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고통의 원인과 해결

하마사 2007. 6. 27. 04:40
 

본문: 욥 16:1-22               찬송: 395장

제목: 고통의 원인과 해결

목표: 삶에 닥치는 고통의 원인을 알아보고 해결점을 찾게 한다.


친구들의 충고에 아무런 위로를 얻지 못한 욥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다시 한 번 밝힌 다음 중보자 되시는 하나님께 이 모든 고난을 제거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장에 나타난 욥이 당한 고통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1. 친구들의 오해(2-3)

2-3절,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3]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충고했지만 오히려 욥은 더욱 큰 아픔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욥은 이런 자기 친구들을 가리켜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했습니다. 친구들이 자기를 위로하는 대신에 격노케 하였으며 치유 대신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고 했습니다. 위로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말로 상처를 준 경우입니다.

동한말 어느 마을에 순거백이라는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먼 지방에 사는 친구에게 문병을 갔는데 마침 흉노족이 쳐들어와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순거백은 아픈 친구의 곁을 지켰습니다. 보다 못한 친구가 “나는 이미 병든 몸이니 지금 죽어도 아까울게 없네. 하지만 자네는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서 떠나게.” 그러자 순거백이 “나 혼자 살자고 의리를 저버리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야. 난 여기서 자네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네.” 이윽고 흉노족이 집으로 와서 성안이 모두 비어있는데 두 사람만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순거백에게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순거백이 “제 친구가 중병이 걸려 거동이 매우 불편합니다. 나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병든 친구를 죽게 놓아두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답하자 그 말에 감동을 받은 흉노족 장수는 “의롭지 못한 우리가 의로운 나라에 쳐들어왔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라고 말하며 즉시 철수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구의 말 한마디로 두 명의 친구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까지 살린 이야기입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의 말이 고통 중에 있는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음에도 욥의 친구들은 오히려 고통을 배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욥의 고통은 친구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말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친구들이 다 오해하고 상처를 준다할지라도 순거백과 같은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끝까지 함께 계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사람들의 멸시(10)

10절,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욥에게 또 하나의 고통은 사람들의 멸시였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은 10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들도 나를 경멸하는구나. 욕하며, 뺨을 치는구나. 모두 한패가 되어 내게 달려드는구나.

친구들만 오해하고 말로 힘들게 한다면 참을만하겠는데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멸시하며 욕하고 뺨을 치면서 한 패가 되어 달려들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가 외로움입니다. 사람들이 향우회, 동창회, 친목회 등 여러 모임을 만들고 활동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로움을 이기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중견목사님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 취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와 취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로부터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도 멸시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다가 순식간에 이런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이나 군중심리에 의해 어떤 사람을 매도하고 비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닥친 고난이 그를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우물물을 길러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멸시하고 조롱하기에 사람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인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를 멸시하는 동네 사람들에게로 뛰어가 당당히 기쁨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이런 변화와 감격이 있고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버리심(11-13)

11-13절, “[11]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 그 살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욥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친구들이나 사람들의 오해나 멸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악한 자의 손아귀에 던지시고 목덜미를 잡고 내 던져 부스러뜨리셨으며 사방에서 쏘는 화살의 과녁을 삼아 자기의 허리를 뚫고 내장을 쏟아 내셨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했음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몰라주고 멸시한다고 해도 하나님만은 자기를 이해하시고 인정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하나님마저도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욥은 가장 참담했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처럼 엄청난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절부터 21절을 보면, 이 세상은 비록 자기를 잘못 판단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호소를 들으시고 정당한 판단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불평과 죽음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이제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자기에게 힘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삶도 어쩌면 욥의 고난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에 대한 희망을 제공합니다. 야고보서 1:2-4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지 못하지만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모든 기대를 끊어버리는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이 시작됨을 믿어야 합니다.

욥이 고통을 받은 원인은 친구들의 오해와 사람들의 멸시 그리고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고 인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과 같은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 아니 사랑하는 가족들조차도 오해하고 멸시하며 하나님마저도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욥이 하나님께 다시 소망을 두고 인내하며 이겼듯이 눈물로 기도하며 나아가면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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