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우리의 하나님

하마사 2011. 3. 11. 11:39

본문: 신 32:10-14

제목: 우리의 하나님

찬송: 432장

목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에 따라 신앙생활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분과 신앙상담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고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고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하신다는 생각에 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책망하시고 징계를 하시지만 사랑과 용서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품어주시고 덮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성장과정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칭찬과 사랑보다는 책망이 앞섰기 때문에 부모님께 실수하지 않고 야단맞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육신의 아버지처럼 두렵고 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나안 땅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모세의 설교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1. 만나주시는 하나님입니다(10상).

10절 상반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여기서 ‘만나다’는 ‘찾다’란 뜻으로 사랑하는 열정으로 이스라엘을 찾으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찾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찾으시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갔다가 막내 딸 지은이를 잠시 잊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는 사이에 지은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 도로가 있어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집안에 있던 동생과 저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지은이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 때에야 집사람이 알고는 정신을 반은 잃은 사람처럼 지은이를 부르며 찾아다녔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안에 몰래 숨어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어른들은 당황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쁜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이렇게 찾으십니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황무지와 광야같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무한한 사랑의 눈으로 찾고 계십니다. 세상에 자기 혼자라고 생각하고 외로이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런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게 왜 이런 아픔과 고통이 주어졌느냐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고 하소연하는 나를 찾으시고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내게 고통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라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찾아와 만나주십니다. 함께 울어주시고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황무지는 애굽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고 있던 세월은 희망이 사라진 황무지와 같은 절망의 세월이었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없었습니다. 반복되는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출 2: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살이하면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얼마동안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황무지는 황량하고 황폐한 땅입니다. 희망이 없는 땅입니다. 도와주거나 의지할 사람도 없는 환경입니다. 세상에 단독자로 나만 홀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를 찾아서 만나주십니다.

얼마전에 신문을 읽었는데 어떤 사람이 7살 때 어머니가 가정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외도한 것을 목격하고 비뚤어진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수 십년을 찾아 마침내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와 남자를 살해하고 자수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찾은 목적이 자기인생을 망친 어머니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찾고 만나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찾는 목적은 사랑입니다. 죄를 짓고 숨어 있을 때도 하나님이 찾는 목적은 회개를 통한 회복을 위한 것이고 사랑을 통해 새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9:15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황무지와 광야에 버려져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을 잊지않고 찾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도 황무지와 광야에서 절망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고통과 상처를 안고 있어도 만나서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청장이나 서울시장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장관을 만나거나 대통령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만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시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감히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 동안이나 동행하면서 만났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만나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안할 때보다 어렵고 힘들 때, 혹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하나님이 만나주기도 하셨지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땅 앞의 모압평지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내용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행하신 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주셨다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외로운 야곱을 벧엘의 들녁에서 찾아오시고 만나주셨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용기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간증)

제가 5년 동안의 회사생활을 하면서 어려웠을 때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언젠가는 신학교를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살았는데 너무 힘든 길이라 자신이 없어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갈 때는 도피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잘 되었을 때 떨치고 당당하게 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성실하게 열심히 했습니다.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승진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승진발표가 있었는데 4명의 입사동기들 중에 저만 누락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나만 누락이 될 수 있을까? 누락된 다른 동료가 있었다면 덜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상합니다. 아픔과 실패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덜 외롭고 힘든데 자기만 떨어지면 더 억울하고 힘들었습니다. 밖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학교 때 함께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이미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이냐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신학교에 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1년 후에 승진과 더불어 가장 선망의 대상이었던 부서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이후에 사직을 하고 신학교 입학을 위해 독서실을 끊고 공부를 시작했고 합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생의 크고 작은 광야에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찾고 계십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했지만 이세벨의 위협이 두려워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고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찾아와 천사를 시켜 구운 떡과 물 한병을 먹고 마시고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황무지와 광야같은 세상에서 지치고 쓰러질 때 우리를 찾으시고 만나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호위하시는 하나님입니다(10하).

10절 하반절,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뿐만 아니라 호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워싸 빈틈없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식구들과 함께 라반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몰래 돌아갈 때 이를 안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사흘 길을 추격해오자 하나님은 라반에게 나타나 야곱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 아람군대가 포위하였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불말과 불병거로 도단성을 에워싸고 지키고 계셨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사자의 입을 봉하여 지켜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서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도록 보호해주셨습니다.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다윗을 보호해주셨고 골리앗의 칼로부터 보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협과 전쟁에서 보호해주셨습니다. 시 23: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의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전하게 지켜주셨듯이 오늘날 우리의 삶의 위기 속에서도 반드시 보호해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일본에서 규모 8.8의 최악의 강진과 쓰나미가 발생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고은애청년이 뉴질랜드에 어학연수중인 지역에 지진이 났지만 마침 지진이 날 때 다른 지역으로 여행 중이어서 화를 면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호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사고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지키시는 곳이 가장 안전한 지대임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진설계를 잘해도 하나님이 지진으로 땅을 흔드시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5-8).

지금 살아있는 것이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순간순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몇 일전에 아내가 제게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보 살아있어서 고마워요.”란 말이었습니다. 밤새 안녕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하루하루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살면서 감사하다가 하나님이 어느 순간 생명을 거두어 가셔도 감사하며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는 것도 감사이고 죽는 것도 감사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싸개로 싸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호위하시기 때문에 살아있음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호위하시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호위하심을 믿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인도하시는 하나님(11-14)

11-14절,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13]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14] 소의 젖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최종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곳까지 도착할 때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본문은 독수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독수리는 그 새끼를 연단하는 독특한 훈련방법이 있습니다. 어미독수리는 절벽위에 있는 둥지에서 새끼 독수리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새끼들은 있는 힘을 다해 날개짓을 하며 버둥대다가 땅에 떨어지려할 때 어미 독수리가 날개로 받아서 다시 안전한 둥지에 올려놓습니다. 이런 훈련을 반복하여 새 중의 왕 독수리로 키워갑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연단은 때로 우리에게 가혹하리만큼 힘들고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생활 40년을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곳입니다. 세상적인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잊게 해주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연단의 장소입니다. 사람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도 복잡한 왕궁을 떠나 미디안광야로 갔기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광야는 영혼의 훈련을 받는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영혼이 맑고 깨끗한 경건생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광야는 고독한 곳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훈련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때로는 이런 고독하고 외로운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광야훈련을 거치게 하신 후에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한 축복이 13-14절입니다.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 반석의 꿀, 굳은 반석의 기름, 우양의 젖과 기름, 육질이 좋은 고기와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할 아름다운 축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은 아무리 힘들고 험한 황무지와 광야길이라 할지라도 최종적인 목적지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행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리라는 말씀은 가나안땅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도 항상 높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의 질도 높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형통케 하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양치기 소년에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그 때부터 사울의 칼을 피해 다녀야하는 황무지와 광야생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인도하셔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의 반열에 세워주셨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나 왕이 되었다는 자체보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는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당장은 어렵고 절망적인 것 같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호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0311.hwp
0.03MB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로 되리라  (0) 2011.05.06
일어나라  (0) 2011.04.04
믿음을 가진 자  (0) 2011.01.19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  (0) 2010.12.24
행복한 신앙생활  (0) 2010.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