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기도

하마사 2010. 7. 9. 21:09

본문: 마 20:29-34

찬송: 487장

제목: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기도

목표: 응답받는 기도방법을 알고 실천하게 한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꼽으라면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도로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금년 4월에 미국 위스콘신 주 법원의 바바라 크랩 판사는 “정부에 의해 특정 종교 행위가 지지되고 권고되고 있는 국가기도의 날은 정교 분리와 개인의 종교 자유에 관한 미국 연방헌법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교계와 정계가 국가 기도의 날이 건국 초기부터 전해져 온 미국의 역사적 유산으로,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공화당의 게리 밀러 의원은 “기도는 미국의 역사를 통틀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며 “국가기도의 날은 누구에게도 기도를 강요하지 않으며,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국회의사당 국가 기도의 날 행사를 주관해 온 공화당 로버트 애더홀트(애틀랜타 주) 하원의원도 “국가 기도의 날은 미국 전통에서 바뀌어서는 안되고 간섭되어서는 안되는 중대한 역사”라며 “이 나라는 건국 선조들이 기도와 기독교 신조에 헌신했기에 위대함에 이르렀고 이 같은 유산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국가적으로 기도의 날을 정하여 올해로 59회째를 맞았습니다.

요즘에 저는 교회의 법적인 문제 때문에 교회에 들어가지 못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혼자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도를 합니다.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혼자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합니다. 소리를 내어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금식기도를 합니다. 작정기도를 합니다. 릴레이기도를 합니다. 이처럼 기도의 방법과 유형은 다양합니다. 어떠한 방법이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능력이 임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응답받은 기도의 비결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꼭 이렇게만 기도해야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이 있지만 본문에 나오는 두 명의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모습을 통해 기도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응답받은 기도는

 

1. 일심동체 기도입니다.(29-30)

 

29-30절,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저는 아이들이 셋이나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어려운 일들도 있지만 아이들 때문에 웃을 일도 많습니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둘째가 중학교 2학년이고 막내가 6살입니다. 가끔씩 피자가 먹고 싶다거나 치킨이 먹고 싶으면 막내를 시켜서 전화를 하게 합니다. 전화를 받으면 오빠들이 옆에서 막내딸에게 시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막내가 먹고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함께 먹고 싶어서 아빠에게 전화를 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혼자서 요청해도 맛있는 것을 가끔씩 사주지만 아이들 모두가 함께 요청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도 같은 원리입니다. 혼자서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아이의 잉태를 위해서 혼자 성전에 올라가 술취한 여인처럼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낯을 벽으로 향하고 혼자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셨습니다. 혼자서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분명 들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마음으로 함께 기도할 때 더 확실히 응답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은 여리고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외쳤습니다. 혼자서 소리치지 않고 둘이서 함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힘껏 외쳤습니다. 둘이 일심동체가 되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은 열심히 소리치며 기도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거나 화를 내었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기도에 응답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지나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무리가 모여 기도할지라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각기 다른 기도를 하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헛갈리실 것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밭을 갈 때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가면 힘이 모아지기 때문에 서로 힘들지 않지만 방향이 다르면 혼자 하는 것보다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할지라도 기도제목이 다르면 서로의 힘이 빠집니다. 교회가 지향하는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마음이 서로 같아야 같은 지도제목을 가지고 힘을 모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두 소경은 같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두 사람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한 사람처럼 일심동체가 되어 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이 신앙으로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대상과 기도제목이 다르면 응답도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부처님께 기도한다면 마음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결혼배우자를 위해 기도할 때도 서로가 생각하는 대상자가 다르다면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가정만이 아니라 교회와 어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심동체가 중요합니다.

구약성경 역대하 20장에 등장하는 여호사밧왕과 백성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압자손과 암몬자손이 몇 마온 사람들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유다를 침공했을 때 여호사밧왕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자 백성들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성전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야말로 온 백성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연합한 자신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피차에 살육하며 진멸되고 말았습니다. 일심동체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일심동체 기도의 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다가오자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쓸 때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120명의 사람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성령충만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사람은 120명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일심동체로 기도하면 오늘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자 여종을 통해 돈을 벌던 주인이 고소하여 매를 맞은 후에 옥에 갇혔습니다. 발에 착고가 든든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성경을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 실라는 잠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18:19-20절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장작불이나 숯불은 모여 있을 때 화력이 좋습니다. 흩어지면 불이 점차 약해지고 꺼지게 됩니다. 얼마전에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숯불로 고기를 굽는 집이었습니다. 일하는 아저씨가 벌건 숯불이 든 그릇을 식탁에 놓고 가셨습니다. 그 위에 석쇠를 놓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숯불이 좋던지 미처 고기를 먹기 전에 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식사하시던 권사님이 점원을 불러 숯을 한 개 꺼내달라고 요청하여 아저씨가 와서 집게로 벌겋게 타고 있는 숯불을 꺼내자 잠시 후에 불도 약해지고 숯불의 색깔도 옅어졌습니다. 반대로 꺼져가는 숯불도 활활 타는 숯불 옆에 놓으면 다시 힘을 내어 타기 시작합니다. 일심동체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두 소경이 일심동체가 되어 기도할 때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응답을 받았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비록 지금 예배드리는 장소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한마음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마음 된 우리의 기도제목에 응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2. 부르짖는 기도(31)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도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작은 소리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큰 소리를 내어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묵상으로 기도하는 것을 듣지 않고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만 응답하신다고 말하면 잘못입니다. 묵상으로 기도하거나 부르짖으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기도방식만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활동하던 동아리는 시내산선교회라고 하여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광주기도원에 가서 철야하며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기도원 룸에서 함께 기도하고 새벽에는 산에 올라가 개인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학교를 위해, 섬기는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대상자를 위해, 가정과 개인을 위해 밤을 지새우며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도 신학교 후배들이 그 기도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주 금요일 저녁에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하여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기도하는 후배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그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그런데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에 왜 기도를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어떤 방법이든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기도는 묵상으로 하던지 통성으로 하던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의 겸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기도를 빼면 삭막해집니다. 말씀만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 영적으로 건조해집니다.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어야 하고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지식이 아닙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심장으로 하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이 대화를 걸어오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소경은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묵상으로 기도해도 예수님이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소경은 마음속에 눈을 뜨고자 하는 열정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고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각색 병을 다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르짖음은 마음의 간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목소리를 다하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시끄럽다고 신경질을 내었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두 소경은 그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더욱 소리 질러 기도했습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머물러 서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첫 번째 소리쳤을 때는 예수님이 반응을 보이시지 않다가 더욱 크게 부르짖어 기도할 때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여호수아 6장에 기록된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도 부르짖는 기도의 효력을 볼 수 있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문을 닫고 이스라엘백성들을 막고 있을 때 무너뜨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매일 한 번씩 성 주위를 돌고 칠 일째는 성을 일곱 번 돌고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치지 않아도 무너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이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대로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질러 외칠 때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쳤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마음을 모아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친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부르짖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져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과부의 기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강청하며 괴롭게 하자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눅 18:7-8)

과부가 얼마나 억울하면 그렇게 번거롭게 재판관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억울함을 호소했겠습니까? 호소할 때 울면서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 앞에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원한을 풀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 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어떤 기도의 제목도 좋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고 우리가 해결 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도 괜찮습니다.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시며 응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교회를 향해 지금까지 행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크고 비밀한 일로 응답해주시리라 믿습니다.

 

3. 확신하는 기도(32-34)

 

32-34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두 소경이 일심동체가 되어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의 대답이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즉시로 대답했습니다. 분명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기도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부를 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소경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이스라엘을 외압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실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소경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밝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며, 벙어리의 혀로 노래하게 하며,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실 메시야라는 사실과 기도하면 응답해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저희의 눈을 만져서 고쳐주셨습니다. 확신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일심동체가 되어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확신하는 기도가 그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간 사이에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제자들을 찾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확신없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믿음을 키우신 후에 아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결국 확신하는 기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며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 가에 손을 대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옷가에 손을 대었을 때 병이 떠나갔습니다.

야고보서 1:6-8절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예화>

남북 전쟁 당시 미국의 워싱턴 장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는 필라델피아의 밸리포지라는 마을에서의 전투였습니다. 군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워싱턴이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비서인 루이스는 '필승'을 확신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장군은 하루에 네 번씩 성경을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웠습니다. 전투는 끝까지 침착성을 유지하는 쪽이 승리하는 법입니다."

워싱턴은 성경묵상과 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지혜를 얻어 대승했습니다.

기도는 '절망, 한숨, 눈물'을 '희망, 찬양, 미소'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저녁에 모여 기도하는 제목을 응답받기 원하십니까? 두 소경처럼 기도할 때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일심동체가 되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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