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8:1-10
제목: 다시 갈릴리에서
찬송: 320장
목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뜻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왔다가 돌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과 갈릴리에 먼저 가 계시니 거기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가 어떤 곳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떤 마음으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2017년 새해에 갈릴리의 의미를 새겨보고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갈릴리에서
1. 초심으로 시작합시다.(마 28:10)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초심’은 ‘처음에 먹은 마음’입니다. 살다보면 처음에 먹은 마음이 변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환경과 사람 때문에 초심이 변하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변하기도 합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얀손스는 동료 지휘자들의 리허설을 참관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휘는 완성이 없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니까 볼수록 새롭고 신기하다”, “나는 좀 더 배워야 해요. 초심을 잃을까봐 그게 제일 두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팔레스틴에서 최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별로 가치가 없는 지방으로 인식되었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부각된 지방이기도 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제자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살던 집도 이곳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 마을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들판도 바로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으며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이곳 언덕 위에서 였습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였습니다. 평상시에는 잔잔하고 맑으나 때때로 큰 폭풍으로 성난 파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갈릴리는 대다수 제자들의 고향이자 처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던 곳이면서 약 2년 동안 주님을 따라 동고동락하며 사역하였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신 곳도 이 갈릴리였고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신 곳도 갈릴리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갈릴리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곳이고 가장 활발히 활동하신 중심지였으며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갈릴리로 돌아가 다시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초심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간증)
광성교회 부임 초에 어떤 권사님이 ‘목사님은 초심을 잃지 말고 변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권사님이 그 때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하느냐고 하면서 ‘변하지 않아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변했는데 권사님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017년 새해 첫날 저녁설교를 준비하며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과연 초심을 간직하고 있는지?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그 마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장신대 도서관에서 입시준비를 하던 그 때를 생각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감격을 생각했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 파주에 있는 금곡평강교회에 교육전도사로 부임했을 때의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다짐했던 목사 안수 받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제가 목사안수 받은 날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의 장례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영락교회를 들러 한경직 목사님 영정에 헌화하고 노량진에 있는 명수대교회로 가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인품과 신앙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목사, 바른 목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음이 변질되었습니다. 초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피하고 싶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따라 가겠다고 했지만 편한 곳을 추구하고 물질에 약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을 꿈꾸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용서하지 못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습니다. 태어난 고향이 있는가 하면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고향 말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영적인 고향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에게는 갈릴리가 신앙의 초심을 갖게 했던 영적인 고향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심과 순수한 마음을 간직했던 곳입니다.
바울에게는 다메섹 도상이었고 모세에게는 미디안광야였으며 엘리야에게는 갈멜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이거나 혹은 영적인 힘을 얻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 지치고 몹시 곤할 때 고향을 찾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옛 동산에 올라보면 추억에 잠겨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시름을 달랠 수 있습니다. 저도 때로 지치고 곤할 때는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을 찾곤 합니다. 산등성이에 올라보기도 하고 냇가에 가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 출석하던 고향교회를 가기도 합니다. 초심을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자 따르던 제자들은 삶의 목적을 잃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3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만 믿고 따라다녔는데 주님이 이제 더 이상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골방에 숨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옛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갈릴리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사역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갈릴리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가는 희망의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갈릴리는 그들에게 있어 새로운 출발점이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영적인 고향이자 중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초심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순수한 마음, 초심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초심을 간직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어부로 살던 고기잡이 도구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했습니다. 주님만 믿고 따라갔습니다.
은혜광성교회도 초심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초심으로 시작하면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은혜로 시작하면 됩니다. 은혜는 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의 대가를 치른 것이지만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생명을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영생을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천국을 무상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초심으로 시작하면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다. 겸손할 수 있습니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017년 한 해 동안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알 수 없습니다.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도 사이사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초심으로 시작하면 어떤 일들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초심으로 시작하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습니다. 은혜로 주어질 것만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기쁨,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감격했던 초심으로 다시 시작하는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도 초심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속 끓이게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랄 때 주었던 기쁨과 감격을 간직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터에서도 초심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일자리 구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취업의 기쁨을 간직했던 초심으로 시작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 역시도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초심을 가지면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7년을 다시 갈릴리에서 초심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그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초심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정도의 감격과 기쁨을 간직했을 때의 초심으로 시작하면 복된 한해, 행복한 2017년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시 갈릴리에서
2. 사랑으로 시작합시다.(요 21:17)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몇 일전에 초등학교 동창인 김현천이란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작년에 아내를 잃은 친구입니다. “2016년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한해였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함께 해준 분들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조금만 더 잘해줄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더 나를 위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주변사람들을 위한 투자를 해서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더 잘해주고 사랑해줄걸 하는 후회가 담긴 글이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 후회하게 됩니다. 사랑을 미루면 후회가 됩니다. 2017년 말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마쳐야 합니다.
(예화)
우리는 사랑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도소에 수감된 청년을 위문하러 갔습니다. 그는 자동차 절도혐의로 복역 중이었지요. “힘들지? 조금만 참아라. 자네 나오면 내가 힘껏 도와줄게.” 그러자 자동차 절도범이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마세요. 도와주다니요? 자동차를 훔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나 하세요?”
폴란드 태생의 프랑스 과학자 마리 퀴리(1867∼1934) 부인은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인류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일 뿐만 아니라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 두 개의 노벨상을 받은 천재입니다. 5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퀴리 부인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큰 서운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한 번도 자신을 뜨겁게 안아주거나 입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11세 때 어머니를 잃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결핵을 앓고 있었고 딸에게 결핵균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 강렬한 포옹이나 입맞춤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입니다. 입맞춤을 받지 못한 딸도 속상했지만 사랑하는 딸에게 진하게 입을 맞추지 못한 어머니는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퀴리 부인의 어머니는 딸을 포옹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방법은 차이가 있습니다. 안아주고 격려하는 사랑도 사랑이고, 표현하지 않아도 기도해주고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적을 행한 장소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이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사랑을 시작하는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사라질 때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치집의 기쁨이 지속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때가 아님을 말씀하셨지만 뜻을 돌이켜 새 가정의 사랑과 기쁨이 이어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입니다. 모든 사역을 사랑으로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그들의 아픔을 감싸고 치유하신 것도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지탄을 받으면서도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율법을 사랑으로 요약해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사랑으로 요약하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사랑고백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자기를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일깨우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와 어부생활을 다시 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여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심을 알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친히 숯불을 피우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구워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생선요리였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거듭하여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근심하며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답했습니다. 이 세 번의 사랑의 고백을 확인하신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찾으시는 사랑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식고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셔서 생선유리를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여행 중 한 주막에 들렀을 때 일입니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주막을 나오려 할 때 병중에 있던 주막집 어린 딸이 톨스토이의 빨간 가방이 갖고 싶어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이를 본 톨스토이는 본인이 여행 중이고 가방 안에 짐이 있었기에 아이에게 줄 수 없다고 하고, 대신 집에 돌아가 짐을 비우고 가방을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그 가방을 들고 주막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죽어 공동묘지에 묻힌 뒤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무덤을 찾아가 가져온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비석에 ‘사랑은 미루지 말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습니다. 톨스토이는 후회했습니다. ‘만약 그때 주막집 어린 딸에게 선뜻 가방을 내주었다면 그 어린 딸은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 생명의 끈을 조금 더 붙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서 가졌던 마지막 소망을 들어줬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을 미루지 맙시다. 기회는 다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가족을 향한 사랑, 교회를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시작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7년은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랑은 죽음까지 초월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자식을 위해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주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했던 장소입니다. 주님께 사랑고백을 했던 장소입니다. 주님을 향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습니까? 처음 사랑이 약해져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2017년에 다시 갈릴리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처음 사랑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드렸던 첫사랑의 고백으로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갈릴리에서
3. 사명으로 시작합시다.(눅 5:10~11)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칼 힐티는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단지 생업으로서 직업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하는 존재이유, 곧 사명을 발견하고, 자신을 바쳐 헌신할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인생 최고의 행복은 바로 사명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절대사명이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사명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친구들을 청하여 두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자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고기만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영혼의 어부로 사명을 받았던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확인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다시 사명을 부여해주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보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재차 사명을 받고 이후에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세우고 예수님의 양을 치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에는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말씀하신 지상명령의 장소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는 사명을 받은 곳이며 사명감을 고취하는 장소입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크고 작은 사명의 분량과 사명의 자리는 다르다 할지라도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똑같이 부여받았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로서의 사명, 자녀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일터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받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세계적인 석학 아인슈타인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이유는 “대통령을 할 만한 인물은 많이 있으나 물리학을 가르칠 학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명을 우선으로 선택합니다.
바울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명을 깨닫고 일생동안 사명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행 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화)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역마차에는 세 종류의 좌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1등석과 2등석, 3등석의 요금이 각각 차이가 있었는데 이 차이는 역마차가 고장이 났을 때 드러납니다.
1등석 요금을 낸 사람은 고장이 나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고, 2등석은 마차에서 내려서 길 옆에 서서 마차가 고쳐질 때까지 구경하는 사람이며, 3등석은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밀고 고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부들은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3등석 요금을 낸 사람들이 누군가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일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고 도와줄 때, 역마차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 구경꾼, 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일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리는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는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행복과 보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에 따라 초심이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사명을 붙잡고 있으면 초심을 회복하고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열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은 초심으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으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제자들처럼 갈릴리로 돌아가 초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삶 (0) | 2017.02.21 |
---|---|
실로암 못이 필요한 사람 (0) | 2017.02.10 |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0) | 2017.02.10 |
은혜의 강물 (0) | 2016.10.27 |
마음을 비웁시다 (0) | 2016.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