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시각 평가로 우물 안 개구리 벗어나
교수평가 기준 높이고 "세계 일류 논문 써라"
"졸업생들 일 잘해요?"… 기업에 귀 기울이는 대학
"대학평가가 잠자던 한국 대학들을 깨웠다(손병두 서강대 총장)"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었다. 우물 안 올챙이였다(김종량 한양대 총장)" "국내에서 폼 잡고 있던 한국 대학의 수준이 드러났다(오영교 동국대 총장)"….
지난달 12일 발표된 '2009 조선일보·QS 아시아 대학평가'는 대학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대학의 국경 장벽이 사라진 '아시아 단일 대학시장'의 시대에 한국 대학들의 국제적 위치와 수준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확인됐던 것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대학의 핵심 경쟁력인 '연구능력'을 위주로 ▲질(質)적인 요소까지 평가한 결과는 기존의 국내 대학평가 순위나 한국 사회의 통념과는 차이가 컸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 국내 대학들의 공통된 얘기다.
특히 '아시아 대학평가'는 국내 대학들이 지금까지 양적 성장에 치중했던 데서 벗어나 질적인 발전으로 방향을 트는 전환점이 됐다. 평가결과가 발표된 직후부터 대학들은 '국제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대학'으로 커나가기 위한 개혁에 돌입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남들이 읽어주는 논문을 써라"
대학들은 평가 성적의 60%를 차지하는 '연구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우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회에 기여하는 질 좋은 연구를 수행하는 일이 대학 본연의 기능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동국대는 올 2학기부터 교수 공개 모집 제도를 없애기로 했다. 대신 연중 어느 때나 채용문을 열어놓고 전원 '특별 채용' 방식으로 뽑기로 했다. 대학 내 '가상 연구소(Paper Lab)'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연구전담교원을 '가상 연구소' 소속으로 채용하는 것이 기존 연구소·단과대 소속으로 하는 것보다 절차가 간단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정년보장 받은 교수들을 3등급으로 나눠 특별연구비를 차등 지급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건국대는 오명 총장이 직접 나서 '연구역량 강화 TF팀'을 꾸리고 교수 업적평가의 연구 기준을 높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까진 'SCI급 논문 편수' 등 양적인 기준만을 적용했지만 앞으론 '임팩트 팩터(영향력 지수)' 등 질적인 측면도 반영하려는 것이다. 김지인 교무처장은 "현재 인문·자연계열로만 구분돼 있는 연구 평가 기준을 학문·학과별로 세분화할 계획"이라고 했다.
부산대도 내년부터 논문의 질적 수준을 바탕으로 교수들을 평가할 수 있도록 지표 개발에 착수했다. 김남철 기획부처장은 "박사후연구원(post-doc)에 대한 지원을 1년 더 늘려, 이들과 함께 연구하는 교수들의 연구 효율을 높이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경희대는 역량이 뛰어난 정교수의 정년을 없애는 제도를 도입해 연구 의욕을 강화하기로 했고, 울산대는 국제 학술대회·심포지엄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박종국 기획과장은 "현재 울산지역과 공학분야에 편중된 학술대회·심포지엄의 대상과 분야를 더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해외 석학·외국인 수재를 잡아라"
국내 대학의 국제화 노력에도 비상이 걸렸다. 세계 명문대학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국내 대학의 국제화 수준을 높이는 일이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대학들은 단순히 외국인교수·학생의 머릿수를 채우는 것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국제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우수한 외국인교수·학생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짜고 있다.
이번 평가에서 국제화 부문 국내 1위를 차지한 한국외국어대는 최대 강점인 국제화에 더욱 주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외국인학생 비율·한 학기 이상 외국대학에서 다닌 국내 학생 비율을 30%까지 높이는 것이 목표다. 다음 학기엔 박사 이상 학력의 외국인교원 40여명을 각 학과 자체 심사를 거쳐 채용할 계획이다.
- ▲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한 기업의 면접시험을 치르고 있는 젊은이들. 아시아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각 대학 졸업생 평판도를 조사한 결과 영어권 국가 대학들의 성적이 대체적으로 좋았다. 한국은 4개 대학만 졸업생 평판도 50위 내에 들었다. / 조선일보DB
해외 자매결연 대학 학생들이 교환·파견학생으로 오는 것은 물론, 외대에 신입생으로 입학하거나 편입하는 길도 열어주기로 했다.
한국외대는 다국적기업 연수생, 재외공관 추천 장학생도 더 많이 받아들일 예정이다. 이런 국제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정부의 ‘교육역량 강화사업’ 지원금 중 7억원을 투입한다. 박철 총장은 “국제화의 질적인 측면과 다양성까지 함께 이뤄갈 것”이라고 했다.
이화여대는 하버드대, 뉴욕대, 런던대, 파리3대 등 세계 명문대학 14곳에 ‘해외 거점센터’를 구축했다. 앞으로 영어권 국가뿐 아니라 아시아·유럽 지역에도 거점 캠퍼스를 열어 이곳에서 신입생의 60%가 해외 경험을 쌓도록 할 계획이다. 또 외국인교수와 학생들을 위한 ‘글로벌 원스톱 서비스 센터’를 세워 의료·자녀 교육·숙소·언어 등 국내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총체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가톨릭대는 지난 1월 박영식 총장 취임 당시 ‘아시아 국제화의 허브 대학’을 목표로 정하고, 세계 각국의 가톨릭대학들과 교류를 맺어 다른 대학들과 차별화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부천 성심교정을 국제캠퍼스로 탈바꿈시키고, 신입생들은 다음달 완공되는 영어기숙사를 반드시 거치도록 할 계획이다. 박 총장은 “국제화라는 변화의 소용돌이를 기회로 삼아 힘차게 도약하겠다”고 했다.
건국대는 중국 각 성(省)의 명문대와 결연, 그 중 9개 대학에 ‘건대 유학 대비반’을 만들어 중국 학생들을 엄선해 데려오고 있다. 한림대는 이라크 의료진 교육, 아시아 마을 재건 유엔 사업 등에 참여한다. 이영선 총장은 “세계적인 이슈에 뛰어들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 국제화”라고 했다.
◆“기업은 대학의 고객이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이 직접 평가에 참여하는 ‘졸업생 평판도’ 지표는 갈수록 취업이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각 대학 경쟁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잣대가 됐다. 이에 대학들은 인재의 수요자인 기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교육과정에 적극 반영하기 시작했다.
동국대는 다음달 9일 기업체 인사 담당자 50여명을 대상으로 전문가 특강을 실시한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인 셈이다. 지난달 16일엔 교내 극장에서 열린 연극 공연에 기업 인사 담당자 150여명을 초청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우량 중소기업 CEO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할 계획이다.
오영교 총장은 “기업을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은 대학의 ‘제품’이나 마찬가지인 졸업생들을 받아들이는 고객”이라며 “고객 중심의 경영으로 대학의 사회적 평판을 높여가겠다”고 했다.
한국외대는 지난 16일과 18일 200여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을 초대해 외대 졸업생들에 대한 기업의 평판을 들었다. 박철 총장을 비롯한 부총장·처장단이 모두 참석해 이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도전정신과 열정을 키워라” “외국어 실력은 물론 실무 능력까지 겸비해라” 등 다양한 조언이 쏟아졌다고 한다.
인하대는 평가 발표 이후 교내에 ‘세계대학평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평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대학 내 각 기관으로부터 다음달 초까지 접수한다. 인하대는 매년 2000여 기업들에 학생들의 활약상과 연구·수상 실적을 소개하는 리포트를 발송하고, 물류기업 CEO들을 초청해 세미나도 연다.
성균관대는 2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졸업생에 대한 평판도 설문 조사를 실시, 기업들이 성대 출신 사원들의 장·단점을 지적해주면 이를 교육과정에 반영하고 있다.
한양대는 국내외 교육·취업 관련 박람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여는 등 평판도를 높이기 위한 학교 홍보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중앙대는 기업과 사회의 요구에 맞춰 학과를 새롭게 개편하는 방안을 내놓고 학내에서 논의를 거치고 있다. 박용성 이사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대학 졸업생을 데려다 쓰는 기업 입장에서 볼 때 정말로 필요한 공부를 대학이 학생들에게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009/6/23,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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