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7:11-17
찬송: 514장, 521장
제목: 어디에 서 계십니까?
목표: 어떤 행렬에 서있는가 돌아보고 결단하게 한다.
얼마전 어떤 전자제품 상점 앞에 긴 행렬이 서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픈행사를 하면서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선물을 받기 위해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버스정류장 부근에 미사리 경정장에 가려는 사람들이 긴 행렬로 줄을 서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 취업박람회를 할 때면 취업에 관심있는 많은 행렬이 생기고, 아파트 청약을 할 때도 수많은 행렬이 줄을 지어 기다립니다. 유명한 공연이나 운동경기를 할 때면 티겟을 사기위해 어김없이 줄이 만들어집니다. 거기에 서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똑같은 목적을 향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행렬에 서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관심과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여러 행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러 갈 때 에서는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고 야곱은 세 떼로 나누어 에서에게 다가가는 행렬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는 요셉을 만나기 위해 가족들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가는 행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해방되어 가나안땅을 향해 가는 긴 행렬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의 행렬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뒤 따르던 무리들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던 무리들도 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던 행렬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행렬이 등장합니다. 나인성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행렬과 나인성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입니다. 병자를 살리고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발걸음이 가벼웠지만 장례의 행렬은 슬픔과 절망에 싸인 무거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두 행렬을 비교하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어디에 서 계십니까?
1. 장례행렬입니다(12).
12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언젠가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는데 표범이 새끼를 잃고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맹수라도 자기 새끼는 귀한 법입니다. 새끼가 죽자 그 옆에서 울면서 먹지도 않고 슬퍼하는 표범처럼 다 큰 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아픔 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세 명의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사로,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성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곡하는 사람들과 함께 상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장사지내러 나가는 행렬이었습니다. 나인성에 생명을 주러 오신 주님과 시체로 변한 청년과 오열하는 청년의 어머니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외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아들마저 죽어 장사하러 가는 길이니 그 원통함과 비통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나인성 과부는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놓인 사람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불쌍한 사람의 대명사로 고아와 과부를 들고 있는데 오늘 성경의 과부는 외아들까지 잃는 슬픔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를 위로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없었습니다. 절망에 절망을 당한 여인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도 이 여인처럼 절망과 좌절과 슬픔 속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끊어지고 꿈이 상실되고 소망마저 완전히 끊어진 과부처럼 절망속에 혼자 울고있는 사람은 없는지요?
그리고 청년은 나인성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버림받은 시체였습니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와도 함께 살 수 없는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혼자라는 생각으로 외로이 가슴아파하며 자신의 관속에 누워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자기가 스스로 짜놓은 잘못된 생각의 관속에 자기를 묻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슬픔의 장송곡과 함께 관에 누워 남들에게 떠밀려 무덤으로 향하는 이 청년처럼 패배의식과 절망의식에 사로잡혀 세상 속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관을 메고 따르는 무리들도 슬픔에 싸여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곡하며 나인성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심정 또한 비참했을 것입니다. 비탄과 절망감을 안고 상여를 메고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기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함께 메고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슬픔과 절망의 관을 메고 따라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있다면 장례행렬에서 박차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끝은 절망이고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서 계십니까?
2. 예수님 행렬입니다.(11)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장례행렬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생명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문둥병자와 중풍병자, 귀신들린 사람 등 각색 병을 고치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탄식과 절망이 변하여 환희와 감격이 넘쳤습니다. 이런 은혜를 함께 체험한 제자들과 무리들도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했습니다. 주님이 행하실 능력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장례행렬을 따르는 무리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발걸음은 힘차고 경쾌했습니다.
이런 행렬의 맨 앞에 서신 예수님은 나인성에서 나오는 상여행렬 가운데서 원통하게 울부짖는 과부를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주님께서 상여에 다가가셔서 “울지 말라”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고 외쳤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관속에 누워 있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사망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만났을 때 사망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인성문 앞에서 만난 두 행렬은 생명을 따르는 무리와 죽음을 따르는 무리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 무리에 속해있는지요? 실망과 좌절가운데 나인성을 빠져나가는 죽음과 슬픔의 행렬속에 섞여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장례행렬 속에 있는 무리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는지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기쁨과 감격과 기대감으로 나인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듯이 우리들도 생명을 따르는 무리임을 기억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듯이 주님을 따를 때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여를 따라가는 장례행렬이 아니라 생명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행렬에 서 있는 사람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행렬의 끝은 생명이고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서 계십니까?
3. 제자 행렬입니다.(11)
1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예수님 행렬 중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제자와 허다한 무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고 허다한 무리는 멀찍이서 따라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제자와 무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는데 멀찍이서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압니다. 손해가 될 때는 아주 멀찍이 따라갑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 적당히 믿으려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유익이 없다고 생각이 들 때는 예수님을 버리고 언제나 뒤로 돌아서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을 보기 위해 따라다녔습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도 오천명 이상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리들 중에 한사람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무리 속에 있다고 자만하거나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도 언젠가 그들처럼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 속에 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제자 중에도 수제자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쳤지만 보잘 것 없는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마저도 주님을 버렸는데 하물며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늘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가는 거리를 점검하며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되신 주님을 따르는 무리에서 제자로 변해가야 합니다. 제자들도 비록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들은 대부분 순교하며 주님을 끝까지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의 주님을 따르는 제자 행렬에 동참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그 동기가 주로 병자의 믿음이나 혹은 주위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과부나 주위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청년을 살린 것이 아닙니다.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청년을 살리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고치시고 싸매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들 중에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있습니까? 주님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를 찾아와 ‘울지 말라’위로해주시고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 속에 빠져있는 과부를 향해 ‘울지 말라’고 말할 수 는 있지만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울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다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고통가운데 울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이 찾아오셔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도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절규가 주님보시기에 동정과 연민을 살만큼 간절하다면 주님은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 주님이 불쌍히 여기실 만큼 간절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절규하며 기도하면 주님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발걸음을 멈추시고 다가오셔서 울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과부를 보시고 ‘울지 말라’고 하신 후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관에서 일어나서 말까지 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기쁨의 행렬로 변했습니다. 초상집이 잔치집으로 변했습니다. 무덤으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방향을 바꿔 다시금 나인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다시금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죽어서 무덤으로 실려가던 청년은 스스로 관에서 나와 걸어서 생명의 행렬에 합류하여 나인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슬픔과 절망의 관을 메고 가던 무리들도 기쁨의 가마를 메고 나인성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한 마디 말씀 “청년아 일어나라”가 완전히 죽음을 생명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이렇듯 소생시키는 만남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만남입니다.
성경에는 ‘일어나라’는 단어가 참 많습니다. 네 사람에게 들것에 실려 지붕을 뚫고 내려와 예수님께 고침받은 중풍병자에게 주님이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자 나았습니다(마9:6).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해 주님이 “아이야(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굼]”고 외치셨습니다(막5:41, 눅8:54). 베데스다 못가에 38년된 병자를 향해 주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말씀하시자 그가 나았습니다(요5:8). 구약 사사기에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 135,000명을 무찌를 때 300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을 향해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고 말하고 싸워서 승리합니다(사7:15).
오늘도 주님은 장례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났듯이, 죽은 야이로의 딸이 일어났듯이, 38년된 병자가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듯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시 깔고 눕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기드온 군대가 4500:1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아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 하신 ‘일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이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장례행렬에 있는 사람이나 예수님 행렬 중에 있지만 뒤쳐져 따라오는 무리들에게도 들려져서 모두가 제자 행렬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화>
1957년 일본의 마을 신용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던 안도 모모후쿠씨는 평생 다니던 직장이 갑자기 파산해 47세의 나이에 퇴직금 한푼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안도씨는 1950년대 일본은 전쟁 이후 식량난으로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기 위해 긴 행렬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며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빵 대신 국수를 만들되, 싸고 맛있고 오래가는 음식이 목표였습니다. 끈질긴 연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실패뿐이었습니다. 어느덧 1년이 지나고 개발을 포기하려던 즈음, 그는 아내가 튀김을 만드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밀가루를 튀기면 수분이 증발해 오래 보전할 수 있어!”
그가 ‘순간 유열건조법’이라 이름 붙인 제조법은 이렇게 탄생했고, 1958년 뜨거운 물에 면만 넣으면 2분 안에 조리되는 신기한 국수가 출시되면서 일본 열도가 떠들썩했습니다. 사람들은 ‘마법의 음식’이라고 열광했고 제품은 나오자마자 동이 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면’의 탄생이었습니다.
절망의 행렬을 보고 같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변화를 추구할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어디에 서 계십니까?
장례행렬입니까? 예수님 행렬입니까? 예수님 행렬 중에 무리들입니까 아니면 제자 행렬입니까? 지금 서 계신 자리를 점검하시고 일어나 제자 행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7: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리는 많지만 제자들은 많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협착한 길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제자 행렬에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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