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예수님의 마음

하마사 2019. 12. 22. 07:45

본문: 2:5-11

제목: 예수님의 마음

찬송: 112

목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한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앞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어떤 마음으로 사셨는지를 알아야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전제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부모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모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마음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은 목회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목자목녀의 마음이 있습니다. 목자목녀가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만 품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1. 겸손의 마음입니다.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버리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신분과 격이 다른 모습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런 만남이 서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도 목사님들끼리 모이면 편합니다. 흉허물이 있어도 덮어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과 함께 있으면 목회자로서 흠이 잡힐까 신경이 쓰입니다. 저는 가정교회를 하면서 많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과 허물을 오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추거나 가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낮아지셔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편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한계를 가진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불편하고 견딜 수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영광만 받으시던 분이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도 받았습니다. 고난을 받지 않던 분이 십자가의 고통도 받아야 했습니다. 홍보영상을 찍듯이 잠시 동안 시늉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생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인데, 그것도 가장 천한 장소인 짐승의 똥 냄새가 나는 곳에 태어나시고 짐승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호화로운 왕궁이 아닌 서민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산과 들에서 잠을 주무셨습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하여 배 갑판 위에서 졸기도 하시던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미워하며 상종하기를 꺼렸던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그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란 곳에서 당시에 유대인들이 상종도 않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물 한 모금을 달라고 하면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처할 집이 없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는 멸시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지체부자유자들, 병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주로 어울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낮은 사람보다는 높은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학력이나 경제적 수준이 비슷하거나 높은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명예가 높거나 지명도가 있는 사람과 친구이거나 지인인 것을 자랑합니다.

지난 번 온가족 한마음축제 때 특송을 했던 롯데월드 입사동기들 중에 한 명이 몇 일전에 대표이사로 승진했습니다. 롯데월드 사장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사장이 되었는데 내 신분이 높아진 듯 했습니다. 그런 친구를 알고 있는 것이 내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롯데월드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왕들과 어울려도 급이 맞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과 어울렸습니까? 겸손함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서민적인 생활을 불평하거나 바꾸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위해 이적을 행했지만 자기의 영광과 안일을 위해서는 결코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이 겪는 고통을 몸소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태어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하실 분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여인들을 몰고 다니면서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생활을 하였으니 자기들이 바라던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오신다면 우리가 과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흉악한 죄수가 죽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당장 목장식구들을 품으려면 이런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장식구들은 다양합니다. 수준이 비슷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만 어울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운동할 때도 수준이 비슷한 사람이나 고수들과 운동하려 합니다. 초보자들과는 운동하기 싫어합니다. 재미가 없고 운동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탁구나 배드민턴, 테니스 등을 할 때 실력이 비슷하거나 잘 하는 사람과 시합할 때 재미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는 것이 겸손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예화)알렉산더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취중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친구이자 심복을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자신에게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마음속에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술김에 무기를 휘두른 것입니다. 술이 깨고 난 뒤 그는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천하는 정복했을지라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교만하여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을 해주는 충신의 말을 겸손하게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 겸손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더대왕처럼 분노하셨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여행을 갈 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가면 즐겁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가면 불편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여행 온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편하게 함께 여행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물리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면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겸손한 마음을 품으셨기에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품을 때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세겹줄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겸손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품을 때 세겹줄 기도짝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실천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2. 순종의 마음입니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상명하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윗사람의 말에 아랫사람이 그대로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군대는 상명하복이 있어야 합니다. 명령에 불복하면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지휘관이 돌격 앞으로하는데 아무도 돌격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하나마나 패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적하고 마귀에서 복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복종하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아내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요즘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함부로 야단도 못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순종은커녕 덤벼들고 오히려 선생님을 때린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물론 몇몇 학생이 그렇겠습니다만 순종의 미덕이 점점 사라지는 슬픈 현실입니다. 선생님의 권위, 웃어른의 권위, 부모님의 권위가 무너지니 순종이 사라집니다.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한번 순종하고 다음에 순종하지 않으면 온전한 순종이 될 수 없습니다. 아람군대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끝까지 순종하여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을 때 비로소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6일을 돌고 7일째 되는 날 일곱 바퀴를 돌고 마지막으로 함성을 질렀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로 이적을 행하셨던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실 때 하인들이 순종하여 물을 채웠고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실 때 갖다 주자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순종해야 온전한 순종이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것을 거부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기를 거부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전하는 사도의 사명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연결고리가 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불순종했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의 순종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복종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순종하되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순종의 마음을 주심가족 모두가 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예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내가 누구에게 머리를 숙일 것인가의 문제 입니다.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세상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순종이란 라는 이유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주지 않으셨고,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화를 내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연말에 세겹줄 기도회를 통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하지만 7일 동안 집중하여 세 명이 기도짝을 만들어 서로 기도하려 합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종의 훈련을 시켰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가나안땅은 순종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름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구름이 성막위에 떠오를 때는 짐을 꾸려 구름을 따라갔고, 구름이 멈추면 그곳에 짐을 풀고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 음성에 순종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도 순종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듯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3. 사랑의 마음입니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대신 죽어주신 사랑의 징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해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주어진 것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53:5-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의미를 가장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예언대로 로마 병정들의 창과 가시관과 못에 찔려 몸과 마음이 상했습니다.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희생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성애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자기의 생명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위대합니다. 어머니는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다른 자식을 그처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태어났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병에 걸리면 살기 위해 병원에 갑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운동을 하고 건강식품을 먹습니다. 살기 위해 일을 합니다. 살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사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죽기 위해 사역하셨고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골고다 언덕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죽으셨습니다.

왜 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최고의 사랑이 희생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버리는 사랑이 숭고한 사랑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십자가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소금이 녹아지지 않고는 맛을 낼 수 없습니다. 김치를 절일 때 보면 소금을 배추 위에 듬뿍 뿌립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보면 그 하얀 소금이 녹아서 김치 속에 스며듭니다. 소금의 모양은 찾아볼 수 없지만 배추 맛을 보면 그 속에서 소금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졌지만 어딘가에서 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빛을 발합니다. 촛불은 자기 몸을 태우면서 빛을 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이라 네 개의 초가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래 탄 양초는 작아졌습니다. 형광등도 발전소에서 기름이나 물, 석탄이나 우라늄이 희생을 통하여 빛을 내게 됩니다. 희생이 없으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희생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희생하기를 싫어하는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랑으로 희생하지 않는 기독교는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종교가 되고, 희생하지 않는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합니다. 사랑에 바탕을 둔 희생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교회가 이 힘을 키우지 않으면 예수님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희생되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세겹줄 기도회 짝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마음을 품고 짝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땀이 많은 것이 불편하지만 때로는 덕을 볼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다 땀을 흘리면 간절하게 진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에 학사장교 기독신우회가 모였습니다. 학사장교 출신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모임입니다. 제가 기도회를 인도했는데 땀이 흘러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기도했더니 그 장면이 은혜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손을 잡고 기도할 때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기 살기로 일만하는 사람입니다. 저희 고향마을 이웃집에 그런 분이 있습니다. 평생을 논 사는 일에 올인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소처럼 일했습니다. 옷을 차려입고 나가는 것을 못 보았을 정도입니다. 젊을 때부터 80세가 넘을 때까지 일만 하셨습니다. 아들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도 결혼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었습니다. 많은 논을 소유한 부자입니다. 한데, 아들이 술을 먹고 트랙터를 운전하다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평생 모았던 재산을 쓸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젊음과 건강이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소처럼 일하다가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시간이 가치 있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물질도 가치가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버릴 수 있는 사랑이 가장 고귀한 사랑입니다.

아직도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함부로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생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여 주어진 생명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생명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귀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여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10:10-11)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것일수록 아름답게 보입니다. 몸에 좋은 송이버섯은 볼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독버섯은 얼마나 예쁩니까. 우리를 죄로 유혹하는 마귀 역시 흉악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마귀는 빛의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감춥니다(고후 11:14).

마귀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통해 역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도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 하나를 불어 넣음으로써 마귀의 역사는 시작됐습니다(13:2).

가장 치열한 전쟁터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아름답던 에덴동산이 인간의 죄로 망가졌습니다. 하와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죄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평생 시달린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니라 다윗을 시기한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귀의 공격을 이기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우며 겸손하게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 잘 난 멋에 살기에 순종하고 복종하기 어렵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환경이 있기에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귀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십니다.

 

내일부터 세겹줄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합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참여합시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석합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연말을 기도하며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도하며 준비하는 복된 세겹줄 기도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겹줄 기도회를 통해 우리의 기도제목들이 응답되고 간증이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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