 겁니다." 박씨의 '감사 노트' 예찬론이다.
-조선일보, 201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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