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하나님의 나라

하마사 2012. 2. 8. 21:00

본문: 롬 14:13-18

찬송: 289장

제목: 하나님의 나라

목표: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게 살게 한다.

 

 

어제 지구장 모임이 있어 식당에 갔는데 어떤 권사님은 고기를 드시지 않아서 채소만 드셨습니다. 옆에 있던 어떤 분이 앞으로 식당 갈 일이 있으면 그 권사님 옆에 앉겠다고 농담하며 웃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먹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음식으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율법시대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신약시대에 와서도 고기를 먹는 문제와 제사음식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은 이런 음식문제로 시작합니다. 모든 것을 먹는 사람이 있고 채소만 먹는 사람이 있는데 상대방을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모든 날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날을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나 취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부분이 아닌 성격이나 관심영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회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문제를 가지고 본문을 시작하면서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터치하고 있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인간의 육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며 육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사도가 본문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은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서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육적인 문제로 다투고 분쟁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성도 상호간에 화평과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육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현세적인 축복만을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물질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자녀들이 잘되고, 건강하게 사는 것에 목표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적인 만족이나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육적인 축복을 주시는 분이 분명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분명히 좋은 것을 주시고 현세적인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을 주기 원하십니다. 영적인 것이 영원한 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것을 누리며 사는 곳입니다. 일시적인 육적 만족을 채우는 곳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만족을 누리며 사는 곳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영원히 누리며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를 이렇게 비교해보았습니다.

세상나라는 보이는 나라이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한 육체의 소욕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또한 현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성령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발견하고 누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거하는 백성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3:24절 말씀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들어올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임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라고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속에 임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 가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나의 욕심과 정욕이 나를 지배하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죽으면 천국에 확실히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사람들이 경험하며 누릴 수 있겠습니까?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속에 임합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 평강, 희락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성도는 이 세 가지 열매가 반드시 생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의 세 가지 열매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의

의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정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해가 빠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의롭게 되는 수단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희생과 순종의 행위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빠짐없이 준행해야 했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즉사하기까지 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막혀진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의를 얻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선한 행위를 통해 받은 의가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를 입은 성도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의란 도덕적 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정의가 통하는 나라입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듯이 사람들에 대한 신의도 지켜야 합니다. 성령안에 있는 사람은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의로울 때 나는 그의 편에 서고, 누구든지 불의할 때 나는 그를 떠나리라.” 사람의 편이 아니라 의의 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의롭게 살다가 환경이 변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 서면 실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로우신 하나님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잠시 손해를 보더라도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의롭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평강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 갈등이 없으며 올바른 조화 가운데 있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성도에게는 이웃과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은 믿음의 성숙도가 다른 형제간에 자신의 자유를 좀 더 제한하고, 또 상대방의 자유로운 행동을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수용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음식에 관한 것을 예를 들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차이에 따라 음식물에 대해서도 가리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야기될 수 있는데 형제가 거리끼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는 것도 평강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평강과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의 조화와 화평도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국민일보에 영화배우 이대근장로님과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습니다. 저는 그분의 영화에 대하여는 잘 모릅니다. 단지 그분의 예수님과의 만남과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기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인격적인 주님으로 받아들일 결심을 하게 되셨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대답이 이렇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인생이란 무엇인가. 바쁘게 살다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거든요. (전도하신) 김 목사님이 성경책을 사 주어 1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죠. 처음엔 의문점이 많았지만 인생을 헛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습니다. 특히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죠. 부모에게 불순종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효를 강조하는 말씀들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직접 해보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너무 좋아 계속 믿게 됐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지요.” 신앙생활을 해보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너무 좋아서 계속 믿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때 경험되는 은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함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로 갈 때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공포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고 외칠 수 있는 평안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평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누가복음 7장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의 발 곁에서 울면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죄사함의 은혜를 얻고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평안을 잃고 살다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성령 안에 있는 이런 평안을 누립니다. 죄에서 해방된 영원한 평안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중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희락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5:22-2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희락’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joy라고 합니다. 이것을 재미있게 풀어놓은 글을 보고 공감을 했습니다. 기쁨은 우선순위를 잘할 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Jesus→ Others→ You 순으로 살면 기쁘지만 순서가 잘못되면 기쁨에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선으로 살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환희가 있어야 합니다. 담임목사님이 1월중에 ‘잔치집 인생의 3요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신 내용 중에도 불교는 초상집, 유교는 제사집, 기독교는 잔치집으로 비유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지만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더 커야 합니다. 고난과 슬픔의 십자가는 결국 구원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고난을 통한 기쁨의 종교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거친 후에 끝은 기쁨과 환희입니다. 영원한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원천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한 낯에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누리는 기쁨은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택하여 물을 길러 왔지만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수를 경험한 여인은 물을 길러왔던 물동이를 버려둔 채로 동네로 들어가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누리는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모습이 가능합니까? 상처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찬송을 하다니요. 영적인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기쁨이 생깁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여건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세상이 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찬송가 191장 3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을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주의 영인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십니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중에 계십니까? 조금만 참으면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믿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고난 중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기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나타나는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분명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늘 경건의 훈련을 합니다.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에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의 완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기쁨을 드리면서도 사회에서는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의 잘못도 있지만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자기점검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아야 원칙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불신자 이웃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을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또한 사람들에게도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사도 바울도 디모데후서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조롱과 멸시와 고난은 달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훌륭한 성도입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이웃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친구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터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믿으려면 이 사람처럼 믿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런 인정과 칭찬을 듣게 될 때 그리스도를 섬기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광성교회가 분란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이미지가 손상되었다 할지라도 광성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을 때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씻고 새로운 영광을 누리는 미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미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 한사람쯤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사람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욕을 먹고 이미지 손상을 가져온다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책임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 열매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7절과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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