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믿음의 자화상

하마사 2010. 2. 3. 20:40

본문: 막 9:14-29

찬송: 344장

제목: 믿음의 자화상

목표: 믿음의 자화상을 살펴보며 능력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한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동물은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크게 “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사는 또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동물의 왕인 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머뭇거리던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암사자요”

교사가 물었습니다. “왜 암사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아이가 하는 말, “우리 집 대장인 아빠는 엄마를 가장 무서워하거든요.”

아이에게 비친 엄마는 아빠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그림에 자화상이 있듯이 믿음에도 자화상이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자화상이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가데스바네아라는 지방에서 가나안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군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보고한 내용을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10명은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은 강하고 성은 견고하여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고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뚜기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땅을 보고 왔음에도 보고내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군들은 자신들이 메뚜기와 같았다고 하였지만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그렇게 장대하고 강한 아낙사람이 오히려 우리의 밥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승리자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골리앗과의 전쟁이력이나 체격조건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열세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싸우기 전에 승리자 자화상을 이미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믿음의 자화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버지의 자화상: 혹시나 믿음(21-22)

21-22절,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 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염세철학가였던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예순이 넘었어도 여행할 때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딜 가서나 음식을 먹을 때 먼저 강아지에게 먹여서 이상이 없어야 먹었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누가 독약을 넣지 않았을까? 의심하고 먹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의심하는 믿음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계실 때 귀신들려 고통중에 있는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예수님께 왔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제자들에게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벙어리 귀신이 들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장애를 겪고 있었고 간질 증세까지 있는 중증환자인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백방으로 노력하여 마침내 제자들에게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기관들에게 논쟁거리만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아들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소년이 심하게 발작하는 긴급한 상황에서 소년의 아버지는 이제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은 그가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부탁하여 9명의 제자들이 함께 합심기도 했지만 고치지 못하자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고칠 수 있으면 고쳐달라는 혹시나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병이 강박증과 편집증입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병이 강박증입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점검하고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가스밸브를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믿지 못하여 반복하여 확인하고 집으로 들어가고 아니면 전화로 집에 있는 사람에게 확인하는 등 자기의 행동을 믿지 못하는 병입니다. 차의 문을 잠갔으면서도 잠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반복하여 확인하는 것도 일종의 강박증입니다. 자기를 잘 못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강박증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을 철저하게 마무리하는 장점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편집증은 본인도 힘들지만 상대방을 못살게 하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의처증과 의부증이 일종의 편집증입니다.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을 의심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한번 상대방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의심하기 때문에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갑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여서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합니다. 이 병은 고치기도 힘듭니다. 치료하는 사람마저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상대방을 믿는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음식을 믿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서로 믿음을 근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도 이렇게 신뢰와 믿음이 중요하듯이 신앙생활에도 믿음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문제가 생기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의심하면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 속에는 능력이 믿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의심하는 자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시지만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난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하였고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의심하는 믿음 즉 ‘혹시나’ 믿음은 능력이나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2. 제자들의 자화상: 어찌하여 믿음(28)

28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자책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안된다고 하는 소극적인 믿음입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신 예수님은 어떤 집에 들어가셨고 제자들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무리들과 서기관들이 없어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반복해서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한 이유는 전도 파송 때에 이미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받았고 또 실제로 많은 귀신도 쫓아내었으며 병자들도 고쳐보았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는 되었는데 이번에는 왜 할 수 없었느냐는 푸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사를 받는 것은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지키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한번 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지키는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는 기도를 통해 유지되고 더욱 확장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마치 충전용 밧데리와 같습니다. 충전용 밧데리는 어느 정도 사용했을 때 재충전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은사도 그와 같습니다. 과거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지만 기도로 충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자들이 은사를 활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한 번의 실패로 자신들을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능력을 행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지만 실패하자 낙심하였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때는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모르면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지만 제자들은 원인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실패의 원인이 기도였음을 처방해주셨습니다. 29절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아기는 평균 2천 번을 넘어져야 비로소 걷는 법을 배운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한 번 넘어져 자책하였지만 예수님께 문제를 가져옴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리들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생활 하지만 어려움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다시 일어서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제자들처럼 문제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해결방안을 처방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는 어찌하여 안됩니까’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자책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처방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만 그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과 당시 제자들의 기도생활이 소홀했음을 암시하는 처방을 말입니다.

우리들도 기도할 때입니다. 교회를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과거에 했던 기도를 믿고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어찌하여’와 같은 질문을 또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자화상: 되게하는 믿음(23)

23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군대에 있을 때 구호가 ‘안되면 되게하라’ 였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안되는 것을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안되는 것을 되게하려면 얼마나 많은 훈련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특수부대 군인들은 지독한 훈련 속에서 강인해지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되게하는 믿음은 할 수 있도록 하는 믿음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일이라도 우선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안된다고 생각하고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안됩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안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안된다고 믿으면 안되는 이유와 핑계가 많이 생기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결국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로 ‘can’은 조동사로 쓰면 ‘할 수 있다’지만 명사로 쓰면 ‘깡통’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무엇인가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 슐러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안 되는 것,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9명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도 안 되었던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문제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문제가 크고 작은 것이지 예수님이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질병과 가벼운 질병은 사람의 기준입니다. 어려운 문제와 쉬운 문제도 사람의 기준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리더 사람이 떠나는 리더’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항로가 있고 바다에는 해로가 있다. 길에는 인도가 있고 차도가 있다. 인생길에도 성공으로 가는 길이 있고 실패로 가는 길이 있다. 성공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이런 팻말이 세 개 있을 것이다. 결심한 대로 끝까지 해라, 간절한 소원을 가져라, 믿음을 가져라.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안되는 것을 되도록 변화시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믿음은 인생의 마스터키입니다.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아파서 울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성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으로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왜 할 수 없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대이지만 제자들은 그 능력을 행하지 못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29절입니다.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가 문제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거지기도, 선포기도, 명령기도가 있습니다. 거지기도는 달라고만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건강을 주세요. 돈을 주세요. 직장을 주세요. 합격을 주세요 등 기도할 때마다 달라고만 조르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만은 안됩니다.

선포기도가 있습니다. 주실 것을 믿고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건강주실 것을 믿고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업장이 잘 될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질 것을 믿고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 될 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명령기도가 있습니다. 마귀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일으키고 가정의 불화와 마음의 평안을 앗아가는 악한 사단을 향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돋보기로 초점을 맞출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까만 종이에 돋보기로 초점을 맞추고 계속 비추면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와 나중에는 불이 붙게 됩니다. 빛을 모아서 집중적으로 비추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레이저치료도 이런 원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집중할 때 초점을 맞출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초점을 바꾸면 변화가 없습니다. 조금 해보다가 안된다고 이곳저곳으로 초점을 옮기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지만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수로보니게에살던 한 여인의 소원은 사랑하는 딸이 치유 받는 것이었습니다. 흉악한 귀신에게서 자유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고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예수님도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는 이 여인을 개와 같다며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더구나 이 이방 여인의 딸은 절망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닙니다. 흉악한 귀신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가능성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불가능한 상황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도전했습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서 강청했습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잠시의 거절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쳐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강청합니다.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하나님께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감탄하십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하는 이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시고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을 다녔으니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의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하고 기도도 했는데 왜 안됩니까?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입니다. 기도에 초점을 맞추고 능력이 나타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결국 승리합니다. 기도에 초점을 맞추고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되게하는 믿음은 결국 기도가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없이는 되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듯이 질병이 1주일 후에 나을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죽을병이라고 겁을 주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후에는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오늘 말썽부리는 것을 가지고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잘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통장에 돈이 10억 들어오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 오늘 당장 백만원이 없다고 걱정하고 염려하겠습니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혹시나’ 하는 의심하는 믿음은 늘 불안과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과 같은 ‘어찌하여’ 믿음은 자기를 자책하는 믿음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믿음입니다. 과거에는 믿음생활을 잘하여 능력을 행했지만 지금은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되게하는’ 믿음은 예수님처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입니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근거는 기도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하여 기도하면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을 능히 돌파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되게하는 믿음’의 자화상으로 무장하여 어떤 난관도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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