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 6년간 아홉 차례 수술을 받으며 9전10기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죽음은 ‘무서움의 왕’(욥 18:14)이었다. 그러나 주께선 그에게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하였다. 무서움의 왕은 주님 앞에서 무력하다. 그는 평생 기도했고 평생 기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주여 받아주옵소서.”
지난 29일을 전후해 차인태(71·서울 영락교회 은퇴장로) 전 아나운서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차 장로는 수술조차 불가한 악성 종양을 신앙으로 이겨냈다. 그렇지만 아직은 관해(寬解) 상태이기 때문에 직접 대면이 쉽지 않았다.
-SNS를 통해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투병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아홉 차례의 항암치료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전 모습 그대로이신데요.
“중보기도 덕입니다. 무엇보다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4∼5차 항암치료를 받을 때 이름 모를 청년들의 찬송과 중보기도를 잊을 수 없어요. 저는 중환자실에 있었어요. 적게는 2∼3명, 많게는 7∼8명의 20대 젊은이들이 매주 토요일과 주일 새벽 사이 천사의 음성으로 저와 환우들을 찾아주었어요. 암병동 끝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찬송은 제게 예배시간이었습니다.
-발병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셨지요. 늘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고요.
“과분합니다. 2009년 10월 1일이었죠. 경기대 예술대학에서 10여년째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분주했던 날들이었어요. 한데 그날 밤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렸어요. 급성폐렴 증세였고요. 2주간의 진단 끝에 악성 림프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심장과 폐 사이에 꽈리 모양의 악성 종양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수술도 불가능할 정도라고 하더군요.
-‘내일의 죽음’보다 ‘오늘의 고통’이 더 힘드셨겠습니다.
“완치 가능성 40%였습니다. 그마저도 롱 텀(long term)으로 가야 한다고…. 육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요. 24시간 수시로 진행되는 혈압, 호흡, 맥박, 혈당 체크와 간호사들의 신발 끄는 소리가 제 육신의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어요. 내 자신에 대한 원망, 서글픔, 부끄러움, 허탈, 분노, 실망, 무기력이 짓눌렀지요.
-사투였겠습니다.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고 했는데…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항암주사 치료가 시작되면서 말씀으로 위로받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붙잡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또한 피할 길을 내신다’고 했어요. 머리카락이 빠지고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아이들, 손자손녀 생각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태신앙이시죠. 부모님이 평북 선천 등 한국 기독교 발상지나 다름없는 지역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내 고향 평북 벽동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둔 궁벽한 산골입니다. 크리스천인 증조할아버지가 평북 도의원을 지낸 지방 소지주여서 광복 후 북한 체제를 견디기 어려웠어요. 다행히 그때 할아버지가 경북 영천경찰서장으로 계셔서 월남하게 된 겁니다. 의사 면허가 있던 아버지가 경주에서 대한의원을 열었어요. 한데 1950년 6·25전쟁으로 아버지가 징집됐어요. 우리 4남매와 외가 쪽 식구들은 생계 수단이 없어 끼니 걱정을 해야 했어요. 외할머니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와 경주 시장바닥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요. 의사가 귀한 때라 아버지는 야전공병단 군의관 등으로 7년을 근무했습니다. 어머니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신앙 깊은 가문이었습니다.
-4대째 신앙가문이고 손자·손녀까지 가면 6대째인데 깊은 신앙은 어디서 다져졌습니까.
“경주에서 올라와 서울 미동초교를 거쳐 대광고에 진학했어요. 제 실력에 비해 좀 실망스러운 진학이었어요. 하지만 미션스쿨 대광은 저를 붙들어주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그 학교 출신 친구들과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또 연세대 성악과에 진학한 후에는 이화여대 후문 앞 다락방교회를 섬겼는데 거기서 크리스천으로서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을 길렀어요. 다락방교회는 김활란 박사(여성운동가)가 막사이사이상 수상을 기념해 설립한 교회였어요. 김옥길 당시 이화여대 총장(전 문교부 장관)과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님 등이 많이 출석했었죠. 장상 전 이대 총장이 대학 선배이자 교회 선배였습니다.”
그는 연세대 졸업 후 1969년 아나운서가 됐다. 그리고 73년 ‘장학퀴즈’ 시작과 함께 스타 아나운서가 됐다. 90년 4월까지 그는 17년간 장학퀴즈 진행자였다. 그가 걸으면 사람들은 “아 저기 장학퀴즈가 간다”고 말했다. 장학퀴즈에 출전했던 배우 송승환, 정치인 김두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은 그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스타 아나운서에게는 쉴 시간이 없었다. 1주일에 14개 프로그램이 주어졌다. 게다가 동요제, 가요제, 기념식, 대통령 취임식 등 중요 행사 진행도 피할 수 없었다. 신혼 이튿날 제주에서 호출당해 서울 녹화현장으로 가는가 하면, 맹장 수술 이틀 만에 녹화에 나서기도 했다.
74년 8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영결식 중계,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따른 국민장 중계도 맡았다. 72년 12월엔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MBC 10대가수 가요제’ 클로징 멘트 중 화재가 발생 60∼7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고 계셨다”고 회고했다.
-영락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셨지요.
“제가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제 작은 달란트를 하나님이 귀하게 써주셨어요. 시온찬양대 대장을 오래했고요. 음악부장, 당회 서기, 홍보출판부장 등 제 삶과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타사 스카우트 제의나 선거 출마 제의가 들어오면 인간적 고민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 날이면 교회에 가서 조용히 묵상했고요. 중심을 잡게 하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요즘 힘들게 하시는 하나님이 때문에 원망 안 드세요.
“그럴 리가요. 지난해 7월 12시간 동안 심장판막치환 재수술 등이 있었어요. 깨어난 후 아내의 기도문을 발견했어요. ‘나의 사랑하는 남편 차인태. 이제 그만 시험하시고 그의 낡은 죄를 깨끗하게 하셔서 진정 그에게 주신 달란트를 주를 증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시옵소서. 주님, 주님 다메섹에서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건강한 몸을 허락하셔서 주님 사랑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최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 기쁘게 주님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하고 말이죠. 아내 기도처럼 주님과 최후에 기쁘게 마주해야지요. 그 전까지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왜 원망스럽겠어요.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수술조차 불가했던 종양이 떨어져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가족의 헌신과 기도, 섭생과 운동도 큰 힘이 되셨지요. 병으로 애통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까지 내가 산 것, 누린 것, 대접 받았던 것이 본래 내 모습에 비해 얼마나 부풀려지고 과장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며 봉사하는 삶이 예수의 정신입니다. 혈루병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병고침을 받은 것처럼 치유의 은사, 능력의 은사를 믿습니다. 저보다 위중한 분들께 제가 조그마한 희망과 기도 제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차인태
평북 벽동 출신으로 증조부 때부터 지켜온 신앙을 6대째 이어가고 있다. 서울 영락교회 은퇴장로. 연세대 성악과를 나와 1969년 MBC 아나운서가 됐다. 70, 80년대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98년 제주MBC 대표이사, 2003년 평북지사, 98년 경기대 예술대 영상전공 교수 역임. 73∼90년 인기 프로그램 ‘장학퀴즈’를 진행했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국민일보, 201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