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 12:1-3
찬송: 86장
제목: 예수를 바라보자
목표: 예수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살게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이나 물질, 명예, 지식과 능력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곁눈질로 다른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보다는 다른 것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운전을 하면서 한 눈을 팔면 사고가 나듯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멈추거나 한 눈을 팔면 신앙생활에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1.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요 10:10)
요한복음 10:10절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주러 오셨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으로 오지만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생명을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이었지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생명에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습니다. 생명은 모두 같은 생명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귀중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9월 4일자 조간신문에 “자살률 1위 놓고 '슬픈 경쟁' 벌이는 한국과 헝가리”라는 기사를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를 인용, 2008년 한국이 자살률 세계 1위(인구 10만명당 24.3명), 헝가리가 세계 2위(21.0명)라고 발표했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앞뒤가 꽉 막힌 절망적인 상황이 되면 막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값진 것이 생명입니다.
천안함이 침몰하여 46명의 젊은 장병들의 생사를 알 수 없을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국민이 마음을 모으던 그 때에 한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들렸습니다. 살겠다고 그리고 살리겠다고 아우성인데 누구는 그 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을 보면서 허탈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하고 한편으로 이해는 되었지만 백령도와 한 가정집에서 일어난 일이 너무나 대조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자살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값어치는 동일한데 말입니다.
남미 칠레에서 금광이 무너져 지하 700m 속에 17일간 갇혀 있던 광부 33인이 죽음의 땅속에서 생명의 메시지를 달아 올려 보냈다는 소식이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생존 광부 중 가장 연장자인 마리오 고메스(63)가 지상의 아내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매달았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곧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인내와 믿음을 가지세요. 나는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죽을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을 기다리는 700m 지하 속에서 생명의 감동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700m의 무너진 지하갱도와 같다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와 믿음과 소망을 가지면 능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은 이처럼 소중합니다. 생명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생명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쪽이 생명을 잃으면 다른 한쪽도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한쪽이 희망을 가지면 다른 한쪽도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명을 얻게 되고 힘차게 생명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이 경험했던 구리뱀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에 에돔땅을 통과하려 했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않아 먼 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빨리 도착하기를 원하는 마음에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더 나아가 먹고 마시는 문제를 가지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듣고 하나님은 불뱀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물어 죽게 하자 백성들은 회개하며 불뱀들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아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뱀에게 물렸지만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구리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살 길이 열립니다. 죽음의 구렁텅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생명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죽은 자가 아닙니다. 생명있는 사람은 움직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앞을 향해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12:2 상)
2절 상반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은 잠시간의 의지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주’라는 단어는 ‘선구자’, ‘창시자’, ‘사령관’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영적 사령관이신 예수님의 휘하에 있는 군사들입니다. 군사는 사령관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완전케 하는 자’라는 뜻과 함께 ‘완성자’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 되실 뿐만 아니라 심판주로 다시 오실 완성자가 되십니다. 죄로 인해 그리고 삶의 여러 환경에 의해 굽어지고 상처난 우리들을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온전함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삶을 왜곡시키고 자기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요즘에 인기있는 드라마 중에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중에 구마준이라는 청년이 나오는데 인격이 왜곡되어 많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가 빚은 불륜의 씨앗과 할머니의 피살까지 이어지는 숨은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의 삶이 상처로 얼룩지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혹은 주변 사람들의 죄와 상처로 인해 인생이 왜곡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 우울증으로 기진해 있는 사람, 중병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수술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사람 등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하여 마음에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책감으로 인한 영적 곤고함이나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인한 영적 교만함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물질적인 결핍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 인간관계의 소외를 겪고 있는 사람, 자녀들의 문제로 가슴 찢는 부모님의 고통,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배신으로 실망하는 사람 등 아픔과 신음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온전치 못합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삶의 부족과 결핍 혹은 왜곡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불완전한 죄인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의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영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육체적인 약함까지도 온전해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자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요 8:31-32)
요 8:31-32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고 자유와 해방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유가 얼마나 큰 복입니까? 늘 자유를 누리며 살던 사람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눌림과 속박속에 살던 사람에게 자유는 너무나 값지고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롭게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교회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풍납동 474번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복있는 분들입니다. 예배실에서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어보니 그 때가 복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남자들의 군대이야기인데 양해를 무릅쓰고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 처음에 2주간은 교회에 못 가게 했습니다. 주일이면 의례적으로 교회에 갔었는데 주일인데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하니 더욱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함께 훈련받는 친구들과 막사 옥상에 올라가 둥글게 원을 그리고 함께 울면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예배의 추억이었습니다. 2주간이 지나고 자유롭게 교회를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기회였습니다.
강원도 영월에 가면 청령포라는 곳이 있습니다.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를 당했던 곳입니다. 12세에 왕이 된 후 15세에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지만 단종복위운동의 책임을 물어 17세에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막고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 같은 곳입니다. 한 때 왕이었던 단종이 자유를 잃고 유배되었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단종의 ‘어제시’를 통해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천추의 원한을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지미 카터 전(前) 미국 대통령이 8월에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씨 석방을 위해 방북(訪北)하여 곰즈씨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곰즈씨는 지난 1월 25일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4월 재판에서 불법 입국 혐의 등으로 노동교화형 8년, 벌금 7000만원(우리 돈 8억여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지난해 8월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미국의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여 함께 귀국했던 적이 있습니다. 수억명의 미국 국민들 중에 한사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때 세계를 움직이던 전직 대통령들까지 자존심을 팽개치고 북한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한 생명이 귀중하고 자유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나라에 살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억압과 속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죄의 올무에 매여 억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매여 자유를 구속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념의 올무와 잘못된 습관의 올무 그리고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에 구속을 당하여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자유를 위해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혼자의 힘으로 벗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질병이 짐일 수 있습니다. 가난이 짐일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짐일 수 있습니다. 성격이 짐일 수 있습니다. 죄가 짐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짐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짐일 수 있습니다. 실패가 짐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무거운 짐이 되어 삶을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질병이 걸린 사람, 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 죄를 짓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등 귀신, 사람, 죄, 환경에 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짐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억눌린 억압에서 해방을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 귀신을 이천마리의 돼지 떼에게 보내어 바다에 몰사시키는 사건이 있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귀신의 조종을 받으며 자기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 수도 없었고 자기 마을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귀신이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귀신에게서 자유케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말씀하십니다. 12년 동안 병에 매여 억압과 고통 중에 있는 여인에게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 병고침은 곧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를 펴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후에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해방자임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명과 온전함과 자유를 얻게 되지만 때로는 피곤하여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내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도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견디시고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참고 인내하며 나아갈 때 의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그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참고 인내하면 선한 열매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생활을 경주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앞에 있는 영광을 기대하며 십자가를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경주를 마칠 수 없습니다. 인내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필수적인 성품입니다. 마라톤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인한 지구력이듯이 말입니다.
론 웨인(76세)은 스티브 잡스(Jobs)·스티브 워즈니악(Wozniak)과 함께 애플기업을 창업한 사람입니다. 웨인은 잡스가 게임회사 아타리(Atari)에 다닐 때 직장동료로 친분을 쌓아 1976년 4월 애플 창업에 동참했습니다. 잡스는 그에게 문서작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애플의 첫 로고와 시스템 운용 매뉴얼을 만든 사람이 바로 웨인입니다. 그 대가로 웨인은 애플의 주식 10%를 받았습니다. 잡스와 워즈니악이 각각 주식을 45%씩 보유하되, 만약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길 경우 웨인이 중재를 맡기로 했습니다. 웨인은 그러나 11일 만에 애플을 때려치웠는데 10% 주식을 반납하며 받은 돈은 고작 800달러(약 97만원)였습니다. 현재 애플 주식의 10%는 220억 달러에 달합니다. 원화로는 22조가 넘는 금액입니다. 만약 애플사가 이런 성공을 거두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22조원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영광의 면류관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편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고 힘들게 살아가던 아내가 황혼이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생을 참고 살았는데 더 이상 못살겠다고 힘든 결정을 합니다. 끝까지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죽을 때까지 인내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지금도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예수님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가족들의 핍박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신앙 때문에 사업에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행동의 제약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삶의 환경이 변화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피곤하여 낙심하거나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죄인들이 모욕하고 멸시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참으셨는데 우리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드시지요? 교회분쟁으로 7년 이상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삶의 환경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심방을 해보면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십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힘들고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또 그분들 나름대로 힘들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시키기도 힘들고, 힘들게 공부시킨 후에 취업이 어렵고, 취업하면 결혼시켜야 하는데 뒷바라지하기 힘들고, 결혼하면 혼자 벌어서는 살기 어려우니 맞벌이한다고 손주 보아달라고 하니 안보아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 하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소연을 하십니다.
교회도 어렵고 개인의 삶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확신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명과 온전함과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과 안식을 누릴 수 있음을 믿고 소망가운데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