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

하마사 2017. 2. 10. 16:31

본문: 요 9:1~11

제목: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

찬송: 366장

목표: 모두에게 예수님은 필요한 분임을 알게 한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명을 주어 보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식수원입니다. 구약시대 히스기야 왕 때에 성 밖의 기혼 샘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는 지하 수로를 건설하여 이루어진 못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가 쳐들어 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을 치를 때 식수가 부족하지 않도록 성 밖의 수원지에서 성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저장한 것이 실로암 못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연못의 이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위하여 친절하게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단순한 해설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암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이 실로암 연못을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영적인 맹인의 눈을 밝히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려 했습니다.

실로암 못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곳입니다. 맹인의 인생을 새롭게 거듭나게 한 곳입니다. 이런 실로암 못이 맹인에게 필요했듯이 모든 사람에게도 필요한 못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 맹인(1절)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 것이 중요합니다. 길 가시다가 많은 사람과 많은 것들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신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주목하여 보신 것이 은혜였습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 병든 사람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하고 소외된 사람, 예수님의 터치가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눈길을 돌려보시고 관심을 가져주십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란 표현은 요한복음 5장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술과 능력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의 병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일을 포기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살았고 오늘도 그대로 살고 내일도 맹인으로 살아야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새해가 되어도 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작년이나 올해, 그리고 내년이 되어도 좋아질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인정하고 가족과 주변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그를 향하자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제자들조차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맹인이 된 이유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맹인이 모태에서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부모의 죄가 상속되어 맹인이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을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의 죄를 상속한다는 주장도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에게 물으시고 그것이 반드시 인간의 재해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죄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혹시 전에 지은 죄로 인해 이런 고난이 주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과 통화하면서 그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고 동생마저 사고를 당해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렸습니다. 그 때 위로전화를 했더니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때문이라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했던 말이 바로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이 닥쳤다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물론 고난과 고통이 죄로 인해 주어지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적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그러자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알게 하실 목적이었다고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자 중풍병자가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중풍병자가 병을 앓았던 원인이 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죄가 원인이 되어 질병과 고통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병이나 고통이 모두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도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맹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결부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온통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원인과 배경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전혀 유익이 없는 호기심 만족차원이었고 과거 지향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의 존재목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 태어나 가족들에게 짐이 되어 살다가 죽는 인생이 아님을 깨우쳐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존재목적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단순한 치유차원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계시 차원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왜 맹인이 되어 태어났는가에 대한 관심보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관점이었습니다. 맹인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지금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맹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비교할 때 맹인으로 태어나 평생 불편을 감수하며 고난 중에 살아온 것이 이때를 위함이라고 하면 불공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을 빗든지 토기장이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릇이라도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것이 분명하고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도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믿으며 이겨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가 로마서 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지금은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하게 만들어 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왜 살아야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나게 한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역이었습니다. 내일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날 그의 존재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맹인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도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다른 이적에서는 현장에서 즉시 이적을 베푸신 반면 여기서는 굳이 맹인을 실로암 못까지 보내어 씻게 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이란 이름 뜻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부각시키실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못의 상징적 의미를 통하여 영적인 맹인이 되어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영안을 뜨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으신 분임을 부각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요한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이며 동시에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시는 실로암 연못이라는 사실을 알리려 실로암이란 뜻의 “아펠스탈메노스”란 단어를 특별히 대문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한 맹인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명령에 충실히 순종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리적 배경으로 다른 모든 곳은 생략하고 유독 실로암만을 부각시킨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신 예수님의 사명과 더불어 이제 다시금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맹인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변했습니다. 먼저 외모가 달라졌습니다. 눈을 감았던 사람이 눈을 떴으니 몰라보았습니다. 사람의 외모 중에 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합니다. 눈이 예쁘면 다른 부분이 모자라도 커버가 됩니다. 반대로 다른 부분은 예뻐도 눈이 예쁘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미모를 반감시킵니다. 또한 눈이 반짝이면 똑똑하고 눈이 흐리면 멍청하다고 할 정도로 눈은 총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흐리멍덩한 눈을 동태눈 같다는 말을 합니다. 아무튼 맹인은 눈을 떴으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력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떴습니다. 이후에 바리새인들이 맹인을 찾아와 예수님이 안식일에 눈뜨게 한 것을 문제 삼아 죄를 물으려했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으로 인해 출교까지 당했습니다.

맹인에게 실로암 못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한 장소일 뿐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뜬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게 한 곳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맹인이었다가 실로암 못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영안이 열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영안이 열려 세상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실로암 못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 영안을 떠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아직도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맹인입니다.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2. 걸인(8절)

(요 9: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앉아서 구걸했다’는 것은 같은 장소에 계속 앉아 있어서 사람들에게 그 얼굴이 잘 알려진 상태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일정한 장소에 주저앉아서 그 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구걸하여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맹인이나 앉은뱅이처럼 지체장애인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만났던 소경 바디매오가 그랬고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고침을 받은 성전 미문의 한 앉은뱅이 걸인 또한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목숨을 연명하던 사람이 눈을 뜨고 새 사람이 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구걸하던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감았던 눈이 떠졌을 뿐 아니라 얼굴모습과 표정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변화되었습니다. 구걸하던 사람이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일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걸하던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살던 사람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구걸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무언가를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구걸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어떤 면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좋은 의미로 목표지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구걸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온통 신경이 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추구합니다. 성공을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구걸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을, 어떤 사람은 권력을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사울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권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죄 없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권력추구형 인간이었습니다. 권력을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헤롯왕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수많은 어린이를 죽였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도 서슴지 않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권력유지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공포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물질지향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돈이면 다 된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서 살인을 합니다. 심지어 부모와 가족까지 살해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화)엘도라도

미국의 골드러시가 시작되기 전, 온 유럽은 ‘엘도라도’의 열병으로 홍역을 치렀습니다. 스페인어 ‘엘도라도’는 ‘황금가루를 칠한 사람’이란 뜻으로 콜롬비아 인디언 마을의 전설적인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축제 때가 되면 온 몸에 황금 가루를 칠한 채 축제를 주관했고, 축제가 끝난 뒤에는 호수에 들어가서 황금 가루를 씻었습니다. 그때를 맞춰 신하들은 온갖 보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호수 속으로 던졌습니다. 그래서 그 호수의 바닥에는 온통 황금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유럽으로 전해진 뒤, 엘도라도는 황금 마을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유럽인들이 엘도라도를 찾아 남아메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의 행렬은 미국의 골드러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어졌지만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엘도라도를 발견하지 못한 채, 시간과 물질만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저마다의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인생을 낭비해 왔습니다. 오늘날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도 전 세계는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돈이 인간의 최고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엘도라도를 찾는 일에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돈에 구걸하고 살아갑니다.

 

(예화)최모 할머니

2012년 4월 24일 일간지에 실린 기사내용입니다. 2012년 4월 20일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70대 최모 할머니가 부산에 있는 동부경찰서 민원실로 찾아와 “평생 모은 내 돈 찾아 주이소!”라고 부탁했습니다. 최씨는 “아들이 폐지 더미로 착각해 1억 가까운 돈뭉치를 고물상에 팔아넘겼다”고 말했습니다. 최씨 옆에는 아들(52)이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최씨는 폐지를 모아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돈을 모았습니다. 평소 돈은 자신이 관리해야 안심이 됐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예금 대신 지폐 뭉치를 수표로 바꿔 집에 쌓아둔 폐지 상자 하나를 골라 넣어두었습니다. 최씨는 이런 사실을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아들은 수표가 든 상자를 포함한 폐지 더미를 전날 고물상에게 3만4450원에 팔아 버렸습니다.

경찰관 5명은 최 할머니와 함께 고물상으로 가서 돈 봉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에 널브러진 500㎏가량의 폐지 더미를 40여분간 맨손으로 더듬어 찾은 끝에 한 경찰관이 3,000만원권 2장을 포함한 자기앞수표 22장 전액(7,800만원)을 찾아 할머니에게 전달했습니다. 평생 돈 모으는 재미에 살았던 할머니의 일화입니다.

성공을 구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예화)‘부유한 노예’의 책 저자, 라이시 장관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아빠에게 자다 말고 뛰어온 막내가 말했습니다.“아빠, 저녁에 아무리 늦게 오셔도 나를 깨워줘요. 아빠한테 꼭 할 말이 있거든요.” 그 순간 아빠는 지난 몇 달 동안 너무 바빠서 막내와 단 한마디도 나눌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깊이 고민한 끝에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책을 씁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정권 인수팀에서 경제정책을 담당했고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의 얘기입니다. 한국에서는 ‘부유한 노예’로 번역된 그의 책, ‘성공의 미래(The future of Success)’는 아무리 성공과 권력이 좋아도 사랑하는 막내와 대화할 수 없다면 성공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벌고 권력을 쥐며 성공하려고 애씁니다. 이유는 단 하나,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가정의 행복과 사회의 질서, 균형은 깨집니다. 오히려 행복을 대가로 지불해 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성공할까? 어떻게 부자가 될까? 어떻게 권력을 잡을까? 어떻게 명예를 얻을까?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저와 같은 목사도 그렇습니다. 목회성공을 추구합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교회를 생각합니다. 대형교회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목사님들을 만났을 때 교인숫자가 몇 명인지?, 일 년 예산은 얼마인지? 에 따라 성공한 목사, 실패한 목사로 구분합니다. 저 역시도 성공한 목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 넉넉한 예산을 운영하는 교회를 원합니다. 물론 그런 교회가 나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질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외형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내면보다는 외면, 본질보다는 형식과 보이는 것에 치중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구걸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은 하루하루 먹는 것을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하늘의 것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땅의 것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그렇게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었습니다. 실로암 못에 갈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예수님을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만나주시고 그를 보신 것이 은혜였습니다.

맹인은 단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물론 누군가 실로암 못까지 가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구걸하던 인생이 구걸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걸하던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땅의 것을 구걸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늘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출교당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구걸하며 살던 맹인이 실로암 못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육신의 눈을 떴을 뿐 아니라 땅의 것만 구걸하던 인생이 변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땅의 것을 추구하며 구걸하는 걸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땅의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을 우선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십니까? 걸인처럼 이 땅의 것만 추구한다면 실로암 못에서 변화를 받아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3. 범인(9~10절)

(요 9:9~10)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요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범인’이란 의미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죄를 저지른 ‘범죄인’이란 뜻과 ‘평범한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뜻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모든 죄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둠속에 살아갑니다. 누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예화)

한경직 목사님은 1992년 4월 29일, 전 세계 미디어들이 실황 중계하는 독일 베를린에서의 템플턴상 수상 이후 영락교회 주최로 열린 축하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참회의 고백을 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한 범인, 죄인입니다. 성경이 증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한 범인입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실로암 못에서 거듭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맹인이나 걸인이 아닌 보통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 맹인의 부모, 이웃사람들, 바리새인들 모두에게 예수님은 필요한 분입니다.

맹인주변의 이웃이나 평소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은 치유 받은 맹인이 전에 구걸했던 사람인지 의아해하며 눈이 떠진 경위를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맹인이 답변하고 그 답변에 대한 여러 사람의 입장차이가 나타납니다.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은 맹인과 걸인 뿐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와 권세를 가졌던 권력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계속 억압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도 권력을 가진 자들의 집요한 박해로 인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확실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요한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치유 받은 맹인의 신념과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하여 참된 성도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을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어서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문제 삼아 맹인 되었던 사람과 그 부모를 소환하여 심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은근한 협박과 회유를 통해 맹인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해 치유된 사실을 부인하는 진술을 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맹인 되었던 사람은 자신이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뜨게 된 분명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협박에 굴하지 않고 종교지도자들의 불합리한 태도를 은근히 조소하며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그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이 틀림없다고 자신의 태도를 밝혔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은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징표였습니다. 구약은 사람이 맹인 되는 것이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메시아가 오실 때 행하실 일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표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메시아 사역의 명백한 표적을 보고도 부인하였고 맹인 되었던 사람을 출교시키는 악한 조치까지 취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영안은 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8:39)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눈을 뜨고 종교지도자로 살았던 바리새인들에게 실로암 못이 필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재난을 죄의 결과로만 돌리려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념을 수정하여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픔과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는 일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로암 못은 맹인이나 걸인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실로암 못에서 새로운 눈을 떠야 합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육신적인 눈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땅의 것만 추구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로암 못에서 거듭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고백하며 증거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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