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행복과 희망

동생 38명… 그리고 누나의 아름다운 책임감

하마사 2013. 2. 22. 17:47

매운바람이 불던 지난달 어느 일요일 아침 예쁜 딸아이가 찾아왔다. 우리 시설에서 자라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인근 회사에 취업해 아기자기하게 살아가고 있는 소박한 젊은이다. 반가운 마음에 딸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한참 품에 안겨있던 딸아이가 가방을 열더니 "어머니, 동생들 대학가는 데 보태 쓰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밝히지 말아 주세요" 하면서 수줍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 속엔 자그마치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딸아이의 형편에 그건 큰돈이다. 더욱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랑이 담겨있어 더욱 특별했다. 그건 바로 누나의 책임감이었다. 올해 여섯 동생이 한꺼번에 대학에 진학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혼자 많이 고민했던 모양이다.

우리 집은 유아부터 대학생까지 아이들이 모두 38명 생활하는 아동 복지시설이다. 규모에 비해 대학생 비율이 높은 편이다. 물론 학력보다 실력이 우선시되는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아이들이 대학에 가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오늘을 준비해 왔고 진학을 열망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함께 가보자고 용단을 내렸다. 시설을 나서면 보호의 손길도 끊어지고 아이들이 홀로서기에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너무 허술하고 유혹이 많아 자칫 잘 키운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기 쉽다.

"너도 어려울 텐데 뭣하려고 이런 걸 준비했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참 고맙고 대견스러워 가슴이 먹먹해졌다. 감사와 도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어쩜 이렇게도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을까! 한창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고 멋 부릴 나이에 5일장에서 따뜻한 옷, 편한 구두 사 신고 언제나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저 촌뜨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불과 다섯 살 나이에 가정 해체를 경험했고 제 의지와 무관하게 낯선 곳에서 보내야 했던 유년시절, 그리고 사춘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부모와 사회를 향해 분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뒤를 돌아보고 동생들을 챙길 줄도 아는 천사 같은 내 딸내미. 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되던 해에 우리 집에는 생후 1개월 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영양실조에다 외모 때문에 다들 'ET' 같다며 갓난애를 피하는데 유독 그 아이는 곁에서 목욕일도 거들고 기저귀도 갈아주며 동생을 돌보는 모습이 남달랐다. 하도 기특해서 한번은 물었다. "다들 무섭다고 도망가는데 넌 괜찮니?" 아이의 대답이 아름다웠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꺼내며 "그러면 애기가 너무 불쌍하지 않으냐"고 했다. 사회복지 현장은 힘들지만 분노와 증오를 사랑으로 치환한 이런 오아시스를 경험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사랑한다 내 예쁜 딸아!

 

-조선일보 아침편지, 2013/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