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감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면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이름을 들으면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이름이 있기도 하다.
송홍철과 문주영이란 이름은 후자이다.
둘은 부부이다.
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부부의 이름이다.
목사인 내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다.
고3 아들의 자전거 접촉사고로 알게 된 부부인데 어쩌면 부부가 똑같을까?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바른 생각을 가졌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을 다쳤다며 치료비를 달라고 요구했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면 더 많은 돈이 나온다며 합의하자고 하면서.
결국 70만원을 받아갔다.
아들이름으로 가입한 보험회사에 확인하자 치료비 영수증이 있으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치료비 영수증을 부탁했더니 끝난 일이라며 거부했다.
돈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전화를 했더니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고 목사가 그런 일로 전화를 하느냐며 도리어 큰 소리를 치며 핀잔을 주었다.
목사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의 울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또 다른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알고 뉘우치면 깨끗하게 잊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거짓과 비양심적인 행동을 전혀 모르고,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다면 깨닫게 하는 것도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이다.
그냥 참고 덮어두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고 알리는 것도 정의를 위한 방법이다.
부당한 이익을 위해 부부가 서로 거짓말을 하면서 과도한 요구를 했다.
목사라는 신분을 알고 더욱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목사이기 때문에 무조건 참으려 했던 것이 바보스럽고 억울하게 생각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대응을 했어야 했다.
세상에는 악인이 있기 마련이다.
악인들의 악한 행동을 덮어둔다면 선인들의 피해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히틀러를 암살하려했던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가 이런 말을 했다.
“미친 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 바퀴에 사람이 깔려있다면, 교회는 그 바퀴 아래 깔려있는 사람을 끄집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깔려죽지 않도록 그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야 한다.”
“미친 사람이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마냥 악이 선으로 바뀌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이 악에 의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막는 것도 교회와 신앙인의 책임이다.
이런 글을 쓰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부부가 회개하지 않고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다른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알게 모르게 남에게 계속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판단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 조심스럽다.
그들 부부가 회개하고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고마운 이름들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고마운 이름들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음에 감사하다.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이름의 사람이 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