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구원루트의 조력자

하마사 2015. 10. 13. 10:24

본문: 행 16:30~34

제목: 구원루트의 조력자

목표: 구원을 이루어가는 조력자로 살게 한다.

 

 

탈북자들이 한국을 오기 위해 거치는 경로를 탈북루트라 합니다. 루트는 물품이나 정보 등이 전해지는 경로를 말하며 비행기나 배가 다니는 고정노선을 뜻하기도 합니다. 생명을 걸고 탈북자들을 돕는 사람이 탈북루트의 조력자입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라고 설교제목을 붙인 이유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구원경로를 알고 구원에 조력하는 사람이 되자는 의미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진 과정을 보면 조력자들이 있었습니다. 루디아라는 여인이 바울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기도하러가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수입이 끊긴 주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여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본문은 그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는

1. 순종의 사람입니다.(10절)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하나님만이 구원받을 사람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그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12명의 제자들과 바울과 동역자들을 통해서 구원사역을 이루어가셨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그 사역을 이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가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 놀라운 계획 속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그 시간과 그 자리에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고 각자 자신의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면 간수가 구원받지 못했고 빌립보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유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럽의 첫 성이었던 빌립보로 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드로아에 있던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게도냐 사람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확신하고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마게도냐의 첫 성이었던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일행은 안식일에 예배드릴 회당을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 모인 여인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루디아라는 여인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님을 영접케 했습니다. 루디아와 가족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바울일행이 그 집에 머물기를 강권하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감동시켜 순종케 하신 하나님이 루디아의 마음도 감동시켜 복음을 영접하고 바울 일행의 숙소까지 해결해주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에 거하면서 기도하러 가던 바울일행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번거롭게 했습니다. 여러 날을 괴롭히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선포하였더니 귀신이 즉시 나가고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자기들의 수입원이 끊어지자 바울일행을 고발했습니다. 잘못된 풍속을 전한다는 죄명으로 매를 맞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도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가야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환상을 통해 빌립보에 불러놓고 감옥에 들여보내셨으니 말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감옥에서 간수를 만났고 복음으로 회심하여 결국 그와 가족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간수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여 빌립보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환상을 본 일, 루디아를 만난 일, 기도하러 간 일, 점치는 종을 만난 일, 빌립보감옥에 수감된 일이 모두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한 부분이 빠졌다면 구원루트가 끊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일행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와 간수의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많은 교회를 개척했지만 빌립보교회는 바울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궁핍에 처했을 때 구제헌금을 보내주기었습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을 때 많은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옥고를 치르는 바울을 돕도록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감사한 마음으로 로마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빌립보교회에 보냈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구원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구원 얻어 영생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복음전할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령의 감동이 올 때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즉시 봉사해야 합니다. 나중에 한가할 때 여건이 되면 봉사해야지 하면서 미루면 많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기도 해야지, 성경읽어야지, 전도해야지 하는 마음의 감동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면 한주가 되고, 한 달이 되고, 또 일 년이 지나갑니다.

또한 핑계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즉시 순종하려고 할 때 발목을 잡는 것이 핑계거리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종을 보내어 사람을 초청했는데 한 사람은 밭을 샀다고 하며 핑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다고 핑계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장가를 들었다고 핑계하고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주인이 이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면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하였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도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불효자도 핑계거리가 있고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도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도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예배에 빠지는 사람도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핑계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포인터는 털이 짧은 사냥개입니다. 이름이 포인터(Pointer·지시)인 이유는 주인의 지시에 절대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지시 없이 사냥한 짐승을 먼저 입에 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포인터는 모든 우선권을 주인에게 내주고 자신은 지시만 따릅니다. 항상 주인 곁에 머물며 명령을 기다립니다. 오죽하면 사냥개의 이름이 ‘지시’(指示)이겠습니까? 이 개는 주인 곁에 머물 때 안정과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인터는 최고의 사냥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포인터를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을 영광에 먼저 입을 대거나 십자가 고난을 외면한 채 영화의 면류관만 추구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는 우직하게 주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명령에 순종하는 포인터와 같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것부터, 순종할 수 있는 것부터 순종하십시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답게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10월은 총동원출석전도의 달입니다. 힘껏 예배에 참석하고 전도하는 일에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이 구원루트의 조력자입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는

2. 감동의 사람입니다.(25, 28절)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8절,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감동의 사람은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감동시켜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간수를 감동시켜 간수의 가정을 구원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점치는 여인의 귀신을 쫓아준 것이 주인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좋은 일하고도 감옥에 갇혔지만 원망하지 않고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 때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벗어졌습니다. 도망갈 수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도망친 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있노라.” 하자 간수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감동받은 간수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질문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면 구원의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고난을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고난 앞에 절망한 사람은 감동을 주지 못하지만 그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바울과 실라는 고통의 환경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대부분은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빌립보에 왔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 감옥에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그런 환경에서도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고난을 기도와 찬송으로 극복했습니다. 환경에 침몰되지 않았습니다. 고난 속에 절망하다 고난으로 끝나면 감동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을 극복하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고난은 감동을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감동의 이야기를 만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 일행이 간수를 감동시켜 그와 가족을 구원했듯이 말입니다. 고난을 감동공장으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 감동이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구원의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베서니는 서핑을 즐기는 부모의 영향으로 매일 바다에서 놀고, 바다에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13살이 되던 해, 서핑을 나갔다가 상어의 공격으로 한쪽 팔을 잃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시 서핑을 시작하지만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좌절했던 베서니는 태국에 봉사 활동을 갔다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서핑을 시작한 베서니는 사고 발생 2년 후 한 팔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소울 서퍼’라는 영화로 제작됐습니다.

이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견디기 힘들지만 극복하면 감동을 주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감동의 크기도 그만큼 더 커질 수 있습니다.

힘드십니까? 포기하고 싶습니까? 그 고난이 미래의 감동을 키우고 있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감동의 텃밭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걸림돌을 감동의 디딤돌로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2)감동을 주는 사람은 희생의 사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 문이 열렸을 때 감옥을 나갈 수 있었지만 나가지 않았습니다. 간수와 그 가족들을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만약 감옥을 나갔다면 간수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희생정신 때문이었습니다. 희생할 때 감동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을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은 후 하늘을 보고 누워 ‘어머니 은혜’를 노래 부르라고 하면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이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화요일에 성경공부반원들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했습니다.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병희 애국지사의 생전의 육성증언을 들었습니다. 당시에 끔찍했던 고문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문당하는 거 그거 무서우면 독립운동 못하지” 상상조차하기 싫은 고문이었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그런 고문을 각오하고 생명을 내어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애국지사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 자리에 있게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희생정신에 감동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감동이 없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희생적인 일을 할 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위해 이런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난뿐만 아니라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고통을 연장하여 감당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희생하셨듯이 남편의 구원을 위해 아내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아내의 구원을 위해 남편의 희생이, 자녀의 구원을 위해 부모의 희생이,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자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1852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근처 바다에서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드호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승객은 영국 73보병연대 소속 군인 472명과 가족 162명을 합쳐 634명이었습니다. 구명보트는 3대뿐으로 180명만 탈 수 있었습니다. 탑승자들이 서로 먼저 보트를 타겠다고 몰려들자 누군가 북을 울렸습니다. 버큰헤드 승조원인 해군과 승객인 육군 병사들이 갑판에 모였습니다.

함장 세튼 대령이 외쳤습니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희생해 온 가족들을 우리가 지킬 때다. 어린이와 여자부터 탈출시켜라.” 아이와 여성들이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구명보트로 옮겨 탔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보트에서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니 군인들도 타세요.” 한 장교가 나섰습니다. “우리가 저 보트로 몰려가면 큰 혼란이 일어나고 배가 뒤집힐 수도 있습니다.” 함장을 비롯한 군인 470여명은 구명보트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며 배와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위대한 희생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함께 달렸던 강도의 십자가는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희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말씀했듯이 감동을 주는 예수의 사람은 먼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처럼 희생할 때 감동을 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인심을 베풀어야 합니다. 깍쟁이처럼 살아서는 감동을 줄 수 없고 오히려 욕을 먹습니다. 생활 속에서 작은 손해를 각오하고 실천할 때 희생을 통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감자를 캐고 있는데 교회이름을 붙인 봉고차가 지나가다가 들러 감자 한 박스를 주문했습니다. 목사님 가족으로 보였답니다. 20Kg 한 박스에 2만원할 때인데 본인들이 직접 박스에 큰 것만 골라 담았습니다. 넉넉하게 담았기에 이제 그만 담으라고 했는데도 듣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딸로 보이는 사람이 검은 비닐봉지에 감자를 가득 담아 차에 싣고 2만원만 주고 갔습니다.

아버님은 속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분명한데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아 예수님을 욕 먹이더라고 하시면서 목사인 제가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다니면서 물건을 살 때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특히 시골에 가서 농산물을 살 때는 농사짓는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너무 값을 깎거나 야박하게 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생할 때 감동이 있습니다. 희생하는 것이 목숨을 버리는 큰 희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작은 손해를 보고 살면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희생입니다. 물건을 살 때도, 물건을 팔 때도,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에서 자기가 조금 손해 보는 것이 희생입니다. 작은 희생이 감동을 주고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씨앗을 심고 키워가는 사람입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는 구원을 위해 고난을 극복하고 희생을 감당하는 감동의 사람입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는

3. 복음의 사람입니다.(30~31절)

30~31절,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울 때, 남편 혼자 집에서 식사 제대로 챙기지 못할까봐 곰국을 끓여 놓았지만, 요즘엔 “까불지 마라” 라고 씽크대에 써 붙여 놓고 여행을 떠난다고 하네요!

까 : 까스 조심하고,

불 : 불내지 말고,

지 : 지겹다고 딴 생각하지 말고,

마 : 마누라에게 절대 전화 하지 말고,

라 : 라면 잘 끓여 먹으라.

 

요즘 남편들의 대답은 “웃기지마라”입니다.

웃: 웃음이 절로 나오고

기: 기분이 째진다.

지: 지루할 새가 없는데,

마: 마누라한테 전화 할 시간이 어딨니?

라: 라면 좋아하시네. 호텔에서 뷔페 먹고 있다.(ㅋㅋ)

아내가 집을 비우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남편들에게는 복음이라는 유머입니다. 남편들이 아내 머리위에 있습니다. 이런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행위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단순히 믿음으로 얻다보니 오히려 믿지를 않습니다. 명품은 값이 비싸야 가치 있게 보이지만, 영생을 얻는 구원은 값싸 보이기에 가치를 모릅니다. 돈이나 지식, 명예와 권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더욱 힘겹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죄 용서받은 의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으면 됩니다.

교회를 오래 동안 다니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교회봉사와 헌금을 많이 해야지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받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주의 이름을 믿고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복음의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울일행에게 감동을 받은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질문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동을 받는 것만으로는 구원과 관계가 없습니다. 복음이 아니어도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감동을 받고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스포츠를 보고 감동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문학작품이나 미술이나 연극 등 문화를 통해서도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연설이나 인격을 통해서도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치면 구원과는 상관없습니다.

바울 일행은 간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간수는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간수와 온 가족이 세례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이 임했고 그 가정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기쁨과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여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명령하지 않으면 말씀을 전할 수 없는 환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관심을 두기보다 귀를 즐겁게 하는 감각적이고 허탄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세대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아야 하고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수는 복음을 들을 때 혼자 듣지 않았습니다. 온 집안이 함께 듣고 믿었습니다. 자기만 듣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온 가족과 집안이 모여서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족총동원출석을 했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루트의 조력자는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고난을 극복하고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감동의 사람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사람입니다.

10월은 ‘총동원출석전도의 달’로 지킵니다. 온 교인들이 총동원하여 출석하고 구역별로 세 명씩 전도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교회출석하고 전도하는 달입니다. 가족과 구역이 총동원하여 출석하고, 순종의 사람, 감동의 사람,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서 우리 모두가 구원루트의 조력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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