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하 2:1-14
찬송: 382장
제목: 하나님의 훈련과정
목표: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일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연습이고 훈련입니다. 행복을 연습하고 훈련하면 행복하지만 불행을 연습하면 불행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훈련과정 중에 있습니다. 훈련도 쉬운 훈련이 있는가하면 힘든 훈련도 있는데 저희들은 7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훈련과정 중에 힘들다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여 훈련을 받다가 중간에 포기하여 장교가 되지 못하고 하사로 군대에 입대한 친구가 있습니다. 하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장교가 되려고 사관학교에 갔다가 중간에 포기하여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와 함께 한 마지막 순례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길을 떠나며 자기를 따라나서는 엘리사에게 남아있으라고 했지만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가 갑절의 영감을 받아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길갈에서 출발하여 요단까지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처럼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어떤 훈련과정을 통과해야 하겠습니까?
1. 길갈의 회개훈련입니다.(1)
1절, “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첫 번째 훈련은 길갈에서의 훈련입니다. 길갈이란 말은 “굴려 보낸다”란 뜻입니다. ‘길갈’이란 명칭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진격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그 의미를 설명하면서 할례받은 장소를 ‘길갈’이라고 부른데서 연유되었습니다.(수 5:9) 엘리사는 엘리야가 있는 길갈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승천시키고자 먼저 길갈에서 떠나도록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길갈을 떠나려고 하면서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지시했습니다. 스승 엘리야를 보고 길갈에 왔는데 엘리야는 떠나고 혼자 남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갈은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진입하여 처음으로 밟은 땅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요단강을 건넌 후에 요단강에서 주은 열 두 개의 돌을 세웠던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던 장소입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은 먼저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광야생활을 하면서 할례를 받지 못한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행한 후에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라고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고 불렀습니다.
애굽의 죄악과 수치를 굴려버리는 장소가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죄악을 끊어 버리고 굴려버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는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자꾸만 더 범죄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통계자료를 보니까 죄를 지어 감옥에 있던 사람들의 재범률은 44%에 달한다고 합니다. 범죄하여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사람들 중에 거의 절반이 다시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인 차별과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죄를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접근하는 죄의 유혹을 차단하고 끊기가 이처럼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죄를 굴려버리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살을 도려내고 피를 흘리는 할례와 같은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지은 죄를 토해내는 회개훈련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교회밖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실상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서로 욕하고 미워하고 싸웁니다. 욕심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고 하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회개해야만 하는 우리의 아픔입니다. 교회분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죄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회개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기르면서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시인하면 용서를 받는데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핑계를 대거나 변명을 하면 화가 납니다. 사울왕이 버림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늦는다고 제사장을 대신하여 제사를 집례한 것과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살진 소와 양을 살려두고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사무엘에게 핑계를 대었습니다. 불순종이 원인이었지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정결한 그릇에 담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죄를 토해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회개의 영을 달라고 하여 죄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12절 하반절에 보면 엘리사는 자기 옷을 둘로 찢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상한 감정과 통회하는 심정을 표현하는 것인데 참 회개는 마음을 찢어야합니다. 회개해야 살고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능력이 없고 믿음 성장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철저히 회개하는 사람에게 능력이 주어집니다. 천국은 죄를 안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지옥은 남보다 죄가 많아서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에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세상의 축복을 받은 곳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가나안땅의 소산(열매)을 먹었는데 그 다음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가 그쳤습니다.(수 5:10-12) 길갈은 할례를 받고 애굽의 수치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다 굴러가게 한 곳일 뿐만 아니라 땅의 소산물을 풍족하게 먹었던 곳이므로 세상적인 축복을 받은 장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평안은 물론 세상일이 형통하고 육신적인 축복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상태에만 머물러 안주하면 신앙의 성숙이 어렵습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맑은 물은 흘러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머물러 있으면 믿음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말해도 끝가지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갈의 회개훈련을 잘 받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전진하는 능력과 기쁨이 풍성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벧엘의 기도훈련입니다.(2~3)
2~3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사가 엘리야를 두 번째로 따라간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은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이 제단을 쌓았던 하나님의 집입니다.(창 28:16-22)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놀러 오거나 교양 강좌를 들으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러 오는 곳입니다. 한나가 간절하게 기도하던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사무엘이 기도하던 곳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왕과 백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사모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던 마가의 다락방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기도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힘을 잃는 이유는 기도소리가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가 부흥할 때는 기도소리가 골짝마다 넘쳐났습니다. 기도원에 기도하던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멀리가지 않고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때 대형버스들이 즐비하고 기도하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가끔씩 가보면 같은 기도원인데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기도원이 아니라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겠지만 예전보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능력이 임합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소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냥 희미하게 기도하면 능력을 받기 힘듭니다. 간절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습관을 좇아 무릎을 끓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능력을 받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를 따라다니며 간절한 소원을 품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머리로 오지 않고 기도하는 무릎으로부터 옵니다.
9절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엘리사는 그의 소원대로 갑절의 영감을 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넜습니다. 적의 침입을 예언하여 국가를 안전하게 지키기도 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빚을 갚게 하였습니다. 수넴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하고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습니다. 우물물의 독을 제거 하였습니다. 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로 백명을 먹이고 남았습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 하여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도하여 갑절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엘리사처럼 기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주일마다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며 봉사도 잘 하지만 능력은 없습니다. 오직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해 죄악을 이길 능력이 없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벧엘에서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여리고의 순종훈련입니다.(4~5절)
4~5절,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세 번 째 엘리사가 따라간 곳은 여리고입니다. 여호수아와 그 군대가 하나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여 일주일동안 여리고성을 돌아서 무너뜨린 곳입니다. 군사 전력상 말도 안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말도 안되는 것을 지시하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핑계를 대고 내 생각으로 따지면 순종 못합니다. 순종 할 바에야 초장에 빨리 해야 고생을 덜합니다.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은 사람을 선택하여 쓰시는 것이 아니라 쓰실 사람을 먼저 무조건 선택하셔서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키워서 순종하게 하십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순종에 있었습니다.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느보산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마침내 가나안땅 앞에까지 왔는데 들어가지 말고 죽으라고 하시니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렇지만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순종하며 깨끗하게 내려놓았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자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가 순종하였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고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순종하며 응답한 이사야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일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며 일을 맡았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철저히 순종하며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아말렉군대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게 하고 아론과 훌은 자기와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여호수아는 즉시 순종하여 사람을 뽑아 전쟁터에 나가 싸웠습니다. 거기에 반대하거나 시간을 끌지 않았습니다. 전쟁에는 순종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군대용어로는 복종입니다.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할 때 싸움터에 나갈 수 있습니다. 아론과 훌도 있는데 왜 자기만 최일선에 나가 싸워야 하느냐며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군사들도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하여 싸움터에 나갔습니다.
여호수아가 군사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자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아론과 훌도 왜 산꼭대기로 올라가느냐며 불평하지 않고 모세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아론과 훌은 모세의 말에 그리고 군사들은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말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은 곧 합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힘은 분산될 수밖에 없고 지휘체계는 무너져서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토록 순종을 강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영적인 싸움에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한곳에 모일 수 있고 합심된 힘은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말도 안되는 방법을 명령하시고 그 명령에 말없이 순종했을 때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무너졌듯이 순종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수적인 훈련코스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듯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요단의 희생훈련입니다.(6~8)
6~8절,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7]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8]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위로 건너더라.”
마지막 엘리사가 따라간 곳은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은 자신의 몸이 깊이 잠기는 곳입니다. 죽는 곳입니다. 자기포기와 희생을 의미합니다. 물이 목까지 차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물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가 성령충만입니다. 내 생각과 욕망은 완전히 죽어지고 오직 성령님의 지배만 받는 상태가 되어야 갑절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생각과 의지와 욕망과 감정이 다 죽어야 큰 능력이 임합니다. 내 성품이 죽는 만큼 성령님의 능력이 주어지고 죽는 만큼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성령님의 능력이 활동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악한 성품이 다 포기될 때 성령님은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자아를 죽이고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사선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당강은 죽는 곳입니다. 자아가 죽고 자신의 욕망이 죽고 생각이 죽는 곳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엘리사는 목숨걸고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요단강까지 왔을 때 비로소 엘리야는 승천하기 전에 엘리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거기서 갑절의 영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목숨바쳐 구하면 소원은 이루어지고 사명감당을 위한 갑절의 능력을 받게됩니다. 생명 내놓고 하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50명의 엘리야 선지생도들은 요단강가에 멀리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자기를 포기하고 희생하지 못해 끝까지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까지 내가 하늘로 들려 올라감을 바라보아야만 하나님이 네게 갑절의 영감을 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되 끝까지 따라가야 엘리사가 구한 영감 즉 성령의 권능, 성령의 역사를 갑절로 받게 됩니다. 목숨바쳐 사명 감당하는 자에게 하늘의 영원한 상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딤후 4:6-8절 말씀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엘리사는 엘리야가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말해도 끝까지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다른 생도들은 바라만 보았으나 엘리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따라가서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믿음을 시험해보았습니다. 엘리사는 여러 가지 시험과정을 잘 통과했습니다. 끝가지 끈기있게 따라갔습니다. 고귀한 일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갑절의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 갑절의 축복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물은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입니다. 99도, 211도에서는 절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작 1도 차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시험도 1점 차이로 합격 불합격이 갈립니다. 올림픽은 더 해서 불과 0.01초 차이로 메달 순위가 바뀝니다. 다 끝났다 싶을 때 한 번 더 살펴보고, 더 이상 길이 없다싶을 때 한 걸음 더 나가야 승리가 있습니다. 마지막 1퍼센트의 인내가 인생의 성패와 믿음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기도 했고, 천식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했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가족은 열 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열한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온 가족의 축하 속에 소년이 케이크의 촛불을 힘껏 불었지만 단 한 개의 촛불만 꺼졌습니다.
소년은 실망하며 울었습니다. 소년을 도와 촛불을 끈 아버지는 “촛불을 끄며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내년 생일에는 저 혼자 힘으로 열두 개의 촛불을 모두 끌 수 있게 해 달라고요. 제 몸은 왜 이렇게 약하고 불편할까요?"
아버지는 소년을 꼭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네가 가진 불편함은 단순한 장애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야. 그 선물의 의미를 네가 잘 찾아낸다면 넌 오히려 장애 때문에 더욱 훌륭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단다.”
소년은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날마다 걷기 운동을 하며 자기를 훈련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루스벨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훈련했을 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중에 포기하면 후회와 시련만 남고, 끝까지 가면 간증이 남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중에 포기하여 후회와 시련만 남기시렵니까? 아니면 끝까지 가서 간증을 남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훈련과정은 길갈의 회개훈련, 벧엘의 기도훈련, 여리고의 순종훈련, 요단의 희생훈련입니다. 중간에 머물거나 포기하지 말고 엘리사처럼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까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 갑절의 영감을 받아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일꾼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