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겔 34:25-31
찬송: 489장
제목: 소낙비 같은 축복
목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알고 누리며 살게한다.
개미라고 같은 개미가 아닙니다. 이런 개미도 있습니다.
거대한 코끼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미가 등산을 한다고 배낭을 메고 코끼리 배 위로 올라갔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코끼리가 개미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임마! 무겁다, 내려가라!”
그러자 개미가 앞발을 번쩍 치켜들면서 소리쳤습니다.
“조용해 자슥아! 콱 밟아 죽이기 전에!”
개미라도 이정도 배포가 있으면 코끼리가 웃겨서 살려줄 것 같습니다.
비라고 다 같은 비가 아닙니다. 찔끔찔끔 내리는 비도 있고 가랑비도 있고 소낙비도 있습니다. 둑을 허물고 인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가져오는 반갑지 않은 비가 있는가 하면 때를 따라 내리는 단비도 있습니다.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에서는 비의 고마움을 잘 모르지만 비가 자주 오지 않는 지역에서 비는 축복과 은혜의 상징입니다.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저희가 거하던 지역에 비가 내렸는데 좋은 손님이 오셨다고 축복하는 비라며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들 때 비가 환영을 받지만 여름 장마비는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니기에 다른 성경번역본에는 장마비를 단비나 소나기 혹은 소낙비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장마비 같은 축복’이라고 했다가 ‘소낙비 같은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소낙비’는 소나기와 같은 말로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그치는 비를 말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퍼붓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컬을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소낙비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임할 수 있습니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릴 때면 우산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자동차의 와이퍼를 아무리 빨리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운전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마치 폭포수처럼 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주실 때도 소낙비처럼 퍼부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낙비 같은 하나님의 축복은
1. 평안의 복(25, 27하~28)
25절,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27절 하반절~28절,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꺽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의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백성들과 더불어 ‘화평의 언약’을 맺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고 평안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면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 평안을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때문에 평안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의 화평으로 번역된 ‘샬롬’은 단지 전쟁과 다툼이 없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결핍함이 없는 상태, 넘치도록 만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나 국가사이에 중요한 약속을 할 때에 짐승을 죽여 시체를 반으로 가르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언약에 참여한 당사자 어느 누구라도 약속을 어기거나 이행하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한 짐승과 같은 운명에 처해져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주도적으로 체결하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맹세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행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이상 그들의 대적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아니하고 삶에 필요한 모든 풍성한 열매를 거두며 살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평의 언약의 첫 번째 내용은 악한 짐승이 제거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유다 백성을 괴롭게 하였던 대적들이 제거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나오는 ‘빈들’은 광야를 의미합니다. 유대광야는 짐승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위험천만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수풀은 곰이나 사자가 출몰하는 지극히 위험한 장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몰아내시고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들의 공격에 의해 피해를 입거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박하던 여러 가지 멍에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았던 대적들의 손에서 건져내어 자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않고, 그들을 위협하고 괴롭히던 짐승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힘들게 하던 대적들이 없도록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우리가 무겁게 짊어졌던 여러 가지 삶의 멍에를 풀러주시고 자유를 주실 뿐만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주던 짐승과 같은 대적들을 물리쳐주시고 놀랠 일이 없도록 평안히 거하게 하시겠다는 샬롬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얼마나 놀랠 일들이 많습니까?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는 전쟁과 테러의 포화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기상재해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천안함이 폭침되어 수십명의 젊은 장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용역들에게 짐짝 취급을 당하며 소화기 분말을 마시면서 교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입에 담지 못할 욕과 수모를 겪었고 용역들에게 잡혀 감금까지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일 뿐 아니라 생명처럼 사랑하는 우리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담장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세월들을 돌이켜보면 험난하고 어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정말 놀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속박과 멍에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고 그들을 괴롭혔던 대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라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 안정이 필요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잘해야 합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야 합니다. 정치력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국가경제와 가정경제가 어려워지면 정국은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가 좋아도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거나 외부의 적이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면 평안이 깨어집니다.
교회가 평안하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먼저 영적지도력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영적지도력이 흔들리면 교회가 불안해집니다. 담임목사님을 중심으로 하여 당회원들과 제직들이 한마음 되어야 합니다. 온 성도들이 한마음 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들을 극복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약해보였지만 위험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이겨왔습니다. 앞으로도 담임목사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편에 견고하게 서 있을 때 어떤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일군이 필요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12제자들과 더불어 성령충만한 120명의 일군들이 중심이 되어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영적리더십과 헌신된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선교마인드가 세계선교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영적리더십과 더불어 충성되고 헌신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재정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어려움 중에도 많은 분들이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런 물질로 카자흐스탄과 인도와 중국에 선교를 했습니다. 불우한 이웃들을 섬기고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집안의 가장이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가장이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녀들 앞에서 가장의 권위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가정의 질서가 세워질 때 가정이 평안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에 혼돈이 일어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질서가 무너지면 평안이 깨어지고 불행이 싹트게 됩니다. 가족들 상호간에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하고 건강해야합니다. 가정에 환자가 발생하면 평안이 깨어집니다. 물질도 있어야 합니다. 당장 생계가 곤란하다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면 평안할 수 있습니까? 답은 ‘아니오’ 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과 근심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입니까? 참된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지 않으면 참된 평안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마음속에 계시지 않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요 14:2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화의 세계는 이사야 65장이 보여주는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고 생명이 길고 수고한 대가를 누릴 뿐만 아니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 65:25)고 말씀합니다. 울거나 부르짖음이 없으며 악한 짐승이 없어지고 약육강식이 사라져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 즉 평화의 나라입니다. 평안한 삶입니다.
이런 세상을 사람들의 노력만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영웅들이 이런 세상을 꿈꾸며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건설할 수 있는 샬롬의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유토피아를 만들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면 소낙비같이 강권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사 평안의 복을 넘치도록 누리며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2. 풍요의 복(26-27상, 29)
26~27절 상반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27]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29절,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우리나라에서만 살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땅에 살고 있는지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좋은 환경을 가진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을 보면 삶의 환경이 열악합니다. 날씨와 기후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섬기던 교회의 청년들과 약 일주일동안 몽골의 시골마을에 머물면서 선교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땀 흘리며 땅을 파고 농구장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씻으려고 했는데 물이 부족하여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바가지에 작은 구멍을 뚫고 졸졸 내리는 물에 얼굴만 겨우 씻고 말았습니다. 물이 얼마나 귀하던지 그들에게 물은 생명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사역을 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선교사님이 수고했다며 국립공원을 구경시켜주셨습니다. 테릴지국립공원이었는데 그곳에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나무들도 많았습니다. 척박한 땅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물이 그 땅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사방이 국립공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를 실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쉽게 물을 만날 수 있고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풍요의 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도 그런 나라에 비하면 너무나 풍요로운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대부분 빗물에 의해서만 과일과 곡식을 심어 재배할 수 있는 천수농경이 대부분입니다. 가나안 지역에 내리는 비는 10, 11월에 내리는 가을비인 이른 비와 1,2월에 내리는 겨울비와 3,4월에 내리는 봄비를 포함하는 늦은 비가 있습니다. 이렇게 적당한 시기마다 비가 내려 주지 않으면 농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백성들은 심각한 기근을 겪어야 했습니다. 적시에 내리는 비는 생명수와 같습니다. 때를 따라 내리는 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은혜와 축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장소를 언급한 26절의 ‘내 산’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 사면’에 비를 내리게 하겠다는 표현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온 땅에 비를 주시겠다는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를 주시되 소낙비처럼 풍성히 주시겠다는 약속은 경제적 풍요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된 소낙비를 내리시는 결과입니다. 밭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이 소산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합니다. 땅이 아무리 비옥해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땅은 소산을 낼 수 없습니다. 사실 비옥한 땅이라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 땅은 사막으로 변하고 맙니다. 지구상에는 크고 작은 사막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막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막들 중에는 과거에는 아주 비옥하여 많은 열매와 곡식을 생산하던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땅이 기후의 변화와 함께 비가 내리지 않으면서 아무런 열매도 낼 수 없는 황무한 사막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땅이 옥토가 되고 거기서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려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합니다.
곡식이 잘 자라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름진 토양과 풍부한 물과 햇빛입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햇빛이 늘 풍부하였으므로 풍년과 흉년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는 물과 토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수확을 위해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어주시고 풍성한 비를 내리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열두명의 아들들을 불러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 요셉에게 축복하면서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라고 하면서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후손의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위로 하늘의 복’은 이슬과 비와 햇빛을 가리키며 ‘아래로 원천의 복’은 샘들과 지하수와 같은 물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가뭄이 심한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어서 물을 풍부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며 풍요를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된 삶, 형통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소낙비가 필요합니다. 식물이 열매를 맺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절대적인 요소이듯이 인간이 복된 삶을 살기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내리는 축복의 소낙비가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축복의 소낙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복의 원천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때를 따라 내리는 단비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잘못관리하면 오히려 저주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가나안땅과 소돔땅을 놓고 선택하라고 했을 때 물이 풍성하고 초지가 많았던 소돔땅을 선택하여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후에 모든 것을 잃고 자기 몸만 도망 나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잘못 관리하면 물질의 노예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물질은 축복이 아니라 파멸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물 얻을 능을 주셔서 얻게 하시는 축복은 소낙비처럼 내려주시는 풍요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파종하기에 적합한 옥토를 주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동행의 복(30-31)
30~31절, “[30]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 [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며 동행하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 나라들이 함께 알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유다백성의 비참한 처지를 방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악한 대적을 물리쳐 평안을 주시고 때를 따라 소낙비를 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한 청년이 암수술을 받게 되어 수술받기 전에 병원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옆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머님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 딸까지 암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수술실로 가기 전에 이사야 41:10절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군생활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암송하며 힘을 얻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외국에 살고 있는 동생들이 와서 월요일에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어릴 때 뛰놀던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준비한 음식을 나무그늘에 모여앉아 먹으며 가족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부모님과 동생들과 함께 가는 것이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누구와 함께 여행을 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는 것이 여행과 같습니다. 동행자가 누구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유머>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노부부가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 주방에 가면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갖다 주겠소? 잊어먹을지도 모르니까 종이에 적어서 가요~!"
그러자 부인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알아욧~~~!!! "걱정 말아요~"
잠시 후 부인이 삶은 계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들어오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고맙소~! 그런데 소금은 왜 안가져왔소?"
함께 오래 동안 살다보면 서로 비슷하게 닮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망증 까지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 고통을 받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고난을 함께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면서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함께 하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몸소 겪으시면서 인간의 아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에녹과 노아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갔고, 노아는 모든 인류가 홍수로 심판을 받아 죽을 때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을 받아 아담 이후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여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조롱받는 모습을 하나님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갈 때도 때로는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아픔을 함께 겪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신명기 1:31절입니다.『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우리가 하나님과 교회 때문에 당하는 조롱과 멸시와 아픔을 함께 당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힘들게 당하고 계십니다. 혼자 힘으로 갈 수 없다고 주저앉은 우리를 친히 안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로 시작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
매일 발걸음 마다 예수 인도 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 하셨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여정동안 소낙비 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축복의 비결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사람’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아담’으로 본래 ‘흙’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무가치하고 덧없으며 허망한 인생의 본질을 단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해당하는 원문은 ‘엘로힘’으로 ‘전능자, 창조자, 절대 주권자’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의 하나님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흙에 불과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양과 같은 우리는 홀로 두면 갈 길도 몰라 방황하다가 사나운 맹수에게 공격을 당하여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여 평안과 더불어 풍요와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단지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모든 문제를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흙과 양에 불과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면 이런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소낙비 같은 축복은 평안의 복, 풍요의 복, 동행의 복입니다. 감당할 수 없이 퍼부어주시는 소낙비 같은 축복을 누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