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김우화 미오림복지재단 이사장

하마사 2009. 10. 11. 11:29

전 재산 사회환원 ‘작은 거인’…“소외된 이웃 돕는 것이 천명”

 

뜻밖의 형 죽음에 ‘천명’ 깨닫고 장애인·노인시설 설립해
지금껏 50억원 투자… 대학원만 18곳 나온 억척 공부벌레
“탄탄한 기초 구축, 후손 대대 물려 많은 사람 돕게 할 것”

 

 

   
미오림복지재단 봄마을.


한국은 급속한 고령화 속에서 다양한 사회변화를 겪고 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인의 주거변화다. 지난해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면서 과거 ‘양로원’으로 불렸던 노인요양시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2008년말 현재 전국 노인양로시설은 모두 1332개소. 이곳에 1만8868명의 어르신들이 입소해 있다. 우후죽순 증가하는 노인요양시설에 대한 우려도 높다. 자칫 돈벌이에 급급한 나머지 어르신들에 대한 서비스나 관리는 도외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평생 모은 재산을 쏟아 부어 노인요양시설을 세우고 노인복지현장에 뛰어든 이가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에 자리한 미오림복지재단을 설립한 김우화(62) 이사장이다.  

 

                                                      장한형 기자 janga@nnnews.co.kr


   
김우화 이사장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노인요양사업에 투신한 것은 안타까운 사건이 전환점이 됐다. 국내 굴지의 공대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던 형이 건설현장도 아닌 자택에서 감전으로 세상을 떠난 것. 김 이사장은 당시의 사고를 가슴 절절히 기억하고 있다. “정말 믿기지 않았다. 전기 분야에서 장인 타이틀도 갖고 있던 형이 집에서 감전돼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허망하고 안타까웠다. 인간사, 모든 일이 하늘의 뜻이라지만 갑작스런 사고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냈을까, 문득 사회에 봉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해 재단을 설립하게 됐다.”

‘미오림복지재단’. 그가 현재 가족과 함께 열과 성을 다해 가꾸고 있는 사회복지재단이다. ‘미오림’이란 기적을 뜻하는 ‘미라클’(miracle)과 오리가 숲으로 들어가는 형상, 그리고 ‘드림’(dream)에서 따온 말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한 딸 민정(30)씨가 지었다.

부지는 노후를 보내기 위해 매입한 경북 문경의 11만57000m²(3만5000평) 땅에 마련했다. 하지만 재단설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김 이사장은 “지방공무원들과 마찰이 생겼고, 당시 현직 시장이 복지재단을 설립하면서 허가가 되질 않아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3년 9월 ‘미오림복지재단’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이듬해 2월 경북 문경시 사회복지시설 제1호로 장애인복지시설 ‘친구마을’을 개원했다. 자택에서 홀로 지내던 장애인들이 모여 서로 ‘친구’가 돼 ‘마을’을 이루는 장애인보호작업장이다. 낮에 돌볼 사람이 없는 지역 장애인들을 모아 공동작업을 통해 재활치료를 겸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친구마을에서는 정신지체 장애인과 지도교사 3~4명이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봉투에 풀을 붙이는 작업이나 쇼핑백 만드는 작업을 한다. 하루 100~200원 정도의 수입은 각자 통장에 입금해 준다. 한번은 ‘국가지원을 받아서 장애인들을 착복한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관들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복지시설의 기능과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주민들의 오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애인 가족을 둔 주민들의 대환영은 물론이었고, 집에 가기 싫다며 떼를 쓰는 장애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우화 이사장은 내친김에 노인요양시설도 짓기로 했다. 그래서 세운 곳이 2008년 4월 준공한 ‘봄마을’이다. 입소하는 어르신들께 따뜻한 봄을 느끼게 해 드리고 싶어 붙인 이름이다.

봄마을의 원장은 아내 이순례(54)씨다. 약대를 나와 20여년 동안 약국을 경영하던 아내는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든 남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남편의 뜻에 동의한 아내는 약국 문을 닫고 일주일에 3일 이상을 문경에 머물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아내에게 매달 170만원의 월급이 주어지지만, 고스란히 재단운영을 위해 쓰고 있어 ‘자원봉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평생대학원 유아학과를 다니고 있는 딸 민정씨의 도움도 크다.

그런데, 김우화 이사장은 고집스럽게도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스스로 자생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의 굳은 신념을 아는 지인들이 알음알음 후원을 자청, 현재 700여명의 후원자들이 돕고 있다.

그렇다고 넉넉한 살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매달 2000~3000만원이 적자다. 노인요양시설 ‘봄마을’의 경우 50명 정원에 최근 35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돼 그나마 재단운영이 조금은 나아졌다. 입소 어르신 가운데 1급은 143만원, 2급은 141만원 정도를 장기보험을 통해 지급받아 28명의 직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시설운영을 하고 있다. 직원들의 월급이 적으니 당연히 이직률도 높고 구인도 힘들다.

어려운 살림이 김우화 이사장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보통 한 방에 6명의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것이 국내 요양시설의 관례지만 3명이 들어가도록 설계한 것부터 다르다.

또 국내 노인요양시설 가운데 최초로 봄마을이 국제표준화규격(ISO) 인증을 얻는다는 방침도 세웠다. 입소 어르신들에게 찬송가를 불러주거나, 아예 직원 합창단을 꾸려 자체 공연도 한다. 격주로 휠체어에 모시고 야외에서 음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김우화 이사장은 “시설과 서비스 측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각고의 노력한 끝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재벌기업의 장모도 입소해 생활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보려는 욕심이 그를 재촉하고 있다.

“미오림복지재단에 쏟아 부은 유형무형의 자산이 대략 50억원쯤 된다. 그런데 셈해보니 앞으로 20억원은 더 들여야 할 것 같다. 지인들은 다들 ‘미친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두세 명은 참 잘한 일이라고 격려해 위안을 삼고 있다.”

그는 공부에도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다. 고려대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모두 18곳의 대학원을 다녔다. 1년에 평균 2곳에 나갔고, 지금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도 못하겠더라. 최고경영자과정에 가면 이제는 고령자에 속해 고문역할을 맡는다. 과거에는 60대가 주력이었지만 최근에는 40·50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05~2007년 문경대학에서 아내와 함께 공부해 사회복지사는 2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보육교사는 1급 자격증도 갖고 있다.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그는 한 달에 조찬회만 7~8회 나갈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사회복지사업을 통해 ‘공부’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겸허한 마음’이다.

“죽음이란 룰을 가진 게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누구도 예외 없이 적용 받는 것이 죽음이다. 기저귀 차고 나와서 기저귀 차고 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대부분 일평생 열심히 모아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그리 집착할 일은 아니다”고 말하는 김 이사장은 “7·3법칙을 아느냐”고 질문했다.

“내가 가진 것의 70%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고, 나머지 30%는 현재 내 위치, 내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 남을 돕도록 노력하는 것이 7·3법칙이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는, 사회복지법인을 후손에 대물림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김우화 이사장이 선택한 ‘7·3법칙’인 셈이다.

김우화 이사장은 “봉사를 하다보면 큰 보람을 느낀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보호시설과 노인요양시설 외에 장애인생활시설을 하나 더 마련해 복합적으로 봉사를 하고 싶다.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이들 시설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살아 있는 동안 기초를 다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나의 임무”라고 말했다.

 

-노년시대신문 188호 5면, 2009/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