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살전 1:1-5 찬송:
제목: 기억되는 성도
목표: 믿음, 소망, 사랑으로 기억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야 합니다. 요즘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기업이 잘 되기 위해서도 좋은 직원들이 있어 그들이 아름다운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 낼 때 좋은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에는 좋은 가족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소개하고 있는데,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칭찬만 받는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는 교회,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처럼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는 교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칭찬과 책망을 받는 교회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칭찬을 받으면 칭찬 받는 교회요, 책망을 받으면 책망 받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칭찬받는 교회였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이던 A.D. 50년경이었습니다. 당시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앞서 빌립보에서 선교하던 중에 심한 박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방에서의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로 직행하여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대부분의 초대교회가 개인의 가정에서 출발했듯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이 집회장소로 사용했던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유대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바울은 그 지방을 급히 떠나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도 데살로니가교회는 주변교회의 본이 될 정도로 건실하게 성장하였습니다. 타지방에 가서 계속 전도하던 중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늘 기도로 교통할 정도로 사랑과 관심을 기울였습니다(2절).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성도들이었기에 바울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까요?
기억되는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이 많았지만 바울의 기억에 남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며 살지만 그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듯이 바울의 기억에도 남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데살로니가교인들이었습니다.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그들은 무엇으로 기억되었습니까?
1. 믿음의 역사로 기억되었습니다.
몇 년전 모 건강진단센터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달 동안 고민하던 정순자씨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은 후 건강 판정을 받고는 암 연구기금 1천만원을 병원에 기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채 한 달도 안되는 기간이었지만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의 진단에 따라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의사선생님의 말 한마디도 이처럼 믿을 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데 하물며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참된 믿음은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개인과 가정과 지역사회, 나라와 교회를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죄사함을 가져옵니다. 병을 고칩니다. 문제를 해결합니다. 죽은 자를 살려냅니다. 자연현상까지도 변화시킵니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믿음의 역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길 수 없었던 전쟁을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한 기록들과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와 질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왔을 때 믿음을 보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 기록들, 심지어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믿음을 북돋아 주신 후 마침내 죽은 딸을 살려내는 역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오지 않던 땅에 믿음의 사람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내립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히고 뒤에서는 애굽군사들이 칼을 들고 따라오는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믿음의 사람 모세가 홍해를 육지처럼 가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난공불락처럼 가로막고 섰던 여리고성 조차도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 앞에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기독교는 살아 숨쉬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해도 이 역사하는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결국 내 안에 역사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의인 열 사람이 없어 망했던 것처럼 우리의 공동체에도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의인들만 있다고 하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없는 사람 99명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역사를 가진 한사람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가진 사람은 99%의 불가능 속에서 1%의 가능성을 보고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말만 무성한 교인들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를 간직한 역사하는 믿음으로 기억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2. 사랑의 수고로 기억되었습니다.
왜 부모님의 사랑이 고귀하고 아름답습니까?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수고를 동반한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일생을 수고하고 희생하신 삶입니다. 지금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고생스러운 일도 마다하시지 않을 분들임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땡볕에서 그토록 땀을 흘리며 지은 농작물들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싸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대가없이 주는 수고가 따른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님의 사랑은 아름답고 위대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위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포기할 정도인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이니 얼마나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이겠습니까?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헌신적으로 사랑해준 사람들입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 독립기념관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기념관이 1관에서 7관까지 있었는데 7관 맨 앞에 나라를 위해 일생을 드린 근세의 인물들을 실제인물처럼 만들어 수십명 세워놓았습니다. 국가도 나라를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국가적으로 기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그들을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을 드리고 헌신한 사람들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감성이 풍부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며 희생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영원토록 기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지금도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으로 보상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의 수고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바울 일행에 기억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3. 소망의 인내로 기억되었습니다.
더운 여름철에 지치지도 않고 울어대는 매미는 수명이 한 달인데, 그 한 달을 울기 위해 6년을 굼뱅이로 지낸다고 합니다. 미국에는 17년 매미가 있는데 이 매미는 한 달을 위해 무려 17년을 굼뱅이로 생활한답니다.
매미는 굼뱅이로 있을 때 매미가 되어 하늘을 날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음껏 자랑하겠다는 희망으로 몇 년간을 땅속에서 지내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70-80년 이 세상에서 굼벵이처럼 지내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멋진 영생이 보장되어 있는데 매미보다 더욱 인내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소망이 있다고 하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화낼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서운한 것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무시와 멸시를 당해도 덮어둘 수 있습니다.
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토록 모진 고문을 견디며 사자밥이 되거나 톱으로 켜는 고통 속에서 죽어갈 수 있었습니까? 시체들이 뒹구는 토굴 속에 살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굼벵이보다도 더 못한 삶을 산다할지라도 하늘나라의 면류관을 생각하며 소망가운데 인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라고 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며 살라는 말씀은 아니지요. 잘못된 종말사상은 몇 년 전 다미선교회와 같이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며 건전한 교회의 이미지에도 큰 상처를 안겨주고 거기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의 가정을 깨뜨리고 개인의 영혼을 피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 속에서의 삶을 성실히 최선을 다하여 살되, 세상의 삶이 때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사람의 성도들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각기 자신들의 어깨에 짊어지고 순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가 너무도 크고 무거워서 꾀를 냈습니다. 도중에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톱으로 십자가의 밑과 양쪽을 조금씩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마지막 종점에 이르러 예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을 지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도랑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 도랑을 넘어야만 저편에서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운 면류관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께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온 사람들은 도랑 위에 십자가를 걸치고 무사히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꾀를 내어 몰래 톱으로 십자가를 자른 사람은 그 도랑을 건너지 못하고 다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 자녀, 질병, 물질, 성격 등 여러 십자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는 나를 더 성숙하게 하시는 복의 도구임을 깨닫고 소망가운데 인내하며 감당하여 하나님께 기억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도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망가운데 인내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간직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기억되는 성도가 될 때 자연적으로 좋은 교회가 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처럼 모범적인 신앙을 간직한 이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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