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극장 대표이면서 1960~70년대 은막 스타인 고은아(71·예능교회) 권사는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회장 유원식)에서 요청하면 달라진다. 그는 기아대책이 설립한 사회적 기업 행복한나눔의 이사장이다. 나눔가게(재활용매장) 운영, 공정무역·착한상품 유통 및 판매, 공익캠페인 등을 통해 국내외 소외이웃의 자립을 돕고 있다. 서울 종로구의 서울극장 대표 회의실에서 최근 만난 고 권사는 “오늘 인터뷰를 한다고 했더니 아들이 웬일인가 하더라. ‘기아대책 일이야’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며 웃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배우의 길
1남5녀의 막내딸, 연기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홍익대 미대 재학시절 타고난 미모로 타 대학에까지 소문이 났고, 영화 ‘난의 비가’ 제작자의 눈에 띄어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여배우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때 고 하용조 목사가 인도하는 연예인 성경공부 모임에 우연히 참석했다. ‘연예인들이 왜 성경공부를 하지’라며 모임에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점차 성경공부에 빠져들었다.
“연예인들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오늘은 뭐했어요. 내일은 뭐하니까 도와주세요’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를 하더라고요. 성경말씀이나 교회 용어들을 인용해가며 거창하게 기도하는 제 모습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위선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알게 됐죠.”
그 무렵 어머니를 따라 기도원이란 곳에 처음 갔다.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한얼산기도원이었다. 당시 원장이었던 고 이천석 목사가 성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일일이 안수기도를 해줬다. 그 역시 기도를 받았다.
“목사님이 제 머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엄청난 지남철이 와서 딱 붙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날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기도를 하기 시작했지요. 제가 기도할 때마다 얼마나 크고 세게 했던지 ‘드라마 여주인공이 쇳소리를 낸다’며 방송국에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니까요(웃음).”
‘거룩한 부담’에서 시작된 나눔
1979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에서 고 권사는 이전의 삶을 회개하고 새해를 맞으며 결단의 기도를 드렸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미련 없이 활동을 접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1980년 9월부터 15년 동안 기독교방송(CBS) 라디오 간증 프로그램인 ‘새롭게 하소서’ 진행자로 매일 웃고 울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한 번 트시고 두 번 트시고 확 트시는 걸 보면서 저는 계획이란 걸 세우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의 계획이라는 게 내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우는 것이더라고요.”
배우가 되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 일을 하겠다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 간증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선 일 등 그가 계획한 건 하나도 없었다. 기아대책과의 만남도 그랬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기아대책 전 회장 정정섭 장로가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했을 때 처음 단체에 대해 알게 됐다. 어느 날 정 장로가 전화를 해선 뜬금없이 재활용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웃으며 사양하는 그에게 정 장로는 기도해보고 결정할 것을 권했다. ‘누가 네 것을 달라고 했느냐. 네게 뭘 하라고 했느냐. 그냥 안 쓰는 물건 좀 나눠쓰자는 건데 그렇게 어렵니’라는 거룩한 부담이 생겼다. 2003년부터 행복한나눔을 맡아 지금까지 섬기고 있는 이유다.
나눔은 곧 선물이다
고 권사는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모른다”며 “선물로 받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라고 소개했다. 그에게 기아대책은 선물인 셈이다. 그 ‘덕분’에 60세에 처음 긴급구호 현장에도 갔다. 2006년 1월 파키스탄 발라코트 지역 비시안 텐트촌에서 지진으로 헐벗고 굶주린 이재민들에게 무료급식을 지원했다. 이후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낯선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이어갔다. 그렇게 세상에 나눔의 기쁨을 전했다.
“오래전 방송에서 한 기업체 경영인의 부인인 권사님을 초대한 적이 있어요. 이분이 방송을 마친 뒤 스태프들에게 자장면이라도 드시라며 낡은 봉투에서 돈을 꺼내주는 겁니다. 권사님은 삼시세끼 중 한 끼만이라도 예수님께 대접하는 마음으로 자장면 값을 떼어 낡은 봉투에 넣어 모으신답니다. 이분처럼 우리도 한 달에 1000~2000원을 여러 사람들이 내어 모으면 3만원이 되고 그럼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도울 수 있어요. 매일 예수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작게, 쉽게 나눴으면 합니다.”
2013년 11월 고 권사는 영화제작자이이면서 반평생을 살아온 남편 곽정환 장로와 사별했다. 46년에서 2주 부족한 시간을 부부로 지냈다. “지금 사별이나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가지세요. 슬프면 슬퍼하고 마음껏 울면서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스스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보낸 고 권사는 요즘 첼로를 배우고 있다. ‘끽끽’ 대는 소리조차 아름답다며 10년 후 리사이틀을 열 계획이라고 약속했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국민일보, 20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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