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2:44~47
제목: 부흥회 그리고 변화
목표: 은혜를 생활의 변화로 이어지게 한다.
부흥회를 통해 은혜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부흥회를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부흥회는 끝났지만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실천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체험을 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의 생활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변화가 교회뿐 아니라 이웃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부흥회 후에 아름답게 변화되어 성숙과 부흥의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회 그리고 변화는
1. 자기 비움입니다.(44-45절)
44-45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부흥회는 자기 비움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머리와 가슴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입과 손과 발로 연결되어 실천할 때 변화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부흥회 강사는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약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기도에 힘쓸 때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설교했습니다. 그 날에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오로지 기도에 힘쓰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첫 번째 변화가 자기 비움이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모든 물건을 서로 함께 사용했습니다. 또한 재산과 소유를 팔아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함께 사용했는데, ‘모든’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가진 것들까지를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것만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영적인 필요까지 채워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영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돌보았습니다. 서로의 은사를 활용하여 함께 나누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재능을 기부했습니다.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자기를 비울 때 나누고 섬길 사람이 보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김치를 맛있게 담는다며 김치를 담아 주변 사람들과 나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나약한 사람을 위해 지속적으로 중보기도하며 세워가기도 합니다. 병든 조카를 자식처럼 돌보는 고모도 있습니다. 어려운 구역식구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구역장도 있습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은 자기를 비울 때 생기는 것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의미는 소유를 완전히 정리했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욕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이후 자발적으로 형제의 부족함을 채워주었습니다. 욕심이 있으면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교만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울 때 다른 사람이 보이고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보입니다. 자기로 채워져 있을 때는 주변에 결핍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영접하는 곳에 서 있으면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인사하러 올 때가 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과자를 받은 아이들에게 손을 벌려 과자를 달라고 하면 대부분 손을 뒤로 감추고 주려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도망가고 어떤 아이들은 울어버립니다. 아이들도 자기 손에 쥔 것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움켜잡은 손을 펴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나누어주기 싫어합니다. 하물며 땀을 흘려 수고하여 얻은 재산과 소유를 나눠 준다는 것은 더욱이 어렵습니다.
자기 비움은 은혜를 받을 때 가능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자기를 비울 수 있습니다.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자기를 비우는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자신의 소유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예화) 은혜 받은 삭개오의 삶의 변화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부자였지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착취하여 자신의 배를 채웠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공허했습니다. 그는 삶의 변화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지만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잔치를 배설하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 남에게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삶의 변화입니다.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돈을 벌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세리장이라는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부정하게 돈을 벌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무릅쓰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이었고 돈이 곧 자기의 존재이유였습니다.
그런 삭개오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자 탐욕으로 가득한 자신을 비웠습니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자신을 비우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억울하게 착취당했던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자기를 비우면서 다른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내 소유인 것 같지만 언제 다른 사람에게 갈지 알 수 없습니다. 명예와 재능도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을 때만 내 것입니다.
(예화)왕쥔야오
중국 저장성의 경제계 인물 중에 왕쥔야오가 한창나이에 죽었는데 그 부인이 약 380억원의 예금을 가지고 왕쥔야오 운전기사와 재혼을 했습니다. 운전기사가 말하기를 “전에는 내가 왕 사장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왕 사장님이 나를 위해 일했던 것이구나.”하며 행복해했습니다. 왕쥔야오가 자신의 재물과 아내가 딴 사람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욕심, 자존심, 교만, 아집으로 가득한 자기를 비울수록 행복합니다.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만족이 없지만 나눔의 샘은 퍼낼수록 새 물이 고이는 법입니다.
부흥회 강사로 오셨던 김경진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의 3대 질문 중에 첫 번째가 ‘버릴 줄 아는가’라고 설교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의 신분, 학벌, 명예, 권력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이후 나타난 삶의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비우고 버릴수록 자유롭습니다. 자기를 비워야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삶에 엉켜있는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문제, 부부문제, 자식문제, 사업과 직장문제, 물질문제도 자기를 비우면 자유롭고 평안합니다. 비우고 버리지 못하면 염려와 걱정에 둘러싸입니다.
(예화) 대한적십자사 총재 겸 성주그룹 김성주회장의 인터뷰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나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어요. 무작정 상경했던 한 여성은 어머니가 보호해주며 기술 가르쳐준 덕에 살 수 있었다고 하고, 어느 목사님은 깡패 똘마니로 살다가 어머니 덕에 다른 삶을 찾았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받은 생활비 중 90%는 누군가를 돕는 데 쓰셨어요. 검소하게 사셨고 딸들도 검소하게 키웠어요.”
자기를 비우고 떠난 사람의 자리가 아름답습니다. 자기를 채우려 한 사람과 자기를 비우고 산 사람의 마지막 남은 자리는 여운과 감동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철저히 비우고 살다가 무덤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모든 것을 비우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자기 비움, 자기 부인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울 때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4일간의 부흥회는 마쳤습니다. 이제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울까 실천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자기를 비우고 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나누면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회 그리고 변화는
2. 한마음입니다.(46절)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두 번째 변화는 한마음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또한 집에서 음식을 나누며 즐겁게 교제했습니다. 오늘날 구역모임처럼 서로의 집을 돌아가며 모여서 교제했습니다. 한마음으로 성전과 집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잘 모이고 재미있습니다. 세상모임이나 교회모임 역시 똑같습니다. 한마음이 되면 모일 때마다 행복합니다. 가족이 한마음 되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사장과 직원들이 한마음 되면 행복한 일터가 됩니다. 목사와 성도들이 한마음 되면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대통령과 국민들이 한마음 되면 행복한 나라가 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이 다르면 갈등이 생기기 때문에 이미 천국이 아닙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면 됩니다. 한마음이 되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초대교회는 한마음이 된 교회가 천국이었고 가정이 천국이었습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가정과 교회생활이 기뻤기 때문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는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했습니다. 이런 교회와 가정이 얼마나 행복한 공동체입니까? 오순절 성령체험 후에 교회와 가정에 일어난 변화의 역사였습니다.
마음이 갈라지면 갈등과 분쟁이 생깁니다. 그렇게 아름답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갈라졌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비우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히브리파 유대인들만 구제를 하자 헬라파 유대인들의 마음이 깨어지고 원망이 생겼습니다.
군대에서 웃으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배식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전쟁에서 경계가 가장 중요하지만 밥 먹을 때 분배를 잘못하여 불만이 생기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공평한 분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화) 우분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곳 부족이 사용하는 인사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부족을 연구하던 어느 인류학자가 나무 옆에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이 가득한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지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모두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바구니에 도착하여 과일을 서로 나눠 먹으며 행복해했습니다.
인류학자가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일등한 사람에게 모두 주려고 했는데 왜 일등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함께 달렸느냐?” 아이들의 입에서 “우분투”라는 단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나머지 아이들을 슬프게 하고 나만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일곱집사 중에 니골라집사 때문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일곱집사는 임직 받을 때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니골라는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을 모아 패를 만들어 교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잘못된 소그룹을 만들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다른 사람은 배척했습니다. 니골라당과 다른 성도들 사이에 마음이 갈라져 갈등과 분쟁이 생겼습니다.
빌립보교회 역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들이 갈등을 겪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인물들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마음이 서로 갈라졌습니다. 한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충성하지 않고 서로 시기하며 질투하며 교회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마음이 갈리면 아무리 충성스런 일꾼들도 갈등하며 싸웁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선교를 하다가 마음이 갈라져 싸웠습니다. 마가를 선교에 동참시키는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았지만 사람문제로 인해 서로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충성스런 일꾼들도 마음이 갈렸듯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해 충성하면서도 한마음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함께 봉사하는 사람끼리 마음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사람이 잘해서 되지 않고 서로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말씀합니다.
사울왕은 스스로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의 은혜를 입은 사울이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라고 회개했지만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음 되는 것이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음이 되려면 하나님이 마음을 다스려주셔야 합니다. 악령이 호시탐탐 우리의 마음을 노리고 흔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한마음이 되려면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그곳에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개미들이 큰 벌레를 물고 옮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큰 벌레지만 여러 마리의 개미가 각자가 맡은 역할을 감당하며 함께 수고하면서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작은 개미라도 한마음이 될 때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만약 한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고독사는 일본에서 온 말입니다. 가족·친척·사회와 떨어져 살다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음을 맞고 죽어서도 오랫동안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입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2010년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한 해 무연고 사망자가 3만2000명에 이른다.”고 보도해 충격을 던졌습니다.
이제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년 전에 부산의 다세대주택에서 죽은 지 5년가량 된 60대 여성의 주검이 백골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이 주택에는 두 가구가 더 살고 있었지만 이웃이나 집주인이 그의 죽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람과의 교제가 끊어진 결과입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음이 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 모든 성도는 예수님 중심으로 한마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교제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회 그리고 변화는
3. 칭송입니다.(47절)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은혜를 받은 성도의 세 번째 변화는 칭송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표현했다는 뜻입니다. 입술과 표정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입술이 찬양의 입술로 변화되었고 기쁨과 행복한 표정으로 얼굴이 변화되었습니다.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과 교회가 변화되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표정과 삶의 모습이 변화된 것을 보고 이웃들도 놀랐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칭송을 받았다’는 표현을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호감을 샀다’, ‘칭찬을 받았다.’, ‘우러러보게 되었다.’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성도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온 백성이 호감을 가지고 칭찬하고 우러러 보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불신자들로부터 호감을 사고, 칭찬을 듣고 우러러 보게 되면 교회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비호감을 사고 있습니다. 칭찬은커녕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고 우러러 보기는커녕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의 자리를 둘러보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는지, 호감을 사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우러러 볼만한 일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당장 내가 속한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가정에서, 일터에서, 속한 공동체에서,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면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호감을 주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될 때 초대교회처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책망만 받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처럼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는 교회도 있습니다. 또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칭찬만 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밤에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수많은 십자가의 불빛이 있습니다. 그 교회들 중에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교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화될 것이고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아도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교회라면 세상은 여전히 암흑 속에 빠져들 것입니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성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망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 앞에 왔다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칭찬 받았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엄중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까?
1)말만하고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척 하지만 삶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스스로 높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의식과 허영에 사로잡혀 섬김을 받으려했습니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를 좋아하며 세속적인 영광과 종교적인 명예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3)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워도 그 속은 시체와 곰팡이로 인하여 고약한 냄새를 풍길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는 많이 드렸지만 더 중요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버렸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칭송을 받을 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만이 칭송받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패배해도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칭찬이 더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지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이 14년 만에 우승했습니다. 5연속 우승을 노리던 삼성이 패배하여 삼성선수들에게는 아쉬운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상식에서 감동을 연출했습니다. 5차전 경기가 끝나고 잠실구장에서 류중일 감독을 비롯한 삼성 선수단이 일렬로 도열해 두산의 우승을 함께 축하했습니다. 시상식에 이어 우승 트로피 전달식까지 약 20분 동안 진행된 행사를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이날 삼성은 패한 즉시 경기장을 떠나는 관례를 깨고 우승 행사를 끝까지 지켜보며 축하했습니다. 야구계 안팎에서는 호평이 나왔습니다. “삼성이 일등은 놓쳤지만 일류임을 보여줬다”, “승자와 패자 모두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우승해야만 칭송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패자로서 찬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해서 칭송을 받는 것 귀한 일입니다. 승리해서 칭찬을 듣는 것 매우 귀합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취업해서, 직장에서 승진해서, 사업에서 성공해서, 명예를 얻어서, 자녀가 잘 되어서 칭송을 듣는 것이 귀합니다. 모두가 그런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실패해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일등을 해야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가 일등이 되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실패하고 패배해도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호감을 주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1등을 하고 성공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비호감 기독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공하고도 오히려 전도의 문을 막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성자이자 기도와 성령의 사람으로 불리는 앤드류 머레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세상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하는 사람을 바꾸시기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부흥회는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동기를 부여해주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 후 변화되었듯이 우리교회도 부흥회 후에 아름다운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먼저 자신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은 변화된 사람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켜 가십니다.
변화는 자기를 비우고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며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흥회 후에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