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8-20
제목: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
찬송: 121장
목표: 목자처럼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한다.
내일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성탄절입니다. 첫 번째 성탄을 가장 먼저 축하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께 달려가 가장 먼저 축하하고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탄의 아침을 맞이하기 전에 성탄 이브날에 있었던 목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1. 신실한 사람(8-9)
8-9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목자는 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도적이나 짐승들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양들의 주변에서 양떼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밤의 찬바람도 맞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은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따뜻한 방안이 아니라 찬바람이 불어치는 밖에서 그리고 낮이 아니라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양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목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밤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악한 짐승들이 호시탐탐 양을 노리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깨어서 양을 지키는 목자라면 자기 일에 신실한 사람, 성실하고 충성스런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목자로서 자기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에 상관없이 밖에서 밤에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얼마전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에 대해 "가슴 아픈 이야기"라며 "진리를 차단하고 자유가 없는 북(北)에 대해 비관적"이라고 말했던 정진석 추기경께 ‘골수반공주의자 면모를 보여줬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안방에서 활개치듯 안전한 서울광장 촛불시위나 앞장서지 말고 삭풍과 탄압이 휘몰아치는 광야(북한)로 나가라"며 "사제들이 정말로 하나님 말씀과 정의를 위해 순교(殉敎)할 용기가 있다면 그곳에 가서 정의를 구현하고 순교하라"고 했습니다. 정당을 떠나 국민의 한사람으로 공감하고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진정한 목자라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안방이 아니라 삭풍과 탄압이 있고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로 나가 고난과 시련이 있는 밤에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진정한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목자가 있는 자리가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관계없습니다. 어떤 봉사의 자리든 관계없습니다. 구역장 권찰, 교사, 차량부, 찬양대, 예배부, 계수실, 남녀선교회, 이웃봉사실 등 어떤 부서에서 봉사하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서 양떼를 돌보는 심정으로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밖에서 그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밤에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처럼 얼굴이 알려질 수 있는 자리에는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숨어버리는 사람은 참된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4:7절에 두기고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고 기록합니다. 일군에게 중요한 것은 신실 즉 충성입니다. 일군은 진실해야 합니다.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일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면 신실한 일군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일관되게 일하는 일군이 신실한 일군입니다.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면 신실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각각 갑절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땅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회계할 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을 칭찬하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며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책망합니다.
작은 것에 충성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세리, 죄인, 창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등 사회적인 약자인 작은 자들에게 늘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큰 나귀대신에 작은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된다고 하시며 작은 겨자씨를 강조하셨습니다. 또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화) 충견 하치코
전북 임실에는 의견비(義犬碑)가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때 김개인이란 사람이 개를 사랑했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산불이 나서 죽게 되자 주인을 구하기 위해 개울에 몸을 적셔 풀밭에 뒹굴어 불을 끈 오수의 개를 기리는 비입니다. 우리나라 충견으로 오수의 개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치가 있습니다.
1920년대 초 우에노 교수의 집에 온 친구가 어린 강아지 하치를 안고 왔는데 많이 야위어 있어 평소 개를 좋아한 우에노 교수가 며칠을 극진히 간호한 덕분에 하치는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훌쩍 자란 하치는 우에노 교수의 출근길을 따라다니더니 어느 날부터는 퇴근시간에 맞춰 시부야역에 나와 교수를 기다렸습니다. 하치는 한여름에 태풍이 불어도, 한겨울에 함박눈이 소복하게 쌓여도 날마다 시부야역을 두 번씩 오갔습니다.
1925년 5월, 하치에게 뜻하지 않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여느 날처럼 하치는 저녁때 시부야역으로 교수를 마중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교수가 오지 않았습니다. 우에노 교수는 그날 학교에서 교수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 뒤 하치는 교수의 친척 집에 맡겨졌지만 그 집에서 가출해 시부야역에서 하염없이 교수를 기다렸습니다. 하치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때로는 먹을 것을 찾아 음식점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영업을 방해한다고 상인들 발길에 걷어차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생활하던 하치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10년 가까이 날마다 시부야역에 나가 주인을 기다린 충견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졌습니다. 그 사연에 감동한 사람들이 하치의 충성심을 기려 동상을 세우고 이름 뒤에 존경한다는 뜻을 담아 공(公)을 붙여 ‘하치코’라고 불렀습니다. 하치 이야기는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오수의 개나 일본의 충견 하치코와 같은 개도 자기의 자리에서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일을 맡겨주셨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직분과 일감을 맡겨주셨습니까? 감사함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것이 작아 보일지라도 묵묵히 자기자리를 지킬 때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듯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신실하게 사명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2. 행동하는 사람(15-17)
15-17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천사를 통해 베들레헴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목자들이 빨리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것을 알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행동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보고 듣고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모두가 한 마음이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목자들이 몇 명인지는 몰라도 두 명이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마음을 합하여 베들레헴으로 빨리 갔습니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마음이 모아져야 합니다. 의견이 분분하면 행동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마음속에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양떼는 어떻게 할까? 한명이 대표로 갈까? 선물은 어떻게 할까? 밤이니 기다렸다가 날이 밝으면 갈까? 옷을 갈아입고 갈까? 등 시간을 지체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목자들이 빨리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빨리 행동으로 옮기며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들면 빨리 순종해야 합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핑계거리가 생기고 순종할 수 없는 환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고 있습니다. 비록 천사들이 직접 나타나 말을 하지는 않지만 설교를 통해 혹은 성경말씀을 읽거나 묵상하는 중에 혹은 기도하는 중에 아니면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거나 마음의 감동을 주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올해 우리 국민들의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지난 3년 중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또 국민들이 호감을 느끼는 종교는 천주교, 불교, 개신교의 순서로 나타났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사장 우창록·이하 기윤실)이 지난 11월 8~10일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2010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7.6%, '보통'이라는 응답은 33.8%,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8.4%였습니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008년(48.3%), 2009년(33.5%)에 비해 가장 높게 나타난 반면, '신뢰한다'는 응답은 2008년(18.4%), 2009년(19.1%)에 비해 가장 낮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는 많지만 말씀을 듣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참 신앙인이 적기 때문입니다. 신뢰받는 교회와 신앙인이 많아질 때 앞으로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습니다.
학개서는 학개 선지자가 B.C. 520년 6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4개월간에 걸쳐 선포한 4편의 설교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예언 선포 시기는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듬해에 곧바로 성전재건 사업에 착수하였으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공작과 폐허와 황무지로 변한 유대 땅에서의 힘든 노역과 잇따른 흉년 등의 이유로 성전재건이 중단된 지 무려 16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영적인 무관심과 나태함으로 인해 계속 성전 재건을 미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가 영적각성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의 마음이 흥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시적인 감정의 흥분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심령의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영)을 흥분시키시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명하신 바를 실천하려는 구체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학개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임한 날로부터 불과 23일이 지나고 나서 성전재건은 착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심령을 지닌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 1:2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예화)
고당 조만식 장로님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때문에 학교 정문이 막히곤 했습니다. 고당은 꼭두새벽부터 나가 정문에서부터 운동장까지 모두 쓸었습니다. 당시 오산학교에서 고당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한경직 목사님은 고당에 대해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여러 은사들에게 배워왔지만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자는 오직 고당 한 분뿐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결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18-20)
18-20,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연말이 되어 구역장 권찰 송년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때 한해를 돌이켜보며 감사하며 고백했던 성경구절이 고전 10:9-10절이었습니다. “나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과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는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괜찮은 목사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회개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임을 깨닫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받기를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시며 만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피조물들을 통해서 스스로 기쁨을 누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받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고 영광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사 43: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에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진 음성과 천사들이 보여준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듣고 보았던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려주어 경배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목자들처럼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목자들 외에도 동방박사들과 시므온과 안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안나는 남편과 사별한지 84년이나 된 사람이었는데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과 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성탄을 맞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큰 영광은 자기가 차지하고 작은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울이 악한 왕으로 변질된 사건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환호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외친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다윗에게 빼앗겼다는 상실감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승리케 하셨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다윗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의 자리를 잃을까 걱정되어 다윗이 받는 칭찬을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영광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처럼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그런 시기심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통해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자기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는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는 마음이 들고 말았습니다.
헤롯이 죽은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왕복을 입고 연설하자 백성들로부터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열광을 받은 5일 후에 몸에 구더기가 가득 슬어 죽었는데 그 이유를 사도행전 12:23절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다니엘 5장에는 바벨론의 벨사살왕이 일천명의 귀족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는 중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썼습니다. 아무도 그 글씨를 알거나 해석하는 사람이 없을 때 다니엘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읽어주고 바벨론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멸망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 5:23절 하반절입니다.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하나님은 영광받기를 원하시지만 벨사살왕은 사람이 만든 우상을 찬양하며 교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하던 거룩한 그릇으로 술파티를 벌이는 불경죄를 지었고 우상 숭배하는 죄까지 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받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된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려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목자들처럼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나온 한해를 돌이켜보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개인과 가정에 그리고 교회에 행하신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에게 행하신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 영광을 사람이 가로채거나 가리는 행동을 하면 헤롯과 벨사살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 성탄절입니다. 어릴 때 교회에서 성탄절 찬양과 성극을 한 후에 밤을 새우며 함께 기쁨을 나누다가 성탄절 새벽에 집집마다 다니며 새벽송을 돌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 앞에서 새벽송을 하면 눈 비비며 나오셔서 다과를 주시곤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모여 함께 먹으며 즐거운 성탄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은 산타가 오는 날로 오해할 정도로 예수님보다는 산타크로스가 더 부각되어 가는 듯합니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송의 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그만큼 줄어드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든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처럼 자기의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는 신실한 사람입니다.
천사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빨리 가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갔던 목자들처럼 말씀에 즉시 순종하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던 목자들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목자들처럼 성탄을 기쁨으로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