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나인성의 두 행렬

하마사 2007. 6. 11. 21:18

본문: 눅 7:11-17      

제목: 나인성의 두 행렬

목표: 장례행렬이 변하여 생명행렬로 되게 하신 예수님을 알게한다.


몇 일전에 가슴 아픈 심방을 하였습니다. 어떤 구역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구역식구 중에 교회출석을 잘 하지 않는 성도님의 아버님이 소천하시고 장례를 마치고 왔는데 위로심방을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 보다 더 안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님의 25살된 장남이 오토바이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심방시간을 빨리 잡아 방문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님은 약 2주전에 대장암으로 소천하셨고 그 전에 아들이 사고로 죽었는데 식당을 하는 분인데 식당문도 닫고 핸드폰을 끊고 언니집에서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지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엄마에게 참 잘하던 아들인데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한달 차이로 아들과 아버지를 모두 잃었는데 아들을 잃은 고통이 훨씬 컸다고 합니다. 아들의 사진을 잡고 밤마다 울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하니 마음이 저미어왔습니다. 불효중에 가장 큰 불효는 부모님보다 앞서 세상을 뜨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가실 때 일어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 나인성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이 있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장사지내는 행렬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행렬은 생명의 행렬이었으며 장사지내는 무리는 장례행렬이었습니다. 대조적인 장면입니다. 나인성문 앞에서 이 두 행렬이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청년을 명하여 살려주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 두 대조적인 행렬이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의 행렬과 기쁨의 행렬로 일치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기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13)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마 9장에 보면 두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며 따라오자 주님이 그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자 주님이 고쳐주십니다(마 15:22).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외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문제를 해결해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면서 장례의 행렬 중에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그 울음을 멈출 수 있습니까? 가장 애통하고 처절한 울음이었을 것입니다. 과부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죽었으니 그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참으라고 참아질 울음이겠습니까? 동네사람들 조차 달려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울음을 멈추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시선을 나에게 고정시키시길 원하십니까? 과부처럼 불쌍히 보이면 됩니다. 그 처절함과 울부짖음이 있을 때 주님은 쳐다보시고 가시던 길을 멈추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외침이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 저녁에 이런 심정을 가지고 우리 교회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가정을 그리고 내 자녀를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2. 가까이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14)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 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내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이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취하신 행동이 울지 말라는 말씀과 더불어 가까이 오사 관에 손을 대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시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과 멀리 있으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깁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야곱의 우물에서 물 길러 온 여인과 대화를 통해 여인을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상종조차 하지 않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의 영혼과 정신적인 우울증과 상처를 치유하시고 그 여인을 통해 수가성 전체를 변화시키십니다. 그 때 그 여인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요 4:9). 아무도 다가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눅 24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절망에 빠진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성경말씀을 풀어주시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셔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 때도 실패와 좌절가운데 빠진 그들의 가까이 오셔서 말씀으로 용기를 주시고 소망을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예수님이 말씀으로 살리실 수 있지만 주님은 무덤으로 가까이 가셔서 나사로를 불러내셨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직접 찾으셔서 보시고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주님은 그 현장에 가까이 친히 가셨습니다.

물론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현장에 가시지 않고 하인의 병도 낫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규를 함께 하길 원하시기에 직접 찾으셨던 것입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들 가까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과부의 곁으로 오신 주님, 멸시와 경멸의 눈총을 받으며 살던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까이 오셨던 그 주님이 지금 우리의 가까이 오셨음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좋은 것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15)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가까이 다가오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장 원하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아들을 살려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영생의 물을 주어 다시 목마르지 않게 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질병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병고침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주님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가져가시는 분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헌금을 가져가시는 분, 시간을 가져가시는 분, 세상적 재미를 가져가시는 분, 나의 소중한 것을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외아들 예수님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이 무엇인들 안 주시겠습니까?

이 저녁에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가까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저녁에 이런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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