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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산골 대안학교 '생명의 강' 만든 벤 토레이

하마사 2016. 12. 27. 10:02

[전현석 기자의 觸(촉)] 태백 산골 대안학교 '생명의 강' 만든 벤 토레이

3代째 한국 사랑
장로교 목사 할아버지 6·25 이후 의수 만들고
성공회 신부 아버지는 산 속에 처음 수도원 지어

통일을 믿습니다
우린 아직 준비가 덜 돼 있죠 하나의 마음이 될 준비요…
탈북 학생들이 그러더군요 북한에 대해 안 캐물어 고맙다고

올해 65세인 벤 토레이 신부는 직접 손도끼를 들고 땔감 장작을 팬다. 1965년 아버지와 함께 예수원을 지을 때도 그랬다. 토레이 신부는 “인적 없는 산골짜기에 벽돌과 나무 하나씩 쌓아 올려 이곳을 지은 것처럼 남북한이 차근차근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올해 65세인 벤 토레이 신부는 직접 손도끼를 들고 땔감 장작을 팬다. 1965년 아버지와 함께 예수원을 지을 때도 그랬다. 토레이 신부는 “인적 없는 산골짜기에 벽돌과 나무 하나씩 쌓아 올려 이곳을 지은 것처럼 남북한이 차근차근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태백=김지호 기자

서울에서 강원 태백까지 기차로 4시간, 태백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태백시 하사미동에 도착했다. 주변에 농가 서너 채만 보이는 인적 드문 이곳에 단층짜리 학교가 덩그러니 서 있다. 운동장까지 합쳐서 축구장 절반만 하다. '생명의 강' 대안학교다. 원래 한 초등학교 분교였으나 학생 수가 적어지자 문을 닫았었다. 2009년 푸른 눈의 한 신부가 "이곳에서 통일 세대를 키우겠다"고 나타났고 그 이듬해 개교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갖췄다. 벤 토레이(66·한국명 대영복) 신부였다. 미국 신부가 학교까지 지어가며 남북통일을 대비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21일 만난 그에게 "남북통일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토레이 신부는 우리말로 또박또박 "믿습니다"고 했다. "통일은 언제든 분명히 올 겁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진정한 통일은 어렵습니다. 사람의 통일, 마음의 통일이 그것입니다. 남북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건 기적일 겁니다. 그 기적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북통일 믿는 푸른 눈 신부

―왜 마음의 통일이 힘든가요.

"서로 협력할 준비가 안 돼 있으니까요. 한국 사회가 그렇고, 한국 교육이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 교육은 경쟁에만 집중해요. 자신과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몰라요. 생명의 강 학교에선 통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진 못해요. 아직 돈이 없어요. 하지만 통일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가르쳐요. 그게 뭐냐 하면 서로 협력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요.

"이번에 우리 고등학교 졸업생 7명 중 1명에게 자폐증이 있어요. 처음에 입학했을 때는 대화하는 법을 모르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법도 몰랐어요. 하지만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자폐 학생과 함께 어울리고 공부했어요. 그 학생이 사회성이 많아지고 좋아졌는데 나머지 학생들도 성장했어요. 앞으로 이 학생들은 사회 나가서 다른 사람과도 잘 협력해서 일할 겁니다. 최근에 탈북 학생 8명이 우리 학교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학교 교사가 너무 기뻐했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다른 학교 학생들처럼 처음부터 북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따뜻하게 환영해줘서'라고 해요."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죠.

"일주일에 한 번이요. 목장 가서 청소하고, 농가 일을 도와요. 노동이 아주 중요해요.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요. 노동을 통해서 협력하는 걸 배워요. 위험한 일을 할 때는 다른 사람 다치지 않을지 살펴야 해요. 책임감도 키워요. '이 나무를 톱으로 잘랐다'면서 자신감도 생겨요. 교실에선 이런 걸 얻을 수 없지요."

생명의 강 학교에선 다른 학교 학생들을 위해 여름에 4박5일 일정으로 노동학교도 운영한다. 학생들은 이 기간 동안 휴대전화를 학교에 맡겨야 한다. "첫째 날엔 아주 힘들어요. 학생들이 적응 못 해요. 이틀째도 어려워요. 그런데 사흘 되면 학생들이 휴대전화 생각을 안 해요. 친구들하고 일하면서 노는 게 재밌어져요. 휴대전화 있으면 환경에 집중 못 해요. 고개 숙여 휴대전화만 봤다가 고개 들어 하늘을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고,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에 집중해요. 마지막 날 다시 휴대전화 나눠주면 다시 카카오톡 보내느라 바쁘지만요(웃음). 그 며칠 동안 정신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낀 걸로 된 거예요."

벤 토레이(오른쪽) 신부와 그의 아버지 대천덕 신부가 1978년 예수원에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고 있다.
벤 토레이(오른쪽) 신부와 그의 아버지 대천덕 신부가 1978년 예수원에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고 있다. /벤 토레이

3代에 걸친 한국 인연

생명의 강 학교에서 20분쯤 산속으로 들어가면 개신교 수도 공동체 '예수원'이 나온다. 벤 신부의 아버지인 고(故) 루벤 아처 토레이 성공회 신부가 1965년 세웠다. '대천덕(戴天德) 신부'라는 한국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예수원에서 지내며 "돈을 사랑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청빈과 나눔으로 평생을 보내 '살아 있는 성자(聖者)'로 불렸다.

스위스 농가 건물을 연상시키는 예수원 본관 건물 안에 토레이 신부 숙소가 있었다. 그는 직접 도끼로 장작을 패 보였다. "제 벽난로에 들어갈 거니까 제가 직접 합니다. 열다섯 살 예수원 지을 때부터 도끼질을 했어요."

토레이 신부는 일곱 살 때인 1957년 아버지 대천덕 신부와 어머니 제인 토레이(한국명 현재인)씨를 따라 한국에 왔다. 할아버지·할머니는 당시 대전에서 의수·의족을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였어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해서 중국어를 잘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미군 통역 장교로 복무하다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잃으셨어요. 6·25전쟁 후 한국에서 팔·다리 잃은 사람이 많아서 의수·의족과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했죠.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 뜻에 따라 한국에 왔고요."

―당시 한국은 미국보다 많이 낙후됐었죠. 불편하진 않았나요.

"전혀요. 저는 모험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불편한 점 있었어요.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와서 머리하고 얼굴을 막 만졌어요. 파란 눈, 금발머리 외국 아이를 보기 힘들었으니까요."

―어머니 자서전(산골짜기 가족 스케치)을 보면 부자지간이 각별했다더군요.

“아버지하고 대화를 많이 했어요. 제가 10대 초반에 아버지는 서울 오류동 성미카엘신학원(성공회대의 전신) 원장이었어요. 그때 신학원에 도둑이 많이 들어서 돌아가면서 밤에 경비를 섰는데, 아버지하고 저하고 금요일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했어요. 그것도 아주 큰 모험이었어요. 경비 돌면서 얘기하고 더 궁금한 건 백과사전을 찾아봤어요. 차(茶) 기르는 것부터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요. 아들한테 제일 좋은 선생님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은 수도원

대천덕 신부는 1964년 예수원 설립 장소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이곳까지 왔다. 지금도 휴대전화가 잘 안 터지는 지역이지만, 그때는 서울에서 기차 타고 8시간, 버스로 갈아 타고 1시간30분을 달려야 올 수 있었던 곳이었다. 길도 잘 닦여 있지 않아 홍수가 나거나 폭설이 내리면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3시간을 걸어와야 했다. 토레이 신부는 서울에서 외국인 학교에 다니다 15세 때였던 1965년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고, 4년 동안 예수원 건물을 함께 지었다. 첫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7개월 동안은 군용 텐트에서 10명의 노동자·농부들과 지냈다. 열다섯 살의 토레이는 이들과 함께 땅을 고르고 산에 길을 내고 장작을 패고 음식을 만들었다. 겨울에는 개울가 얼음을 깨서 목욕과 빨래를 했다.

―고생 많이 했겠어요.

“아니요. 저는 즐거웠어요. 매순간이 도전이고 어드벤처였어요. 예수원에 말 한 마리가 있었어요. 마차에 물건 싣고 오다가 말이 너무 힘들어해서 여기까지 못 오고 마차 밑에서 잔 적 있어요. 서울 갔을 때 친구들한테 자랑했어요.”

벤 토레이 신부가 ‘생명의 강’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벤 토레이 신부가 ‘생명의 강’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벤 토레이

―정말 추웠을 텐데요. 전기도 수도도 없었고요.

“옷 많이 입으면 됐어요. 큰 문제 되지 않았어요. 제가 보이스카우트였는데, 물 쓰려고 아버지하고 펌프를 설치했어요. 전기 없었지만 광부들 쓰는 카바이트등과 양초를 직접 만들었어요.”

―1960년대만 해도 이 지역에 북한 무장공비가 나타나서 주민들을 죽이기도 했어요. 겁나지 않았나요.

“그래서 한 달 동안 한국군 100명이 여기 머물기도 했지만 겁은 안 났어요.”

―영양실조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면서요.

“처음에 음식이 없었으니까요. 국수와 수제비를 많이 먹었어요. 저는 제 인생을 살아나갈 힘을 이곳에서 얻었어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뚱뚱하고 힘이 없었는데, 4년 후엔 몸과 마음이 튼튼해졌어요.”

북한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

토레이 신부는 대학 진학을 위해 196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명문으로 꼽히는 뉴욕의 사라 로렌스 컬리지를 나왔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돼 미국 에트나보험회사, 앤더슨 컨설팅회사 등에서 일했다. 방학이나 휴가 때면 부모가 있는 한국을 찾았다.

부친 대천덕 신부는 2002년 8월 뇌출혈로 한국에서 별세했다. 예수원 근처에 49만5000㎡(약 15만평) 목장 땅을 정부로부터 빌려 청소년 수련단지를 만들겠다는 ‘삼수령’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삼수령은 지역에 있는 언덕 중 하나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 남쪽으로 가는 낙동강, 동쪽으로 향하는 오십천(五十川)이 만나는 삼수점에서 유래했다. 사람들은 대천덕 신부의 장남인 토레이 신부가 아버지 뒤를 이어 예수원과 삼수령 사업을 맡을 것이라 생각했다. 토레이 신부는 “처음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야 한다고 압박이 심했겠군요.

“네. 많은 분이 제 손을 잡으면서 그래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때는 그걸 거절했습니까.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미국 한 대안학교 학장으로 있었어요. 또 아내와 함께 미혼모를 위한 쉼터를 운영했어요. 그 일도 중요했어요.”

―그런데도 한국에 온 계기가 있었겠군요.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미국 대안학교로 돌아갔어요. 전쟁 중인 코트디부아르에서 선교 활동을 하신 목사님 얘기를 학생들과 듣는데, 갑자기 북한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라디오를 듣다가도 또 울었어요. 사나흘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됐어요. 아버지께서 북한과 통일에 관심이 많으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저는 별로였는데. 이건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한테 얘기했더니 ‘그런 말 할 줄 알았다’면서 승낙했어요.” 그의 아내 리즈(62)씨는 현재 생명의 강 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1966년 가방을 메고 예수원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토레이 신부. 어린아이는 여동생 옌시이며 뒤따르는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다(왼쪽). 예수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아버지 대천덕 신부와 여동생 옌시, 토레이 신부와 아들 루벤을 안은 부인 리즈, 여동생 드버니아, 어머니 제인.
1966년 가방을 메고 예수원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토레이 신부. 어린아이는 여동생 옌시이며 뒤따르는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다(왼쪽). 예수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아버지 대천덕 신부와 여동생 옌시, 토레이 신부와 아들 루벤을 안은 부인 리즈, 여동생 드버니아, 어머니 제인. /벤 토레이

토레이 신부는 2005년 한국으로 와서 ‘네 번째 강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서쪽 한강, 남쪽 낙동강, 동쪽 오십천에 이어 북쪽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통일의 기운을 흘려보내겠다는 것이다. 현재 내년 여름 준공을 목표로 목장 한쪽에 생명의 강 학교와 교사·학생을 위한 기숙사 건물을 짓고 있다. 앞으로 통일 수련단지도 만들 계획이다.

토레이 신부는 “물론 돈 때문에 힘들지만, 돈이 필요하다고 기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통일을 위해서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남북한 사람들도 하나가 될 겁니다. 물론 이게 하늘에서 금 떨어지는 것보다 어려울 수도 있지요(웃음).”

예수원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파티

2012년 4월엔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현재 토레이 가문에서 예수원을 지키는 사람은 토레이 신부와 그 여동생 옌시(53)씨다. 옌시씨는 대천덕 신부 별세 직후 미국서 이곳으로 건너왔다. 현재 예수원에는 3개월에서 1년 동안 또는 이곳을 집으로 여기고 사는 60여명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전직 신부에서 무직자 등 다양한 이력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산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2박3일 일정으로 예약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머물다 간다. 휴대전화를 맡긴 뒤 하루 세 번 이상 침묵하고, 함께 일하고 밥 먹고,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 이렇게 예수원을 찾는 사람이 매년 5000~1만명이다. 숙박비는 받지 않는다. 십자가 목걸이 등을 만들어 판 수익으로 운영하고 나머지는 전액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다.

―돈 문제로 힘들겠어요.

“재정 자립도는 절반 정도입니다. 저희는 모금 활동을 하지 않아요. 필요한 게 있다고 사람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보내줍니다. 믿음 재정이라고 합니다.”

―그럼 언제 힘이 드나요.

“열여섯 살 때 폭력배 2명이 예수원에 들어온 적 있는데 칼과 돌을 들고 싸운 적이 있어요. 지금은 일정 시간 동안 수련 과정을 거친 뒤 식구들끼리 투표해서 새 식구를 맞이하니까 그런 사람 없어요. 하지만 식구들 관계가 여전히 어려워요.”

―사람들의 재산, 학력, 직업 차이 같은 것 때문일까요.

“아니요. 그냥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이웃이 아니라 식구니까요. 이웃이 싫어지면 안 보면 됩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식구는 그렇게 못 해요. 서로 사이가 나빠져서 살다 나가는 식구도 있고, 다시 들어오는 식구도 있어요. 문제 생기고 싸울 때도 있어요. 우리는 대단하지 않고 그렇게 거룩하지 않아요.”

토레이 신부는 잠시 말을 거두었다. “그래도 이곳에선 항상 기적이 일어나요. 식구들끼리 이런 문제가 생겨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아요. 또 다른 하나는 1965년 세운 예수원이 51년째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원에는 설립 때부터 이어져 오는 크리스마스 전통이 있다. 양말에 선물을 가득 담아 이날 예수원에 있는 식구와 손님 모두에게 주는 것이다. 많을 때는 150여개를 준비한 적도 있다고 한다. 토레이 신부 여동생 옌시씨는 “원래 어머니 혼자 그 일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는 예수원 식구들이 함께 준비한다”고 했다. 양말에 들어가는 선물은 땅콩, 오징어, 사탕, 초콜릿, 장갑, 목도리, 모자, 귀마개 등이다. 토레이 신부는 “크리스마스의 기쁨은 우리 식구들이 모두 모여 양말 한 켤레씩 챙기는 겁니다. 그거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충분합니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3/2016122301677.html


-조선일보, 2016/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