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76:1-12 찬송: 460장
제목: 영광 받으실 하나님
목표: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며 영광 받으실 분이심을 알게한다.
본시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위협에서 구원해 주신 사실을 인하여 아삽자손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시를 쓰게 된 배경은 히스기야 통치 14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고자 진을 친 산헤립이 이끄는 앗수르군대를 격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 찬양시입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앗수르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랍사게라는 장수가 하나님을 능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고 항복하라며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실로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럼 아삽자손이 찬양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지키시는 하나님(2-3)
2-3절,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하나님의 장막 즉 하나님의 처소는 살렘 곧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처소와 하나님의 백성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앗수르의 손에서 지키신 것은 하나님의 처소를 지키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화살과 방패와 칼로 무장한 막강한 앗수르의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지키셨습니다.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 훈련된 보초가 깨어서 성을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으시면 허사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은 나라와 교회와 일터 그리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과 동맹국이 있다할지라도 그리고 새콤과 같은 경비업체가 사업장을 철통같이 지키고 아침에 가족들이 출근하고 등교할 때 안전에 유의하라고 신신당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모두가 허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보호시설과 안전장비가 없는 무방비상태의 장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키시면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임을 믿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거하던 도단성이 이와 같습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 군대를 보냈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불말과 불병거로 지키고 계심을 알았던 엘리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시 121:3-8,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나라와 교회, 일터와 가정을 지금까지 지켜주셨고 앞으로도 지켜주심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2.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4-7)
4-7절,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지켜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이한 능력으로 앗수르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 4절에 ‘마음이 강한 자’란 마음이 완악하여 남의 나라를 침공한 앗수르를 가리킵니다. 즉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멸망시키려던 앗수르의 강한 군사들이 손을 놀리지 못하는 패배자가 되어 자신들의 소유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다 송장이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하 19:35절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땅을 향하여 갈 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라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맞았습니다. 사방이 막혔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진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도록 하시고 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셔서 택한 백성들을 무사히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런 능력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절망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8-9)
8-9절,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라는 두 속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두 속성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를 반드시 심판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셨기에 그 심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보호하시고 기이한 능력까지 행하셔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심판을 받는 대상도 있기 마련입니다. 8-9절에 보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칼빈은 ‘온유한 자’는 환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가운데 신앙의 인내를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하늘에서 일어나서 판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역사의 종말의 날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해서도 반드시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종말인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은 죽음 후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들을 위해 천국과 면류관을 예비하고 계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지옥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않다면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함께 이루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일한 하나님이시지만 선택받았느냐, 버림받았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대조되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삽자손은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영원토록 지키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능력을 행하시며 악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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