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빌 1:27-30 찬송:
제목: 복음에 합당한 생활
목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한다.
27절의 그리스도 복음이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생활하다’는 ‘시민으로 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미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이중국적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였는데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국적문제를 악용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중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적은 살아있을 때까지만 유효하지만 천국국적은 영원토록 유지되는 국적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자격이 있듯이 천국의 시민으로서 책임적인 삶을 살 때 참된 천국시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대가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중국적을 이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도 천국시민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해야 천국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지탄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 즉 천국시민으로서 생활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일심으로 협력해야 합니다(27).
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서 ‘일심으로’란 ‘한 마음으로’ 라는 뜻이고 ‘서서’란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늘어 서 있는 군대가 방패를 들고 굳건히 서서 다가오는 적들을 맞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말로 전투에 임할 병사들의 임전 태세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협력하다’라는 말은 ‘함께 경기하다, 한 팀으로 싸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본래는 고대 그리스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을 벌일 때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일심으로 서서 협력하라는 말은 결국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성도들에게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일치단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싸움에 있어서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할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힘을 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외부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빌립보교회에 내분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공동체적 삶을 꾸려감으로서 “한 영”과 “한 혼”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이광복권사님이 구역장으로 있는 1411, 1412구역식구들과 함께 곤지암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의 시골집이 곤지암에 있어서 구역야유회로 가서 텃밭에 있는 상추를 뜯어 씻어서 큰 양푼에 비벼 식구들 전체가 함께 맛있게 먹고 쉬어 온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찌게와 돼지고기 볶음, 김치 등 반찬이 맛있었지만 그것보다도 큰 양푼에 상추를 손으로 뜯어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서 함께 먹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양푼 비빔밥을 성도들과 그렇게 먹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먹는 것을 이야기 하려 한 것이 아니라 먹고 난 이후에 집 구경을 하느라 뒤뜰에 갔는데 거기서 수많은 개미들을 발견했습니다. 가만히 구경하다보니 개미집이 여러 군데 있었고 그 개미집에서 수많은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작은 개미가 있는가하면 큰 개미도 있었고 그리고 날개가 달린 개미들도 있었습니다. 개미집을 구경하다가 장난을 치고 싶어 작은 나무 막대기로 개미집 앞을 조금 흩어보았습니다. 개미들이 난리가 난줄 알고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이던지 모릅니다. 한참을 장난치다가 미안해서 먹이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벌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굼벵이처럼 천천히 움직이다가 위협을 느끼면 몸을 꼬고 죽은 듯 가만히 서있는 벌레였습니다. 그 벌레를 개미집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랬더니 큰 개미, 작은 개미 할 것 없이 떼거지로 덤벼들었습니다. 벌레는 몸을 뒤틀며 안간힘을 써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개미들은 합심하여 벌레를 공격했습니다. 어떤 개미는 벌레의 목을 물고, 어떤 개미는 다리를 물고, 어떤 개미는 몸통을 물고, 또 어떤 개미는 벌레의 눈을 물었습니다. 한번 물면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통보다 몇 배나 큰 벌레지만 여러 마리의 개미들이 한꺼번에 덤비니 나중에는 결국 힘을 잃고 움직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벌레를 힘을 합쳐 개미집 안으로 끌어가려 합동작전을 폈습니다. 그 싸움은 30분 이상 걸렸습니다. 한 참을 쪼그리고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나중에는 발이 저려 일어나지를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참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큰 벌레와 개미와의 싸움은 결국 개미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의 시민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개미처럼 협력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은 마귀와의 영적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마귀의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에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거짓말을 진실로 가장하여 이야기 합니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가 어려우므로 협력해서 싸워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필요하고 합심기도가 필요합니다. 개인의 문제이지만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도움을 청하여 합심해서 싸워야 합니다.
개미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지만 협력해서 싸울 때 큰 벌레를 이겼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싸움도 협력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미들이 협력하지 않고 자기의 힘만을 믿는다든지 혹은 자기 혼자 공을 세우겠다고 한다든지 혹은 자기 역할을 무시하고 자기고집만 내세우면 그 싸움에서 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허물고자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인데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등지도록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지금 교회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나뉘어 있는데 예배를 방해하고 교회를 분열시켜 믿음의 상처를 주고자하는 사람들 뒤에서 마귀가 조종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를 물리치면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바르게 회복될 줄 믿습니다.
어떻게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협력해야 합니다. 개미들과 같이 힘이 없는 우리들이지만 힘을 합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먹으로 싸우고 감정으로 싸우면 패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싸워야 합니다. 비폭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싸울 때 주먹으로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는 현장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져서 떨어뜨렸을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검으로 대적하면 검으로 망할 수 있습니다.
힘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기도하며 이겨야합니다. 비폭력으로 이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협력하여 검을 대적할 때 검을 가지는 자는 가 검으로 망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반드시 응답되리라 믿습니다.
2. 마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28).
28절,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이 말씀의 요점은 대적들의 도전에 넘어가지 않도록 마음을 견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즉 복음에 대한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정당하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인도자이심을 알고 복음을 훼방하는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적하는 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바울을 대적했던 사람들 즉 이방인들로 추정하기도 하고 빌립보 교회 내에 침입한 유대 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꾸 그 사람이 무서워 질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그를 피하거나 타협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핍박하는 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핍박할 만한 힘이나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없는 사람은 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가장 두려운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를 파리, 개구리, 이 등으로 굴복시키시고 애굽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켰듯이 그들을 굴복시키실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친구요 가족이라 해도 지금은 사탄의 졸개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을 사용하고 있는 사탄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의 원수도 갚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견고히 서있으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리라 믿습니다.
3.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29절).
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자체가 은혜입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15:9-10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믿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을 위해 수고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까? 저녁마다 교회를 지키느라 수고하고 계십니까? 이웃돕기 나눔잔치를 위해 수고하십니까? 봉사의 자리에서 수고하고 계십니까? 남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다고 때로는 푸념도 나옵니까?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면서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수고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야속한 생각도 듭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하면 은혜가 떨어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고난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은혜이고 기쁨과 승리가 은혜인 줄은 알겠는데 고난이 은혜라니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고난을 회피하기보다 인내로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고난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주님과 연합하여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또한 주와 연합하여 그의 영광에도 참여할 것을 의미합니다. 롬 8: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기에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면 일심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통하여 천국시민으로 바르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