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27:1-14 찬송: 446장
제목: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목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한다.
본 시편을 지은 다윗은 마지막절인 14절에서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면서 살았던 자신의 고백이며 그 때 누리는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라는 말은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왜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면 어떤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까?
1. 능력주심의 은혜(1-3)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갈 정도로 어릴 때부터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였기 때문에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빛으로 구원자로 그리고 생명의 능력으로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군대가 다윗을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 자기를 치려할지라도 두렵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군대를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고 하여 궁궐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가기도 했고 사울이 죽이려는 많은 위기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 40: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되고 곤비하거나 피곤치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한 바울사도도 그렇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면서 어떤 환경적 어려움도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이길 수 있다고 자신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바울 외에도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위인들의 삶이 그들의 능력으로 두려움과 장애물들을 극복했습니까? 그들 중에는 우리보다 못한 능력의 소유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을 주실 때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어떤 어려움과 장애물도 극복하고 담대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두려움과 염려, 걱정과 근심의 환경이 엄습할 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도록 능력주시는 하나님, 독수리같이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기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2. 높여주심의 은혜(5-6)
5-6절, 『[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6]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셔서 환난 날에 두려움을 이기게 하실 뿐만 아니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십니다. 또한 보호해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바위 위에 높이 세워주시기까지 하시고 원수를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세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시 23편 4-5절의 내용이 이와 비슷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나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전하게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원수가 보는 앞에서 잔치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주시니 은혜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 꿇어 절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하만이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그의 동족인 유다인 모두를 죽이려는 악한 흉계를 꾸미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하만을 달게 하시고 모르드개를 높여 주셨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인해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후에는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는 최악의 자리로 곤두박질치지만 하나님은 요셉이 어디에 있던지 그를 지켜주셨으며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높여주셨습니다.
환난과 고난가운데 계십니까? 누군가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계십니까?다윗과 요셉과 모르드개를 보호해주시고 높여주신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상황가운데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면 우리들도 반드시 지켜주시고 높여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영접하심의 은혜(9-10)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실정을 하자 하나님은 그를 대신 할 왕을 뽑기 위해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이새의 집으로 사무엘을 보내셨습니다. 이새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떤 아들을 왕으로 세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모든 아들들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시는 자에게 기름을 발라 왕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장남 엘리압으로 시작하여 아비나답, 삼마 등 모든 아들이 지날 동안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기에 7명이 모두냐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새는 막내아들은 지금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말째 아들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귀한 사무엘제사장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 참석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왕의 기름을 부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들판에서 부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마저 다윗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부모가 버린 다윗을 하나님은 영접하시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우리를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시는 분이십니다. 눅 15장에는 자기의 재산을 모두 챙겨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면서 재산을 탕진한 후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돈이 있을 때는 주변에 친구들도 많았겠지만 돈이 없어 거지가 된 아들에게는 더 이상 영접해주는 사람이 없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돈이 많거나 명예가 있거나 힘이 있으면 이익이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접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진심으로 영접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외모나 가진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사랑으로 영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살인죄와 간음죄를 지은 다윗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영접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다시 영접해주시고 사명을 계속 맡겨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넓은 사랑의 품으로 나를 영접해주는 분이심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능력주심의 은혜, 높여주심의 은혜, 영접하심의 은혜가 있음을 믿고 언제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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