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암투병 3년 '연세대 봉사왕' 박홍이 교수의 마지막 수업

하마사 2009. 12. 17. 09:28

"빈민촌 아이들에게 음악 가르칠 수 있도록 딱 5년만 더 살았으면…"

"늘 말했듯이, 끝까지 포기하면 안됩니다. 시험 잘보세요."

15일 오후 3시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UIC) 210호. 이 학교 물리학과 박홍이(朴洪二·65) 교수가 '일반 물리' 과목 수강생 21명에게 문제지와 답안지를 나눠줬다. 이날은 박 교수가 내년 2월 정년퇴임에 앞서 제자들을 강의실에서 만나는 마지막 날이다. 1986년 9월 부임 후 23년 만이다.

박 교수는 재직기간에 SCI(과학인용색인) 등재 논문 340편을 썼다. 그는 "퇴임 후 명예교수가 되더라도 강의는 더 맡지 않을 생각"이라며 "젊은 강사들이 활동할 여지를 빼앗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이미 3년 전에 '새로운 직업'을 생각해뒀다"고 했다.


15일 오후 3시 연세대 언더우드 국제대학 강의실에서 이 학교 물리학과 박홍이 교수가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나눠준 뒤 강의실을 나서고 있다. 췌장암을 앓고 있는 박 교수는 내년 2월 정년퇴임 한다./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박 교수의 새 직업은 저소득층 미취학 아이들에게 무료로 음악을 가르치는 '음악선생님'이다. 이를 위해 그는 밴드 활동을 하는 제자들과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동료 교수 10명을 모아, 무료 음악학교를 열 공간을 수소문하는 중이다.

그는 연세대에서 '봉사왕'으로 통한다. 그는 1993년부터 연세대 교수들로 구성된 봉사단체 '연세나눔동네', 연세대가 운영하는 '연세자원봉사단' 단장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박 교수는 "이런 활동을 하나씩 정리하는 중"이라며 "앞으론 음악학교 일에만 매달릴 생각"이라고 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한 계기는 2006년 겨울 암 진단을 받으면서였다. "건강검진을 하러 갔더니 췌장에 악성종양이 생겼다고 합디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주치의는 박 교수에게 "췌장암일 가능성이 있다"며 "췌장암 완치율은 5%에 불과하고, 다른 장기에 번질 경우 1달을 넘기기 힘들 수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내가 검도 공인 5단인데…. 내게 종양이 생겼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병원 3곳을 더 찾아갔다. 진단이 엇갈렸다. 1곳에서는 "악성종양 맞다"고 했고, 다른 2곳에서는 "(증식·전이·침투 위험이 없는) 양성종양"이라고 했다. 주치의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일단 조직검사를 하고, 암일 경우 방사선 치료를 하자"고 했다. 박 교수는 고민 끝에 거절했다.

"아내가 충격으로 쓰러질까봐 집에도 함구했어요. 병이 급속히 악화될 경우를 가정하고, 남은 인생을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지난날을 돌아보는 데 쓰기로 했어요."

박 교수는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딱 5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연세대 재학 중 아버지 사업이 망해 학교를 중퇴했어요. 1971년 친구에게 빌린 돈 300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을 떠나 데이튼 대학과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물리학 석·박사를 받았지요. 방학 때마다 슬럼가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가난한 음악가들이 동네 불량청소년들에게 기타를 가르친 뒤 아이들이 달라지는 걸 보고 '언젠가 나도 꼭 저런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했어요."

박 교수는 무료 음악학교를 열기로 결심했다. '병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 병에 걸린 사실을 그냥 잊어버리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아코디언 연주법을 익히고, 뜻이 통하는 지인들을 모았다.

처음 진단과 달리 박 교수는 3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았다. 주치의는 최근 박 교수에게 "아직까지 종양 수치가 정상인보다 4배쯤 높지만, 혹시 처음 진단이 오진일 수 있겠다"고 했다.

박 교수는 "하늘이 '다른 일을 시작하라'고 내게 충격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올 초 부인 김명자(62)씨에게도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부인은 "왜 치료를 받지 않았느냐"고 뒤늦게 펄쩍 뛰었다.

이날 강의실을 나오면서 박 교수는 지갑을 열어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발급되는 '어르신 교통카드'를 보여줬다. "만 65세 생일을 맞은 지난 10월에 받았어요. '정말 은퇴하는구나' 싶었지요. 미련은 없어요. 제겐, 가르칠 다른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2009/12/16,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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