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관련자료/신앙칼럼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명진 목사 칼럼71)

하마사 2015. 7. 19. 15:30

http://cafe.daum.net/sinaimission/5uEL/74

 

샬롬

시내산 회원 여러분과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번에는 금년(2015년)  99총회 주제및 교육주제36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에 대한  

해설집에서 중요한 것을 발췌 요약하여 글을 올리오니 참고하시어 사역에 도움이 도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명진 목사 올림   

 

 

2015 제99회 총회주제 및 교육주제 36 해설

 

2015 제 99회 총회주제 해설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 (마 5:3-12, 창 12:1-3)

1. 복음의 재발견

2. 복음의 삶

3.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

 

목 차

권 두 언 1

총론: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김지철 목사 2

주제의 성경적 이해 배현주 목사 7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안교성 목사 12

주제의 선교적 이해 조재호 목사 16

주제의 교육적 이해 박화경 목사 18

주제의 사회 윤리적 이해 임성빈 목사 23

주제의 목회적 이해 박진석 목사 27

 

2015 교육주제 36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 교육주제 해설

 

총회장 설교: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정영택 목사 총회장 33

설교 2.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마태복음 5 : 3-12 정헌교 목사 36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김치성 목사(총회교육자원부총무) 39

저출산,고령화 속에서 복음을 소통하는 교회교육 박상진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49

남북통일을 바라봄속에서 복음의 재발견 하충엽 목사(영락교회 선교전담) 54

신약학자가본 복음의 삶 정창교 교수(대전신학대학교) 61

 

부록1. 산상보훈 8복 이명진 목사 71 부록 2: 12:1-3 아브람의 소명 주해. 83

권 두 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사회적 공신력 상실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복음으로 새롭게 무장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에 제99회 총회는 그 주제를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마 5:3-12, 창 12:1-3)으로 정하고, 부제를 “1) 복음의 재발견, 2) 복음의 삶, 3)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정체성을 확립하여 개혁과 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힘으로한국교회가 직면한 혼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은 이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던 모범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2015년에는 해방 70주년을 맞고,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게 됩니다. 민족과 세계를 섬기기 위해서 복음의 재발견을 통한 개혁과 부흥이 절실한때입니다. 한국교회는 내실을 다지며 화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분단된 한반도의평화 통일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긴요한 동북아시아 교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선교를 감당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아시아 시대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본 교단 산하 모든 교회와 기관이 같은 주제로 실천하여 시대적인 사명을 함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9월 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정영택 목사

 

 

총회가 복음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복음의 실천을 통한 정체성 회복이야말로 현(現)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복음은 세상을 어둠과 죄의 세력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예수님은 복음의 가치대로 사는 사람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명명하셨다. 예수님은 특히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친히 가르쳐 주셨으며, 몸소 그러한 삶을 사셨다(마 5-7장).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가난한자들, 억압받는 자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다. 연약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고, 인간들을 차별하는 거대한 담을 허무신 평화의 왕이셨다. 그리고 인간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지시고, 고통스런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또 천국 시민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묵상해 본다.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이후, 그 믿음의 길을 걷는 모든 순례자들이 사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던 시대도 위기의 시대였다. 위기의 시대 속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고 복음대로 사셔서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 시대에 성경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 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한 마중물이 되길 소망한다.

 

 

총론: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김지철 목사

 

1. 들어가는 글

.지난 3년간의 총회주제(제96회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제97회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제98회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 세상을 소금과 빛으로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면, 제99회 총회는 그러한 ‘행함’(Doing)보다는 복음에 대한 재발견을 통한 진정한 ‘그리스도인 됨’(Being)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부패한 중세의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의 원천’(ad fontes)인 성경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해 복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주제 선정 배경에는 현(現)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경에 계시된 복음을 재발견하여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2. 한국교회의 현(現{) 주소

최근 들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한국교회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말들을많이 한다. 지난 2014년 2월 5일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2013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의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2013년 한국교회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 수준을 물어본 여론조사 결과 “신뢰한다”는 비율이 19.4%로 매우 낮은 반면에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44.6%로 부정적인 평가 비율이 2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낮은 신뢰도는사실 지난 2008년, 2009년, 2010년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로 나타났기에 이번 여론조사 결과는 지난 6년간 한국교회의 낮은 신뢰도 문제가 어느 특정 상황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임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 수준을 현저하게 낮게 만든 근본적인 요인을 물었을 때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24.8%), “교회가 내부적 비리/부정부패가 많아서”(21.4%), “목사/지도자 윤리 문제 및 부도덕한 행동 때문에”(5.8%), “상업적/기적이어서”(5.4%) 등의 순서로 결과가 나왔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결과 응답 비율의 65.6%를 차지한 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부도덕성 혹은 윤리성부재와 관련된 것이었다. 목사와 교인들이 도덕성을 상실하면서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세속화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 수준을 낮추었으며 이것이 근본적으로 한국교회의 위기를 초래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이를 거꾸로 생각할 때 한국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다운 윤리와 도덕실천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신뢰를 회복하게 될 때 현(現) 한국교회가 맞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다운 도덕성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의 회복, 곧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종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의 변화를 재발견하는 데서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과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진정한 ‘인간다움’(humanitas)이요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인의 도덕성 회복은 자신이 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은혜와 사랑을 받은 존재인가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윤리와 복음은 분리될 수 없다. 복음에 대한 깊은 인식은 성도의 윤리적 삶을 격려하고 고난에 처한 성도를 격려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순종해, 즉 우리의 실존에서 그리스도의 이중 사랑 계명(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성령의 도움으로 지킴으로써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될 때 그리스도인다운 윤리적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대한 재발견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3. 복음의 재발견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의 실체요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은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셔서 우리를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셨다. 이것이 ‘복음’ 곧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 이 복된 소식을 우리의 공로나 율법적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선포할 때 언제나 종말론적 차원에서 논하였다.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 구원의 ‘첫 열매’(롬 8:23)와 ‘보증’(고후 5:5)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 운명은 확실하지만 여전히 옛 시대의 세력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죄와사망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굳게 붙잡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갈 5:25).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복음 이해안에는 윤리적 책임성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16세기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복음 이해 속에도 믿음과 윤리적 책임성이 동시적으로 공존해 있었다. 그의 「로마서 서문」에서 언급한 ‘참되고 살아 있는믿음’에 대한 이해는 이 점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을 동반한다. 정말로 믿음은 살아 있고 활기차고 활동적이며 능력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묻기 전에 믿음은 벌써 선을 행하며 또 언제나 선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이 포함된 복음 이해는 사실 성육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 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나님 나라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집중되어 있다. 곧 어둠과 죽임과 죄악과 억눌림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빛과 생명과 용서와 자유의세계로의 초청과 그 현실화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세상적인 가치와 행위에서부터의 탈출을 요청하는 회개를 선언함으로써(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기존의 세상적인 문화와 가치(예:물질 만능주의, 쾌락주의, 탐욕과 권세욕 등)에 대한 거부와 단절을 요구하신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해 그분의 구원행위에 참여하는 인간이야말로 세상적인 가치를 타파하는 힘을 지닌 복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를 거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선포한대로 사시면서 세상 변혁을 시도하셨고, 그것 때문에 죽음에 처하셨다. 십자가란 그런 의미에서 세상적인 모든 가치에 대한 거절과 파멸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이런 세상의 가치관을 심판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하나님의 혁명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포하고 삶으로 보이신 복음 이해 속에는 윤리적 삶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복음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심판하고 새로운 변혁을 시도할 수 있는 구체적인모습을 우리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첫머리에 나오는 팔복에서 찾을 수 있다.예수님의 팔복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가진 가 복이 있다’는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팔복말씀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그 안에 진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팔복 말씀대로 사시다가 그 말씀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다.그리고 그 말씀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며 승리하심으로 역설적인 복음의 진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몸소 삶으로 보여 주신 팔복이야말로 이세상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다.

 

4. 복음으로 사는 사람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은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신 ‘산상설교’의 서두 말씀이다.

 

팔복 말씀은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의 세 가지 차원을 보여 준다.

 

첫째는 복음의 사람(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은 소유적 차원이 아닌 존재적 차원이다. 인간은 많이 가졌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에서 어떤 삶의 태도가 흘러나오는지에 따라 진정한 행복의 여부가 결정된다.

둘째는 복음의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삶의 태도와 목표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셋째는 복음적인 삶이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 차원(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받는 자)으로 확대된다. 복음이 개인적 차원을 뛰어넘어 공동체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팔복은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면서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신앙공동체에게 주어지는 격려와 위로의 참된복음이다.

 

1) 복음의 사람

복음의 사람이란 심령, 즉 ‘마음이 가난한 자’(마 5:3)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대한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자들이 복음의 사람이다. 가난해진 마음으로 감사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진정한 복음을 들을 수도, 누릴 수도 없을 것이다. 가난한 마음은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기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와 고정관념을 부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인생길을 열어 놓는다. 마음이 가난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찌꺼기와 응어리진 것이 없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만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마음을 지닌 자가 바로 복음의 사람이다.

 

복음의 사람이란 ‘애통하는 자’(마 5:4)이다. 남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로운 미래를 함께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애통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병들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급함이 없으면 영혼이 병들게 된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이라면 영혼에 적신호가 뜬 것이다. 영혼이 애통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맺으며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서 자녀 된 은총을 누릴 수 있다. 애통하는자는 가슴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사명을 깨달아 기도하게 된다. 애통하는마음이 있을 때 사람이 변하고 공동체가 바뀌어 그 안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애통해한다는 것은 축복이요 은혜이다. 이런 애통해하는 마음을 지닌 자가 복음의 사람이다.

 

복음의 사람이란 ‘온유한 자’(마 5:5)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로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여유로움, 많은 것을 가졌으나 겸손하고, 힘을 사용할 수 있으나 통제할 줄 아는 모습이 바로 성경적인 온유함이다. 강력한 힘을갖고 있지만 아무 때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절제할 줄 알며 공동체의 평화와 회복을 위해 모든 힘을 쏟는 것이 진정한 온유함이다. 인간은 본래 온유하지 않다.인간의 성품 그 자체로는 온유함이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령의 역사 속에 붙들림을 받았을 때 온유해진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이다. 이 온유한 성품을 지닌 자가 바로 복음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인생이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복음으로 사는 삶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임재를 ‘갈망하는 삶의 태도’(마 5:6)를 지니고 살아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산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 목마르면서도 세상의 쾌락을 통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갈망하는 인간에게 다가와 말씀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는 답답함, 내 안에있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다 해결된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또한 ‘긍휼히 여기는 삶의 태도’(마 5:7)를 가지고 이세상을 살아간다. 긍휼은 진정한 변화의 역사를 가져오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긍휼의 마음으로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긍휼의 마음을 지닌 자는 남의 성공은 싫어하고남의 실패에 박수치는 매몰찬 세상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자이다. 오히려 절망 가운데 희망을 주고, 죽음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바꾸어 나가는 하나님의사람들이 지닌 삶의 태도이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마음을 청결케 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으로’(마 5:8) 세상을 보게 된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 이미 그 마음은 오염되어 거룩하지 못하고 불의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 주며 그 안을 거룩함으로 채워 주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만 바라보게끔 단순화시키는 것이 바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이다.

 

3)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하기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갈등과 반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화해자’(마 5:9)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어둠의 장막 속에서 갈등하고 투쟁하는 전쟁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갈등을 경험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도 갈등이 상존(常存)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화평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화평의 은사를 주셨다. 예수님도 이 땅에 화해자로 오셨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세상적인 장벽과 차별이 철폐되었다(엡2:1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은 세상의 참된 평화의 창조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법칙이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마 5:10) 자신의 피와 땀과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와 자유를 붙들고 나아가는 자이다. 세상의 어둠을 거두고 빛의 역사를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깨닫고 그 고난에 참여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된다. 이런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자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곧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요, 또한이런 사람들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복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줄 축복의 통로가되는 것이다(창 12:1-3).

 

 

5. 나오는 말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이 친히 가신 십자가의 길을그 대로 보여 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가난해지셨고 애통해 하셨다.불쌍한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셨고, 막힌 담을 허무신 평화의 왕이셨다. 그리고 핍박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고통스런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이 땅에 복음으로 사는 길을 열어 주셨다. 예수님은 팔복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또 천국 시민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현재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평화의 위기,빈부 격차에서 오는 경제적 위기, 세대 간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위기의 시대를살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던 시대도 위기의 시대였다. 정치적 억압의 시대요, 경제적으로 핍절한 시대요, 종교적으로 당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불법이 가득한 시대였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 속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고 복음대로 사셔서 새로운 시대를 여셨다. 우리도예수님을 본받아 이 시대에 성경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 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한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처럼 사는 것이 너무 값진 것이지만,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이기적인 욕망과 삶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다만 기도하면서 순종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에참여하게 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것만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온전히 회복하는 길이요, 복음으로 한국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길이라 여겨진다.

 

 

주제의 성경적 이해 배현주 목사

 

사도행전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행 11:26). 변화된 인격과 행실과 공동체 문화로 인해서 신앙인들은 새로운 존재들로 보이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에 예수를 믿는 ‘신자’는 많지만 그의 길을 따르는 ‘제자’는 부족하다는 자성의 소리가 큰 이즈음, 우리는 제99회 총회의 두 주제 성구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제자직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를 일깨우고 있다.

 

1.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라함의 응답(창 12:1-3)

창세기 12:1~3의 말씀은 창세기를 구분하는 분수령에 해당된다. 창세기1~11장에는 천지창조와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의 역사(원역사)가 그려져 있는 반면에, 12~50장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된 인물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지만(창 32:28),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존중받는 인물이고(출 2:24;4:5;32:13;미 7:20;사 29:22;겔 33:24),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어지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사 41:8).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신앙인, 즉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다(합 2:4; 롬 1: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롬 4:3, 9;갈 3:6;창 15:6).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설명한다(롬 4:11). 할례를 받기 이전에 믿음의 의를 얻은 것은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롬 4:11).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일치의 시대를 위해 살았던 사도바울에게 아브라함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를 위해 귀감이되는 신앙인의 원형이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창 17:4-5).

 

창세기 12:1~3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다. 1절에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이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은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4절에 나타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창 12:4).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여 친숙한 세계를 뒤에 두고 순례의 여정을 떠나는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참된 제자의 원형이다(막 10:2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 11:8). 친숙한세계를 뒤로 한 채 하나님의 인도만을 믿고 위험한 미지의 길로 나아가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사는 모험을 감행하는 신앙의 모티브는 후에 출애굽의 상황에서 다시 발견된다. 진정한 제자는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지 않아야 하듯이(눅 9:62)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나 하란으로 되돌아가 안주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과 순례의 길을 떠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새롭고 낯선 곳에서도 변함없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창 12:7, 8; 13:4, 18).

 

1절의 명령은 이제 2절에서 약속으로 이어진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이 약속은 바로 앞의 본문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 11:30)라는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큰 비약인지를 알 수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무력감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은 새 생명과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7-18). 한편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 12:2)라는 말씀은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는 바벨탑의 욕망을 연상하게 하는데, 인간들이 제멋대로 취하려 했다가 실패한 것을 이제는 여호와께서 적합한 자에게 선물로서 주시려 하신다(막 10:35-40).

3절에서도 약속이 이어진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2절과 3절에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가 약속된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축복이 지닌 보편성은 선민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급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리라는 약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놀랍고 기쁜 소식에 관해서 진술한다(갈 3:7, 8). 한편, 누가복음은 여러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 전통의 축복이 지닌 급진적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눅 1:55 13:16; 16:19-31; 19:9).

 

2. 산상설교의 팔복(마 5:3-12)

산상설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개의 큰 설교 말씀 중 첫 번째 설교이다 (마 5-7;10;13;18;23-25). 산상설교는 일차적으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예수의 활동에 이끌려서 따라오는 군중에게도 주어진 말씀이다(5:1;7:28). 산상설교의 서두를 장식하는 팔복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종말론적인 위로와 축복을 선포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제자직을 위한 교훈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 팔복은 현세적이고 통속적인 가치들이 전복되는 거룩한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본문은 ‘복 있는’(마카리오이)이라는 공통의 형용사로 시작하는 문장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구조를 지닌 문장이 아홉임에도 불구하고 ‘구복’이 아니라 ‘팔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단 3절과 10절이 같은 축복을 반복함으로써 구조적 완결성을 보여 줄뿐 아니라(수미상관법), 11~12절은 10절의 초점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의 고난을 상술하는 종속적 단위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팔복에는 예수 당시의 정황만이 아니라 저자 마태의 정황, 곧 후대 교회의 삶의 자리도 함께 반영되어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예수의 제자들과 청중들은 세상의 부와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아니라,정치적·경제적 사회적 억압, 종교적 소외, 신체적 질병 등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이었다(마 4:18-25;눅 6:20). 예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비워 낸 가난한 마음을 지닌 자들이 누릴 천국 축복을 선포하였다. 물질적 궁핍과 다중적 억압 속에서도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겸허한 마음을 잃지 않는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다. 팔복선언에서 ‘하나님의 나라’(통치, 주권)는 완곡하게 ‘하늘나라’, 곧 ‘천국’으로 표현되고 있다.한편 저자 마태가 속한 후대교회에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부유한 교인들이 있었다. 이 교인들은 부와 재물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허한 삶을 살아 갈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자신들의 경험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마 6:24;19:24). 이러한 독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 즉 하나님 중심적인 겸허한 사람에게 천국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물질 중심적인 교만한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용기, 가난과 물질적 손해까지 가져올수 있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하게 된다(마 5:40, 42).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의 청중들은 이 땅에서 착취, 박탈, 상실 등으로 탄식하고 슬퍼하는 평민들이었다. 세상의 죄로 인해 고난당하며 애통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종말론적 위로가 약속된다. 한편 후대교회의 제자들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애통하는 자들의 고난과 슬픔을 만드는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되며, 만일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고전 5:2; ). ‘위로를 받는다’는 헬라어 표현은 하나님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전제한 신적 수동태이다(마 5:4, 6, 7). 즉, “하나님께서 위로하실 것이다.”의 완곡어법이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 말씀은 우선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라는 시편의 비전을 연상시킨다. ‘온유한 자’라는 히브리어 원어는 ‘가난한 자’를 뜻하기도 한다. 부드럽고 겸손한 모습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로 표현된 ‘온유한 자’는 이러한 구약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첫 번째 축복의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연상하게 한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 지상에서 부동산이 증식된다는 뜻이 아니라, 첫 번째 축복과 비슷한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 온유한 자들, 곧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를 약속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는 지금 억압당하고 비천해진 자들이 쫓겨 다니지 않고 자신의 땅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을 것이다(미 4:4). 한편 예수는 스스로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선언하였으며(마 11:29), 예루살렘 성전 입성에 나귀를 타는 예수의 모습은 겸손한(온유한) 왕에 대한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한다

(마 21:5; 슥 9:9). 비폭력적인 구원과 평화의 왕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다른 길, 즉 하나님에 의해서 훈련된 온유와 겸손의 길로 인도된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마태복음에서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뜻하기도 하지만(마 6:33), 주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행하는 올바른 행위나인간이 지녀야 하는 상태를 뜻한다(마 5:10-12;5:20;6:1;7:21-23;참조. 마 3:8;21:32). 세상의 악과 불의 속에서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은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에서 하나님이 종말에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며 풍성한 만족을 맛보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종교의식보다 중요한 것은 긍휼, 곧 자비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며 호세아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고(마9:13;호 6:6;마 12:7),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린 지도자들을 비판한다(마 23:23). 자비로운 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게 된다(눅 6:36).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다는 비유에서 팔복의 다섯 번째 축복은 이야기로 구체화된다(마 25:31-46).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마음이 깨끗한 자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그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한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완전한 교제를 누리는 종말론적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전 13:12;계22:4).

 

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받을 것임이요”(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의 헬라어 원어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을 뜻한다. ‘평화’를 뜻하는 헬라어 ‘에이레네’의 구약 원어인 히브리어 ‘샬롬’은 전쟁과 갈등이 없는소극적 평화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등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수립되는 적극적 평화를 가리킨다. ‘샬롬’은 정의로운 평화인 것이다. 헌신적으로 정의로운 평화를 ‘만드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질 것이다. 이 구절의 ‘하나님의 아들(복수)’이라는 직역은 적대적인 갈등과 반목을 자신의 십자가로 허무시고 평화를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단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엡 2:14). 한편, 남성명사를 총칭명사로 사용해서 남녀 모두를 가리키기도 하는 헬라어의 특성을 감안해서 ‘아들’을 ‘자녀’로의역하는 경우도 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의,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삶을 살다가 핍박을 받은 자에게 축복과 위로를 선포한다. ‘박해를 받은 자’라는 표현은 완료분사인데 박해가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뜻한다(마 5:11-12). 의를 추구하는 것이 산상설교의 지상목표이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는 제자직의 가장 숭고한 시금석이 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를 위한 축복은 팔복의 마지막 정점이다. 이 구절은 첫 번째 복과 동일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선언으로 마감하는데, 이러한 수미상관법은 팔복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주면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와 앞에서 쭉 언급한 축복 받는 자들을 하나의 범주로 통합시켜 준다.

 

9)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3~10절의 팔복은 축복의 대상자들을 삼인칭으로 서술하였는데, 11~12절의 말씀은 독자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서는 힘을 지닌 이인칭을 사용한다. 전후 문맥상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과 ‘예수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것’이 동일한 일이 된다. 예수를 따르며 핍박받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핍박받았던 선지자들과 같은 반열이 되는데, 이는 곧 예수를 따르는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준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므로 제자들은 고난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행 5:41).

 

3. 맺는 말

제자의 삶은 주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하는데 그 응답은 제자다운 순종,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실천에서 표현된다(마 7:13-14;21-27). 아브라함의 삶에서나 팔복에는 이러한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존하는 복음을 선포한 사도 바울도 값비싼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자 거룩한 부담을 기꺼이 짊어지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는삶을 살았다(고전 15:10; 고후 6:1; 빌 1:29; 4:4).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 폐회예배에서 남아공의 성공회 사제인 마이클 랩슬리(Michael Lapsley)가 설교를 하였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공의 인종격리 정책)에 저항하는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하다가 폭탄테러에 의해 두 손과 한쪽 눈을 잃은 후, 자신의 깊은 상흔의 경험에 의거해,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한 치유와 화해의 사도로 헌신하고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그가 소개한 기도문은 네 가지 축복을 간구한다. 이 기도문은 부산총회에서 ‘정의와 평화의 순례’를 함께 걸어가기로 결단한 한국과

세계의 교회를 위한 현대판 팔복과도 같다고 느껴진다. 그 기도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불편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손쉬운 답변들, 반쪽 진실들, 그리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당신이 담대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분노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불의, 억압, 착취에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당신이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해

피곤을 모르고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눈물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통, 거부, 굶주림, 혹은 소중한 것들의 상실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흘리는 눈물로

당신이 손을 뻗쳐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리석음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의 축복을 받아서

남들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아멘.

 

 

주제의 교회사적 이해 안교성 목사

 

1. 서론

기독교의 메시지는 복음으로 요약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구약에도 나타나지만, 특히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원어에 의하면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보다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이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복음은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복음의 의미는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로 압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보여 주는 복음서, 나아가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 전반 등을 가리키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기독교의 전파가 복음의 전달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복음은 전도, 복음화 등의 의미로 연계되고 확장되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태도에 따라 복음주의라는 운동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복음은 영원하지만, 복음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뤄졌다. 다시 말해 기독교가 발전하고 전파되는 가운데 다양한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 있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은 재해석되고 깊고도 넓은 뜻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교회사에 나타난 도전과 응전은 무엇이었고,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복음을 재발견하고 재헌신하였을까? 본 단원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로, 초대교회의 종족화와 세속화, 중세교회의 계층화와 우민화, 근현대교회의 주변화, 파편화, 자멸화 등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2. 교회사에 나타난 도전과 응전:복음의 재발견과 재헌신

 

1) 종족화와 복음의 재발견:바울(서기전 4-313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독교 공인)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지만 유대인의 민족종교에 머물지 않고 만인을위한 세계종교로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고,자유인도 노예도 없고,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민족종교에서 세계종교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장애에 부닥쳤는데,대표적인 것이 종교 외적으로는 유대주의요, 종교 내적으로는 율법주의였다. 다시 말해 복음은 만인을 위한 은혜의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로 인하여유대교의 틀 안에 갇힐 염려가 있었고, 율법주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비로운은혜 대신 인간의 종교성에 친숙한 율법으로 환원될 염려가 있었다. 한마디로이 두 가지는 기독교의 퇴행을 가져오려고 했다.이런 거센 도전들에 맞서, 특히 유대주의에 맞서, 기독교의 세계화를 가져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바울(바울의 선교여행, 45-64년)이다. 바울은 그의 신학과 사역 양면을 통하여, 기독교를 명실상부한 세계종교로 만들었다. 신학을 통해서는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극복하였고, 사역을 통해서는 당시전 세계로 알려진 지중해 전역을 휩쓸고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만일 초대교회가 세계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독교가 세계화에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당당하게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그런데 세계화의 문제는 초대교회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반복되었다. 가령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 서방교회 내의 교파 출현, 종교전쟁 등은 종족, 인종, 민족주의 등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근현대선교운동을 통하여

기독교가 전 세계의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세계화의 문제가 거듭 드러났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자기들의 신앙방식대로 전달하고 이식하려고 함으로써, 지역기독교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한 현상이 나타났다. 즉, 서구선교사들이 서구기독교를 유일한 표준처럼 고집하였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도 선교에 있어서 지나친 한국화 현상을 보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 세속화와 복음의 재발견:상향적 수도원, 베네딕트(313-590년, 기독교공인-그레고리우스 I세 즉위)

기독교는 초대교회 시대에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화(밀라노 칙령, 313년)를 통하여 핍박받던 소수에서 주류 종교, 나아가 유일한 국가종교로 변모하였다. 이런 과정은 장점도 있었고 단점도 있었다. 그런 단점들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속화였다. 다시 말해 종교의 외면은 비대해지는 반면 종교의 내면은 궁핍해 가는 현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전자에 만족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후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수도원운동이었다. 물론 진정한 종교에 대한 열망과 그로 인한 수도원운동은 이미 초대교회 초기부터 나타났지만, 그것이 자연발생적이고 개인적인 형태에서 조직적이고 공동체적인 형태로 발전한것은 베네딕트수도원(수도원 설립, 529년경)을 들 수 있다. 즉, 소위 공동생활 수도원(cenobitic monastery)의 출현이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상향성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종교를 구하면서 하나님 과의 관계에 주목하였는데, 이것은 위를 향한 상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수도원이 상향성만 있고, 수평성이나 하향성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된 방향은 상향성이라는 이야기이다. 상향적 수도원 안에도 다양한변이가 있었으며, 이런 상향적 영성은 상향적 수도원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사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가령 개신교 안에서는 공동체회론 혹은 ‘완전한 교회’(ecclesia perfecta)론을 주창한 메노나이트파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이런 공동체교회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에 따라 메노나이트파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대한 칼뱅의 비판도 주목할만하지만, 이 자리에서 언급할 수는 없고, 다만 경건에 대한 관심이 복음의 재발견을 가져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3) 계층화와 복음의 재발견:하향적 수도원, 프란시스코(590-1517년, 그레고리우스 I세 즉위-종교개혁 발발)

기독교는 중세유럽에서 국가종교를 넘어서 기독교세계의 종교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교회는 그 스스로 사회의 지도층이 되었고, 교회의 관심도 주로 사회의 지도층에 쏠렸다. 즉, 교회의 계층은 사회의 계층과 닮은꼴이 되었으며,교회는 사회의 하위층에 대한 목회적 사명을 점차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였다.이런 맥락에서 중세기독교 내에서 사회의 하위층, 혹은 무식하고 가난한 대중 또는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계층에 대한 선교가 시작되었다. 한편으로는 말씀 전파를 위한 발도파(발도파운동의 시작, 1176년) 등의 운동이 나왔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운동으로 이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 실천을 위한 프란시스코수도원(「수도회칙」확립, 1209년) 등의 운동이 나왔는데, 이것은 탁발수도원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하향성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사랑과돌봄을 지향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하였는데, 이것을 아래를 향한 하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하향적 영성도 교회사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마더 테레사의 경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리고 최근 교황이 된 프란시스코 교황은 그동안 교황명으로 사용되지 않던 프란시스코라는 명칭을 굳이 자기의 교황명으로 선택했다. 그것은 이 시대에 프란시스코의 영성, 즉 가난과 나눔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회복될 수 있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결단이었다.

개신교 내에서도, 칼뱅(제네바 사역, 1536-1538년, 1541-1564년)의 복지제도 설치 및 집사직의 회복, 기독교사회주의 및 사회복음운동 등 다양한 노력이시도되었다. 한국교회 내에서도 하향적 영성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해방후의 경우만 들어도, 산업선교, 민주화운동 등의 굵직한 흐름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다문화사회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개신교의 하향적 영성을 대중화한 인물로는 다일공동체를 지도하는 최일도 목사를 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의 핵심적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이상, 이웃 사랑은 너무도 중요한 복음의 일부이다. 이웃 사랑을 지향하는 일이벌어질 때, 복음의 재발견과 재헌신이 일어나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회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된다.

 

4) 우민화와 복음의 재발견:루터, 칼뱅(1517-1799년, 종교개혁 발발-슐라이어마허 「종교론」발간)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중세의 대중 혹은 민중은 가난할 뿐 아니라 무식했다.그리고 중세기독교 특히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우민화 정책을 썼다. 대표적인 것이 예배와 설교의 변질이었다. 물론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를 통하여 쇄신하였고, 지속적인 쇄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운동은 말씀의 중요성을 통하여 기독교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즉, 종교개혁운동은 갇혀 있던 말씀을 자유케 하였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시 인간들이 참자유인이 되었다. 종교개혁가들, 특히 루터(95개 조항 게시, 1517년)는 르네상스운동의 학문적 방법인 ‘근원으로 돌아가라’(Ad Fontes)는 모토에 따라, 성경 원어 연구를 통하여 복음을 재발견하고 회복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해, 직접적인 성경의 연구와 번역, 성경을 전달하는 설교의 강조, 그리고 복음에 기초한 교리와 실천의 재구성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성경은 특정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에게 열린 책이 되었고, 누구나 하나님과 신앙양심 앞에서 바른 신앙을 선택하고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면에서 오늘날 인권이 종교자유를 위한 권리 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복음을 재발견한 종교개혁운동이 복음을 나누는 선교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초창기에는 내부 정비를 위하여 유럽복음화에 머물렀지만, 점차 세계선교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기독교도 성경을 읽고 사랑하고 실천했던 성경기독교였다.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선교의 문이 닫혔던 때부터, 한국인들은 이미 해외에서 성경 번역에 참여하거나 직접 나섰고, 그 성경을 반포하였고, 성경, 쪽복음, 전도문서 등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해 나갔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와세계선교에 헌신하는 전도기독교가 되었던 것이다.

 

5) 주변화와 복음의 재발견:슐라이어마허, 복음주의, 바르트(1799-1910년,슐라이어마허 「종교론」발간-에딘버러세계선교대회)

기독교가 중세시대에는 유럽의 지도자였고, 종교개혁운동시대에는 유럽의 새로운 변화를 초래한 변혁세력이었다면, 계몽주의운동(17세기 중반 혹은 18세기초-18세기 말 혹은 19세기 초)을 필두로 한 근현대의 시작과 더불어 점차 유럽의 변두리로 내몰렸다. 더 이상 종교적 진리가 아닌 이성을 합리화의 기초로 삼으려는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유럽사회에서 기독교는 변화된 위상에 따라, 새로운 자리매김에 나서야 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 변증학의 새로운 필요가 나타났던 것이다. 즉, 기독교 변증학은 초대교회에는 박해와 이단에 맞서 크게 발전하였고, 중세교회에는 교회 내적인 이해를 위한 기독교신학이 주를 이룸에 따라 그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다가, 근대교회에는 신앙과 신학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비학문적이라는 취급을 받음에 따라 존재이유를 입증하는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이런 맥락에서,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사회와 대화하자는 자유주의신학이나왔고, 슐라이어마허가 그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와 거리를 두면서 복음 자체를 강조하는 복음주의신학이 나왔는데, 복음주의운동(복음주의연맹 결성, 1846년)이라고 하는 광범위하면서도 다소 규정하기 어려운 운동이 대표적인 흐름이다. 그리고 양자 가운데서, 학문적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강조하려는 신정통주의도 나타났는데, 칼 바르트(「로마서주석」초판 발행, 1919년)가 대표적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신앙과 신학이 보수적인 성향이 강함에 따라, 자유주의신학을 금기시하고, 심지어 서구에서는 보수신학자로 분류되는 칼 바르트마저 신신학자로 여겨지는 형편이지만, 왜 이런 자유주의신학과 신정통주의신학 등의 신학운동이 나왔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최근 들어 몇 가지 위기에 봉착해 있고, 이에 대하여 응전 중이다. 가령 기독교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해서는 기독교문화선교운동 등이 나서고 있다.기독교의 비윤리성에 대해서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이 나서고 있다. 안티기독교운동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외래성과 편협성을 비난하는 목소리에 제대로 응답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런 운동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주변화를 극복하려는 신학적, 실천적 노력이 요청된다.

 

6) 파편화와 복음의 재발견:에큐메니칼운동(1910-1990년, 에딘버러세계선교대회-JPIC 세계대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처럼 하나의 교회로 출발하였고, 또한 하나의교회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교회사는 막상 이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 왔다. 따라서 교회사는 교회분열사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교회의 분열이 그 불가피성이 인정되고, 나아가 당연시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근현대선교 운동을 통하여 교파주의가 선교를 통하여 선교지에서 재생산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교파난립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과정에서, 선교지에서부터 선교협력의 필요성에 따라 시작된 교회협력 혹은 교회연합의 운동들이 점차 교회일치운동, 즉 에큐메니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교회협의회(세계교회협의회 결성, 1948년)이다. 이것은 복음의 재발견이요,따라서 제2의 종교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 될 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즉, 교회, 일치, 선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는 교회일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에 대하여 헌신하고있다. 한국교회도 한때는 교회분열이 교회성장을 가져온다는 억지를 부렸지만,오늘날 한국인들은 이런 파편화된 한국개신교회를 저버리고 있다. 즉,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개신교인들조차 교회분열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더구나 한국은 특히 분열이 심한 사회이다. 식민사관이 주장한 한국의 당파성이란 담론에 동조할 필요는 없지만, 한국은 오늘날 남북갈등, 남남갈등 등 각종 갈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이런 한국사회의 화해자가 될 교회가 과연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해 보인다.

 

7) 자멸화와 복음의 재발견: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 신학(1990년-이후, JPIC 세계대회-그 이후)

한때 세상은 세계종말을 염려하면서,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종교에 귀의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는 굳이 신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 스스로세계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아니 그럴 가능성이 너무도 커져 버린 시대에 살고있다. 즉, 이제 종말은 심판보다 자멸의 성격이 더 커졌다.이런 맥락에서, 교회 특히 에큐메니칼신학은 정의, 평화, 환경 혹은 생명의중요성과 연관성을 강조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신학’을 제기하였다.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신학이 나타나고 발전한 곳이 바로 한국이라는 것이다.1989년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가 이 신학을 주제 중의 하나로 삼아 개최된 곳이한국이었고, 이듬해인 1990년 세계교회협의회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세계대회가 개최된 곳이 한국이었고, 지난해인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된 곳이 한국이었다. 그것은 한국이 사회갈등, 분단, 환경파괴와 같은 정의, 평화, 생명의 문제가 집약된 곳이고, 따라서 문제해결도 바로 한국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과 한국교회의 현실인식과 실천은 어떤 수준인가한국기독교를 포함한 세계기독교는 오늘날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들답게 창조의보호자, 창조의 섬김이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요청받고 있다.

 

3. 결론

우리는 이상에서 종족화, 세속화, 계층화, 우민화, 주변화, 파편화, 자멸화 등의 도전과 이에 대한 교회의 응전을 살펴보았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도전들에 맞서, 교회는 실패도 하였지만 재기의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믿음,사랑, 소망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믿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할 뿐 아니라, 소망을 제시하고 그 스스로 소망의 표징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세상을 향해 부름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재발견과 재헌신에서 가능한 것이다.

 

 

주제의 선교적 이해 조재호 목사

 

선교적 삶을 위한 접근

 

1. 서론

제99회 총회주제인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마 5:3-12, 창 12:1-3)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로 믿는 사람들로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은 얼마나 복음의 진리를 자신의 삶에 내재시키고 동시에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의 한국사회는 교회를 향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그만큼 영적인 공동체로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복음을 사회 속에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활동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삶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로선포하는 동시에 그의 행동과 삶을 통해 구체화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보여 주신 것이다. 배고프고 소외된 사람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상처 나고 병든 사람들, 목마르고 주린 사람들에게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되셨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본질과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증거의 사명을 상실한 채 겁에 질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의 삶(창 12:1-3)

창세기 12:1~3은 아브라함 소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본문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 바로 등장하는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몇가지 조항이 나온다. 첫째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도록 지시하셨다. 자신의 삶의 토양과 생명의 비밀이 숨 쉬고 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사실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생명이 보장될 수 없는 떠남이다. 당시에 ‘갈대아 우르’는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요, 최고의 도시가 건설된 지역으로 안정과 평안의기반이 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떠난 자리에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근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 하나님의 복 주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신탁의 말씀을 주셨다. 셋째는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족속’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단어이다. 또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본적인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단어이다.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은 열방을 위한 것이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선교학자 아서 글라서(Arthur F. Glasser)에 의하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계획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바벨 땅의 나이 많고 자식 없는 부부를 보시고, 그들을 우주적 구속이라는 그분의 선교 전체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결정하셨다. 뱀에 의해 유혹을 받고 하나님의 창조적 아름다움에 역행하여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준 아담의 가정, 그 영향으로 인해 온 세상에 죄가 관영하고 하나님의 창조적 가치를 드러내어야 할 모든 피조 세계가 망가져,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판결을 피할수 없는 상황 아래서 선택 받은 우주적 구속의 선교적 도구였다. 또한 그를 부르신 것은 인간의 약함, 나라 간의 분쟁, 그분의 피조물 전체가 망가져 신음하는것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 백성의 선교의 시작이었다.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 자신에서 머물지 않고 열방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의 삶이 있다.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교만을 드러낸 백성들을 온 열방으로 흩으셨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을 성취하신다. 그것은 열방이 복을 받는 것이다. 얼핏 보면 아브라함 가정을 제외한 모든 열방의 사람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한 사람, 한 가족, 아브라함에게만 집중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만 구원을 받고 축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축복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전하는대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교적 의도가 담겨져 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은 결국 열방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선교적 예표를 담고 있다. 달리 말하면 한 사람을 선택함은 나머지를 거부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을 위한 선택인 셈이다. 또한 한 사람에게 허락한 복은 나머지를 거부함이 아니라 마침내 그들 또한 복의 수혜자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명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이다. 아브라함의 삶처럼 모든 민족과 열방이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신들을 통해 복을 얻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과 믿음으로 응답하는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차원 -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이웃과의 관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 - 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복음으로 사는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다. 동시에 삶의 증언과 실천을 통해 복음이 공적인 진리로 들려지도록 선교 명령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즉,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행 1:8)이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교적 공동체로 부르신 목적이여기에 있다.나아가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반응함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주께로 돌아오도록 교회는 온전한 선교적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공의와 성자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기 위해 말과 행위로 증언하고 살아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진정으로 선포되는 동시에 실천될 때, 복음은 믿고 들을 만한 진리, 공적 진리로 살아 있게 될 것이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의 교육적 이해 박화경 목사

 

1. 시작하는 말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고 답했다. “왜 좋은 소식인가” 다시 물었더니 “구원받아서”, “천국 가니까”라고 대답했고 더 이상 답하지 못했다. 신학생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 보았지만 그 이상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복음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이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이 기독교 복음의 심오하고 폭넓은 차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복음의 감격과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올해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정하여, 복음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복음에 입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글은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대한 교육적 접근으로서 교회가 이 주제를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에 대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고자한다.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교육내용과 방법, 둘째, 복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교육내용과 방법, 마지막으로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육내용과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2.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주제를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1) 복음에 대한 깊고 폭넓은 지식

복음이란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질고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는 크나큰 기쁨의 소식이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먼저 구원자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예수께서 만드신 복음의 기쁜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구원자 예수께서 하신 일은 어떤 일이었기에 그토록 기쁜 소식인가? 첫째,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죄와 죄책감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멍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고후 5:19)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대속물로 이땅에 오셨다(막 10:45)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죄인으로 간주되고, 부활하신 그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이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이다(롬 1:17). 복음은 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복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기쁜소식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죽으심으로 아버지는 세상과 화해했고, 죄 많은 인간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셨는데 아바(Abba)는 아람어로 아빠라는 말로서 하나님께 느끼셨던 내적 친밀감을 나타낸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10-11)는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너무나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에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렀다.1)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 속으로 영입되어 하나님의 자녀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너희는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해하고, 예수처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예수와 같은 친밀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처럼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신다. 예수를 돌보시고 인도하여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돌보시고 인도하여 주시며 자녀들의 삶을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쁜 소식이다.

 

셋째, 복음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기쁨의 소식인 것은 부활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있게 될 일을 친히 보여 주셨고,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와 약속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비록 우리의 삶은 병들고 약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날 수 없지만 부활을 바라며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죽음의 운명에 굴복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죽음의 힘을 극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2) 사멸하고 허무한 삶을 목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바라며 그 나라의 가치에 입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넷째, 예수의 복음은 영혼뿐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실제적인 삶에서의 구원이기에 더욱 더 기쁜 소식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이렇게 설명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이 선포처럼 예수께서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고치시며, 해방시키시고, 상한 마음을 치료하셨다. 예수를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현실적인 억압에서 해방되고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은 엄청나게 기쁜 소식이다.

 

다섯째, 예수의 복음에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역사적 맥락의 기쁜 소식이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신다. 은혜의 해란 희년으로 50년째 되는 해에 저마다 소유지를 다시 찾아 자기가족에게로 돌아가고, 부채가 면제되고, 부채로 인한 노예 신분이 폐기되는 자유의 해요 은혜의 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활동에서는 희년의 모습들 이 나타난다. 노예 된 자의 멍에를 풀어 주고, 가난에서 해방되고, 불의한 것을 바르게 하고, 눈물을 없애는 사회적 기쁨의 해가 예수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예수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약속이기에 말할 수 없이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내용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설교나 강의가 가장 용이하지만 강의나 설교에 다른 교육방법을 접목하면 더 효과적이다. 루터는 요리문답을 만들고 난 뒤에 매 주일 한 항목씩 설교하고 질의응답을 받은 후에 암송하게 했다. 복음에 대한 설교와 함께 주일학교나 구역예배에서 이 내용을 심화하거나 가정예배에서 나누는 것도 복음

의 가르침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도록 만든다. 특히 어린이에게는 반복교육이필요하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청년이나 성인들에게는 복음의 의미를 깨닫기위해 성서연구나 복음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 예를들면, 오순절주의 신학, 해방신학, 생명신학은 복음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오순절주의 신학은 오늘날 가난과 질병의 문제에 대해 복음을 통한 답을찾았고, 해방신학은 구조화된 사회질서에 대해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것을 찾아 실천하고자 했던 신학운동이었으며, 생명신학은 오늘날 생명경시현상에 대해복음이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조명하고 그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신학운동이다.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연구함으로 복음의 깊고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강의, 연구, 토론,발표 등과 같은 복음에 대한 지적인 공부와 함께 형상화의 작업이 뒷받침되면 교육의 효과가 상승된다. “이미지는 개념을 앞서기 때문이다.”3) 복음의 기쁨을맛볼 수 있는 축제와 놀이, 복음을 나타내는 상징물의 발견과 사용, 복음을 형상화하는 만들기와 전시 등과 같은 우뇌적 활동과 결합하면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가르칠 수 있다. 발트 윙크가 제시한 대로 분석, 연구, 토론과 같은 좌뇌적인공부와 함께 우뇌적 활동인 만들기, 글쓰기, 그리기, 시 쓰기, 노래 지어 부르기등의 예술적 방법을 결합하는 것이 좋다.4) 영상매체나 찬양과 경배는 복음을 가르치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많은 교회들이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2) 복음의 삶

복음에 대한 지식과 함께 복음은 삶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복음의 삶이란 구원자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이다.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은 이전에 가졌던 정체성과 삶의 스타일을 버리고, 예수의 복음에 비추어 새롭게 정체성을 만들고 또한 복음에 입각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것이다. 이런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 기도로 나타난다.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은 구원의 주체가 주님인 것을믿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하고, 기도를 통해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고, 기도를 통해 필요한 것을 구하며 공급받는다.

둘째, 복음의 삶은 기쁨의 삶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죄와 죽음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간다.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용기를 잃지 않는다. 따라서 기쁨이 없는 사람은 복음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셋째, 사귐과 나눔의 삶을 살아간다. 변화된 자아정체성과 가치로 인해더 이상 자신의 껍질에 갇혀 있지 않는다. 이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코이노니아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더 가지고 싶은 욕구를 조절하고 자신의 가진것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게 된다. 넷째, 생동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복음의 삶이라고 어려움이 없는 삶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을당하고 죽음의 힘이 그를 짓눌러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며 죽음의 힘 한가운데서도 생동감 있게 살아간다. 다섯째,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로서 전하는 것은 물론 삶으로 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의 삶을 살도록 교육할 수 있을까? 복음과 개인의 삶의관련성을 찾도록 하고 복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위해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해석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복음의 시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복음과 적절한지 점검하고, 변화시켜 가야 한다. 이를 위한 교육방법으로는 이야기의 활용이 효과적이다.5) 이야기는 그 이야기에 공감할 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성서와 교회의 역사와 오늘의 기독교 공동체에는 복음의 삶을 살아간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해석과 사례연구를 통해 자신의 삶과 관련성을 찾게 한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읽고, 보고, 분석하고, 나누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복음과 자신의 삶과의 연관성을 찾고 복음을 통해 삶의 문제에 대한답을 찾도록 해야 한다. 셀, 목장, 구역 등의 작은 그룹의 모임 또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성경공부 모임이나 수련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생애를 성찰하기, 자서전 쓰기, 복음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발표하기 등이다. 또한 복음의 삶은 같은 세대들만 참여하는 교육보다는 다양한 세대들이 교류하는 과정에서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특히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에서 윗세대의 복음의 삶은 모델링이되고, 알게 모르게 복음의 가치와 삶의 스타일을 습득하게 만든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하는 공동학습, 수련회, 공동체에서의 경험과 활동이 복음의 삶을 전달하는 통로가 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복음과 하나님 나라 건설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종말에 완성될 나라이지만 이 나라는 예수의 선포와 사역을 통해 흑암이 깊은 이 세계 속으로 뚫고 들어왔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 치유, 죄 사함,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보이셨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씨앗이었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뒤따라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성령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을 죽음과 파괴로 몰아넣는 사탄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과 세상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사탄의 전쟁터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사탄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복음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과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을 담당해야 하는가? 매우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먼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서 봉사함으로 지역주민의 아픔에 동참하여그들의 짐을 덜어 줌으로 교회는 지역사회 안에서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6) 나아가 지역사회를 넘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병자를 고치고, 소외된 자를 이끌어 주신 것은 세상속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다. 예수를 뒤따라 작은 자들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둘째, 평화와 정의를 만들고 창조세계를 보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의 나라이며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다. 정의와 평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 또한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동산이며,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정의를 만들고, 창조의 보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사 11:2)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확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모든 사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7) 호세아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악이 들끓고 망하게 되었다(호 4:1-6)고 한탄하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사탄의 통치는 쉽게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오스머(R. Osmer)가 지적하듯이 오늘 교회 안에서 성서와 신학을 모르는 기독교 문맹들이 자라고 있다.8) 복음에 대한 심도 있는 성서연구와 신학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강화되어야 한다.

 

넷째, 기독교 문화 창출이다. 오늘날 문화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가치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배금주의와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 문화가 주도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문화를 선도하여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이 땅에 자라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란 생명의 문화요, 사귐과 나눔의 문화이다. 돈보다는 생명을 중요시하고,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를 넘어서 온 세상 사람들과 연대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공존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한 교육방법으로는 하나님 나라복음의 빛 아래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조명하고 분석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담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개인의 소명이 무엇인지 찾는 소명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직업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직업을 수행하는 시간이 가장 많고,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가지고, 직업을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라는 것도 교육해야 한다. 청지기 정신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그것을 관리하도록 맡기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재산을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재산뿐 아니라 재능이나 자녀, 시간, 자신의 몸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절하게 사용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것이 좋다. 20세기에 한국 기독교가 급성장한 것은 근대사에 교회의 공헌이많았고, 이로 인해 기독교가 사회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개화, 독립운동,병원과 학교 세우기, 야학, 한글교육, 구제, 민주화 등 사회역사적 문제들을 교회가 앞서 해결했기 때문에 교회를 앞서가는 정신의 상징으로 생각했고, 지성인들과 청년들이 교회로 들어왔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 나라 건설로 이어지도록 지역사회, 세계, 창조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빛에 비추어 해결되어야할 문제들을 찾아내고 대안을 모색해 본다. 즉, 사회, 역사, 문화(미디어) 분석과 비평 및 기독교적 대안 찾기와 실천, 평신도 소명 이해와 개발, 직업을 통해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모색하고 실천하기 등이다. 실천을 위해 교회가 봉사를 위한 상설기관이나 잠정적 기구를 설치할 수 있다. 더 쉬운 방법으로는 개인별, 가족 단위, 교회 단위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봉사에 참여하거나 이런 일을 하는 단체들과 연대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교회학교나 교회에 존재

하는 다양한 조직을 활용할 수도 있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그룹들을 만들어도된다. 교회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논의하고구체화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것도 좋다.9)

 

3. 맺는 말

기독교 복음에는 인간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인간과 세상은 언제나 죄로 물들어 있고, 심각하게 부패할 수 있는 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복음이 없으면 사람은 병들고 세상은 부패하게 된다. 교회는 복음과 복음의 능력을 가르치고, 복음의 능력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복음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할 사명이 있다. 기독교교육은 각 세대의 발달특성에 맞추어 복음의 깊고 심오한 의미를 가르치고, 복음이 삶으로 구체화되도록 이끌어 주며,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세상 속에 복음의 능력을 전하고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주제의 사회 윤리적 이해 임성빈 목사

 

1.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사회 앞에 선 한국교회 찬란한 기독교 문명을 자랑하던 서구사회가 탈종교사회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회는 어떠한 상황에 있는가? 후기산업사회, 정보화사회, 지구촌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대판 적자생존의 시대에서 기독교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고귀한 가치는 과연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종교개혁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전쟁으로 인해 서구의 지식인들이 종교에 대한 회의를 품고 인본주의적인 계몽주의를 전파하는 데 선봉에 선 것처럼,오늘날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종교 비판을 서슴지 않아 한국사회 안에서 종교에 대한 불신감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이 종교를 혐오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들은 종교를 사사로운 것으로 폄하하고 사회 갈등과 분열의 주범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인간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선택을 편협하게 하고, 인간이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책임 있게 수행하는 데에 방해가 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사실 책임 있는 선택은 선택하는 주체의 가치관에서 비롯되는데, 이때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가 지닌 신념체계와 깊은 연관을 맺고 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각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얼마나 초월성(transcendence)과 통전성(integrity)과 보편성(universality)을 갖추고 있느냐”이다. 이러한 신념체계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유물론이라는 신념체계를 지닌 사람과 초월적인 신앙을 지닌 사람이 세계를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신뢰와 충성의 대상도달라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신념체계, 즉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의 선택과 결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아직도 우리가 신앙에 대하여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소위 ‘탈종교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가진 신념체계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선택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선택은 일종의 ‘신앙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신앙의 대상이 다르고, 이에 따라 결정과 판단의근거가 다를 뿐이다. 아무리 종교적인 신을 부정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어떤이들은 물질을 축적함으로써, 혹은 명예를 추구함으로써 세속적 힘(power)을숭배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쾌락을,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자율적인 뜻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다시한 번 이 세계에 도전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신뢰하고 충성하는 대상이 어떤분이시며, 그분에 대한 신앙이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초월성(transcendence)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초월성을 깨닫는 것은 이 세계 내의 어떠한 유한한 것도 우리의 진정한 신뢰와 충성의 대상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보이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욕망을 투사하는 그 어떤 대상도, 혹은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그 어떤 것들도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라는 배타성(exclusiveness)에 기초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 외에 어떤 개인이나 기관도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존재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킬 수 없다는, 포용성(inclusiveness)과 보편성(universality)도 포괄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다른 존재를 긍정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은, 우리 신앙의 영역을 새롭게 규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펼쳐지는 극장’인 자연을 포함하여 온 피조세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북적이는 세계 안에서 고백과 실천의 열매를 맺는다.

 

2.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이며, 동시에 세속적 가치관에 대하여 근본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초월성과 보편성을 유지하시면서도 유한한 우리 인간들과 역사적 관계를 가져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반사상과 이념들 속에서도 신념의 체계 및 그에 대한 신뢰와 충성으로서의 신앙(‘faith in God’)을 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이 전하며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신뢰하고 헌신하는 하나님(God of faith)10)께 우리의 관심을 집중한다. 우리 신앙의 대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이 막연히 설정해 놓은 미지의 이념이나 이상(ideal)이 아니다.

이러한 복음적 신앙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부르심으로부터 출발한다(창 12:1-3). 신앙은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전인적인 응답이며, 그 응답의 장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일 뿐 아니라 전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곧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격하여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면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을 의미한다. 사실 “성서 어디에서도 신앙과 삶의 태도(behavior)를 구분하지 않는다.”11) 그러므로 기독인에게 있어서의 신앙적 삶이란 곧 윤리적 삶을 의미한다.우리가 복음적인 삶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반성하고, 점검하며, 계획함으로써 삶의 자리에서 보다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려는 노력”이라 정의한다면,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토대는 성경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이자 인간의 응답에 대한 결정적 자료이기 때문이다.그러나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어 주신 우리 인간의 이성, 감성, 의지 등의 전인적 판단능력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제반 학문의 분야에서 얻어지는 축적된 지식들도 우리가 복음적인 삶을 실천함에 있어서 배제할 수 없는 주요한 참고 자료들이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역사의 주관자 되심, 궁극적인 구원자 되심을 생각한다면, 자연도 우리 인간이 거하는 삶의 자리로서의 주요한 복음적 삶의 실천 대상이자 우주공동체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3.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한 우리의 과제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더욱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욱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 복음은 모든 영역에서 창조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그렇기에 복음에 따르는 신앙이란 바로 ‘책임’(responsibility)을 의미한다.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책임의 영역과 책임의 강도를 드러낸다.매 순간 순간의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게 하고우리를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항상 나의 생각보다 크신 분임을 깨달으며 종전에 가지고 있던 편견에서 비롯되는 온갖 우상들을 부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먼저 우리 안의 우상을 타파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회개는 우리를 이웃 중심의 삶으로 인도한다. 회개하기 전에는 원수였던 사람이 혹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이, 우리 아버지의 또 다른 자녀라는 점, 즉 나의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렇게 나의 이웃의 수는 증가한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하는 모든 세상이 내 이웃이 된다. 이는 비단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자연이 내 이웃이다. 이렇게 우리의 하나님에대한 신앙은 우리의 책임의 영역을 전우주적으로 확장시킨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먼저 삶의 현장에서 내게 부딪혀 오는 사건들을 잘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사건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고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해석에 있어서 보다 결정적인 요소는 해석자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다. 이 준거틀은 사실 해석자와 그 해석자가 속한 경험공동체의 이전 경험들에서 비롯되는 전이해(pre-understanding)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적 신앙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상식적인 해석을 배제하지 않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을 무엇보다 존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이해가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해석을 기꺼이 청취하면서도, 이 사건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석되는가에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나타나는 필연적 다양성이 창조주, 역사의 주관자이시자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통전적인 신앙 안에서 통일성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통전적인 신앙은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영역은 무한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과 그에 대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농촌과 도시의 빈민지역에 대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지구 저편의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빈곤과 기아의 문제에 대해서도 응답(response)하도록 한다. 그러한 응답은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고난받는 이들이 나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형제요 자매라는 인식과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들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기를 원하신다는 해석(interpretation)에 의하여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아가 우리의 윤리적 응답은 나 자신을 중심으로 한 것이아닌 이웃들을 위한 삶의 계획과 결단을 모색한다는 의미에서 공적인 책임감(public accountability)을 가진다. 동시에 나의 이러한 계획과 결단이 사회윤

리적인 차원에서의 책임적인 윤리로 이어지기 위하여서는 항상 나와 다른 너(Thou)를 포함한 다른 사회 및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의 검증과 협력을 필요로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세상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는 필수적인 것이다.

요약하면, 복음적인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각자에게 삶의 해석과 반응을 추동하는 대상에 있어서 구별된다. 즉, 전자는 창조주, 구속주인 동시에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이 대상이 되지만 후자에서는 자신의 이념, 목표(편안한 삶, 안전한 삶, 남을 지배하는 삶) 등이 그 대상이 된다. 또한 “사건을 적절하게 해석하였으며 공적인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가, 사회적인 협력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복음적으로 산다는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 있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부조리와 무질서가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세계의 문제에 보다 더 책임 있게 반응할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우리의 결단

우리가 이제부터 더욱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은,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가 복음이 인도하는 하나님 나라에 더욱 온전히 참여할 수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꾸며(envisioning) 살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교회교육은 이전보다 더욱 성경 연구에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 공동체는 성경의 이야기(narrative)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치관과 인격이 형성되는 자리이며 우리의 신념체계를 보다 더 복음으로 견고하게 할 수 있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조는 결코 세상과 담을 쌓는 분파주의적인 시도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복음적인 삶을 이야기하면서확인하였듯이 복음적 삶으로의 결단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성서의 직접적인 증언을 기초로 성서에 담겨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데서 출발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문화적인 맥락과 일반계시로 주어진 여러 학문분야의 연구 성과들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제시하는 삶은 교회 안에서의 삶이나 개인의 윤리적인 삶으로 축소될 수 없다. 오히려 책임적인 삶이란 보다 공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 안에서 오고가는 의견들을 귀담아 들어야 하며, 지식정보사회의 수혜도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회와 시대를 읽고 현실 적합성이 있는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 세계화와 민족주의의 갈등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사는우리 한국인들에게,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정립해 줄 수 있는 것이있다. 바로 세계화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둘 수 있다는 것이며,민족주의가 ‘우상적이지 않은 자기 존중’(non-idolatrous self-esteem)에 기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은 화해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들의 대화와 협력도 가능하다. 물론 이와 함께, 아니 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이다. 사실 한국과 기독교는 상호배타적인 개념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다. 즉, 한국이라는 개별성(particularity)을 통하여 기독교라는 보편적인 진리(the universal truth)를 믿고 실천하는 이들이 한국 기독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이라는 개별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 한국 기독교회는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우리 문화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문화는 성경의 새로운 세계를 우리와 함께 경험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적합한 문화로 변혁되어야 할 것이다.

 

 

주제의 목회적 이해 박진석 목사

 

1. 들어가는 글

이번 총회주제의 가장 큰 초점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정립하고 재출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복음은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 가운데 행하시는 일에 대한 소식”이다. 복음, 복된 소식은 복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재창조, 회복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심판과 징계조차 하나님의 복된 역사를 위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무기력과 성도 가운데 만연한 패배의식의 중요한 원인은 복음이 아닌 다른 것들에 초점과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한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그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물론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죄성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관심은 우리로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해야 할 사명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한 복음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음에 대한 깨달음과 재발견 그리고 복음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없이는 사명의 실천은 감당할 수 있는 동력과바른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위기와 절망감이 더 커질지 모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믿음과 희망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시대적 도전과 과제가 더욱 크고 무거울수록 우리는 더욱 더 복음에 집중해야만 한다. 복음을 바로 깨닫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세상 속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위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복음의 의미

원래 복음이란 복된 소식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유(eu)의 좋다는 의미와 앙겔로스(angelos)의 천사의 의미를 가진 합성어이다.그래서 복음은 좋은 기별을 가져왔던 전달자에게 사용되었던 말이다. 제2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했다.이때 백성들은 그들의 포로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렸다. 그중에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돌아오는 포로들을 보면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자가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이다.18)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소식이 이 땅에 전해졌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된 것은 예수는이미 구약에서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약속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인간은 영원한 멸망과 하나님 앞에 설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은 멸망의 역사를 살아온 것이다.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활과 영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가 구원의 핵심이자 완성이라고 가르친다.19) 바로 이러한 내용은 죽음과 영생의 문

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고대 사람들에게 더없는 복음이 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구별하여 부르시고 창세기 12:2에서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일관되게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나서 독특한 명령을 주신다.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명령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명적 선언이다. 동시에 복을 주시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과 능력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복음이다. 이때 복은 히브리어로 ‘베라카’로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으로 의역하기도 했지만, 문자 그대로 복, 복 그 자체, 온전한 하나의 복이라는 원어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베라카의 원어적 의미를 우리 한국인들의 피부에 잘 와 닿는 단어로 표현한다면 ‘복덩이’라는 말일 것이다. “너는 복덩이가 될지라.” 이렇게 달리 표현해 본 복음의 선언은 우리 한국인들의 정서에 더 잘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사명적 선언, 이 복음의 약속은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여 믿음의 후손 된 신약의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명령이기도 하다. 즉, 복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복덩이’인 셈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복덩이니까 복덩이가 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복음의 사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복덩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복덩이 개념은 다분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신약의 마태복음 5:3~12에 나타나는 산상수훈의 팔복의 복 개념은 복에 대한 우선순위와 차원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님 나라 구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말씀은 더욱 종말론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영적인 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시급하고 우선적인 복임을 강조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내세적인 복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서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 원하시는 복은 오히려 전인적이요 통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의 우선순위와 핵심을 잘 붙들기만 한다면 복덩이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복에 대한 관심은 영적인 구원의 복으로부터 출발하여 얼마든지 현세적인 물질적인 복의 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 요한3서 2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복덩이 된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나누어야 할 복의 통전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복음의 성육신화 과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덩이가 되라는 이 사명적 선언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실천의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복음의 사명은 억지로 힘들게 감당해야만 하는 부담스러운 명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이치대로 그렇게 복음에 합당하게 살게 되는 당위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는 말이 씨가 된다는 표현을 한다. 복된 말씀인 복음은 하나님의 복을 담지한 영생의 씨앗이다. 씨앗을 땅에 심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나고 그 씨앗의 종류대로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면 정상적인 반응과 과정을 거치면 당연히 복음의 싹이 나고, 복음의 열매가 맺혀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억지로 노력하여 조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씨앗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말씀, 그 생명의 능력대로 당연하게 열매를 맺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을 그 영혼의 텃밭에 심은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으로 사는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만약 복음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심은 씨앗이 복음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아니면 복음을 심었어도 원수가 또는 복음아닌 다른 관심과 염려가 그 씨앗을 빼앗아 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당연하게 맺혀야 할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삶의 열매를 위해서라도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뿌려졌는지 먼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복음의 씨앗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는 복음의 핵심과 복음적 삶의 방향을 가장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이다. 특별히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가 복된 씨앗으로의 복음의 말씀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면 로마서 12장부터는 그 복음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성장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을 것인가 하는 복음의 실천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 복음의 씨앗을 그 영혼에 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덩어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통하여 네 단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헌신의 단계

구원의 복음을 그 영혼에 심은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 속에서 복덩이로서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이 세상은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 속에 보전되고 있기에 살 만한 면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분명히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상태에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창세기 3:17의 말씀은 세상의 근본이 되는 땅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와 같이 세상은 이제 전체로서 저주 덩어리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저주받은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예수님은 저주받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구원의 복덩이로 보냄을 받은 분이다. 저주 아래 놓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복덩이로서 예수님의 사명의 실천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헌신으로 시작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을 향한 동일한 하나님의 복덩이로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도 헌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헌신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덩어리로서의 세상으로부터 분리, 구별되어져 거룩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헌신은 세상에 대한 죽음, 즉 분리를 통하여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능케 한다. 로마서 12:1은 이 복음의 사명에의 헌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의 헌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이제 복음의 사명을 담당할 거룩한 산 제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린 모든 제물은 피 흘려 죽여서 드려졌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산 제물로 살아간다. 산 제물로서의 삶은 죄의 정욕에 대하여 날마다 죽는 삶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 것은 산 제물로서 하나님의 복덩이로 살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체험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2) 복음으로 마음과 생각을 조율함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몸의 헌신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성이 그 헌신된 몸 안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성도라고 하더라도 몸의 정욕을 따라 죄의 유혹이 계속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번 헌신된 몸이라고 하더라도 계속하여 그 몸의 제어장치라고 할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이 복음에 합당하게 조율되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2:2~3의 말씀은 복음의 사명에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과 생각이 순간순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에 조율되어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하나님의 복덩이로서의 사명을 실천할 수 있는 의의 병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교회 공동체를 통한 실천과 훈련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몸의 헌신과 함께 마음과 생각을 복음의 말씀에조율하고 나면 실제로 하나님의 복덩이로서의 삶을 연습해 볼 필요가 있다. 그복덩이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훈련 도장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서1:23은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떻게 만물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큰 복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흘려보냄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즉 더 큰 복덩어리를 이루기 위해 작은 복덩어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12:4~8의 말씀은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지체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7에서는 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체 된 그리스도인에게주어지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전체로서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서로 돕고 섬기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세상 속에서 큰복덩어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복덩이로서 서로 섬기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이 서로 돕고 섬기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의 복음의사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점점 훈련되어지는 것이다.

 

4) 세상 속에서의 실천과 훈련

로마서 12:9부터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복음의 사명 훈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더 크고 보편적인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복덩이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복된 관계를 통하여 가능해지는 일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온 세상의 저주의 본질은 관계의 저주인 것이다.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들이 전부 다 원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죄 많은 세상 속에서 이 관계의 저주를 풀려면 맺혔던 관계를 사랑으로 푸는 일이 필요하다. 이 관계의 저주를 푸는 하나님의 복덩이가 되려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될 때 원수의 저항과 반대에 부딪히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이라야 관계의 저주로 인하여 시달리는 세상 속에서 온전히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복덩이로 살기 위해 믿음으로 나설 때 원수 사탄은 영적으로 저주의 불화살을 쏨으로 방해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복덩이의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창세기 12:2~3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관계적 보호장치를 만들어 두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당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의 저주가 복음의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4. 큰 복덩이로서의 교회

복음으로 온전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그 당연한 결과로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큰 복덩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의 복덩이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교회 공동체

교회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 속에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있는 하나님의 복덩이로 양육하고 훈련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복음중심적이고 체계적인 양육과 훈련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2) 복의 능력이 임하는 예배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예배는 계속해서 드려져야 한다.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설교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하신 일,즉 복음이 설교되는 예배,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그리할 때 교회는 복음적 예배공동체로서 복음을 들은 예배자들을 축복의 통로로 세상에 파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여 큰 복덩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들은 확장된 교회로서, 작은 복덩이로서 세상으로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4) 복음 전파 사명의 중심성

교회 공동체는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다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그 모든 사역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명은 다름 아닌 복음 전파의 사명이다.눈물을 흘리면서도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 복음 전파 사명의 중심성,긴급성을 분명하게 인식한 다음에 다양한 사역들이 전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어떠한 사역이든 복음 전파의 기본 사명과 연계되어야 한다.

 

5. 주제에 대한 목회적 적용지침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에 대한 (일반)목회적 적용의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교육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다시금 확실하게 깨닫고 정리할 수 있도록 의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복음의 의식화가 단지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서 전인격과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도록 복음에 대한 반복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복음화, 재복음화, 복음의 성육신화를 강조하는 목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가정 가꾸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실제로 맛보고 실천하는 가장 복된 천국 공동체는 다름 아닌 가정이다. 오늘날 성도의 가정조차 관계의 저주 속에 고통하는 경우가많다. 목회적으로 복음으로 사는 성도의 가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고반복적으로 가르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

 

3) 교회 공동체 가꾸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속한 큰 복덩이로서의 교회를 가꾸어 가기 위해서 각자의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연약한 부분들, 또는 잘하고 있는 한두 가지 실천 영역을 주제와 관련된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실천 영역을 설정하여 집중적으로 공동체가 함께 실천해 보는 것은 세상을 섬기는 복음적 공동체로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4) 지역사회 가꾸기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덩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전략을 가지고 실천해 보도록 한다. 예를 들면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에는 크게 세 가지 영역, 즉 차세대 교육, 문화, 복지를 통한 지역사회를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5) 기타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의 범주를 넘어서서 해외 선교지와 연계하여 꾸준하게축복의 통로로서의 실전 지침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맺는 말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적인 삶의 열매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뿌리가 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복음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닫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하게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원수의 불화살을 이기고 믿음으로 복음의 사명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당연히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그리고 실질적인 하나님의 복덩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저주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복음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2015 교육주제 36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 교육주제 해설

 

총회장 설교: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정영택 목사 총회장

 

l 주제성구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3-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1-3)

 

흔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과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라는 말은 개혁교회, 개혁신학에서는 기본이며 상식으로 통하는 말이다.루터가 개혁을 이야기할 때 루터의 본심은 무엇이었겠는가? .루터의 개혁의 시

작은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젓이다. 그의 95개조 1항은 다음과같다.“우리들의주님이시며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말씀하실 때 그는 믿는 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 (참회)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When Our Lord and Master Jesus Christ said ,“Repent"(Mt 4 : 17),he willed the entire life of believers to be one of repentance). 이것은 그리스도 우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에 큰거하고, 개혁신학 선언의 근거가 된다.이는 또한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에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며 그리스도인이 복음으로 살아야 함을 도전한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은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를 담고 있다.

 

첫째,복음을 재발견해야만 한다.

이 복음의 재발견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의롭게 됐는지를 깨닫는 것이다.그것은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진리요,생명이시며 바로 나의 죄를 용서하신 나의 주님이시요,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영접했음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이렇게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으며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 됨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고백하며 확신한다. “내가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아멘!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네,믿습니다"라고 할수 있다.그런데 왜 우리는 복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복음의 재발견이라고 하는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우리는 예수이 말씀하시는 복음을 재발견한 자기 모습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말씀하셨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이가난한 자’,‘애통하는자’,‘온유한자’가되었느냐 하는 것이다.지금 우리의 문제는 복음으로 사는 지들이 가난하지 않고 부하고자 하며,약하지 않고 강하려고 하며,작아지려 하지 않고 크고자 하는 것이며,회개의 눈물보다는 희락이 지나쳐 향락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며,온유하기보다는 사납고,싸우며, 다투고, 소송을 제기하며, 돈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것이다.이런 모습이 어찌 복음을 발견한 자의 자기됨이라 할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재발견했다는 것은 그 복음을 재발견한 자로서의 자기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그것을 되찾은 자가 복 있는자이고, 천국을 가진 자이며,위로를 받는 자이고,땅을 기업으로 받을 자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나는회개하여 구원을 얻은 자인가’,‘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았다는 복음을 발견한 사람인가’,‘나는 복음을 재발견한 가난한 천국의 사람이며, 애통하는 위로의 사람이며,온유하여 기업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복음의 재발견! 여기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둘째,복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은 곧 복음으로 사는 삶 복음의 행동이 나타난다. 그래서 루터는 95개조의 선언문을 가지고 복음으로 행동하는 자기 모습을 실천하여 복음으로 사는 삶을 살아간다. 것을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보다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복음을 재발견한 사람들이 돈에 목마르고, 출세에 목마르고, 자리에 목마르고, 불의에 목마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의에 주라고 목마른 삶을 살아야 한다.주님께서 “그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고 하선 대로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 되고,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살려는 주리고 목마른 간절함과 눈물과 봄부렴이 있어야 한다.또한 긍흘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긍홀히 여기신 그 삶,가난하고, 병들고,옥에 갇히고, 나그네 된 자들을긍흘히 여기는긍흘의 삶 오른편뺨을때리면 왼 편 뺨을몰려 대는 긍흘,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는 긍흉,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는 긍흘, 이렇게 사는 것이 복음을 재발견한 자의삶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삶 속에 긍흘의 삶이 얼마나 실행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더하여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정치적이지 않고,순수하고 깨끗한, 합금이 아닌 비합금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주변에는 순수하지 못한 삶의 모습이 너무나 많다.그래서

두 얼굴의 야누스보다 더 험한 모습을 가지고 산다.믿음은 진실이고 진실은 티 없는 것이다.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중성을 버리고,두 얼굴을 버리고,복음의 진리를 가진 청결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비난 받는 것은 청결하지 못하고, 이율배반적이며, 회칠한 무덤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는 삶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긍흘히 여기는 삶,청결한 삶이다. 여기에 진정한 배부름이 있고,긍흉히여김을 받음이 있으며,하나님을 보는 삶의 거룩함이 있게 되어 복이 충만하게 된다.

셋째,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확산시킨다.

복음의 확산!그것은 복음의 능력이며,복음으로 사는 삶의 진가를 증언하는 것이다.과연 내가 복음을 발견한 자로 복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 때문에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복음의 확산을 기능케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은 먼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우리는 세계 평화,남북의 평화와 같은 것을 너무나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런 거창한 구호를 버리고 교회 안에서라도 평화를 이루고,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존재하자.

지금 우리는 교회 성장둔화의 위기 속에 있다.이를 타개할 수 있는 전략,방법,이론은 많다.그러나 우선적으로 교회가 화평할 수 있다면,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화평을 만들어 내는 적극적인 삶을 산다면,하나님의 이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산될 젓이다.정말로 복음의 확산을 위해 한국교회와 우리 교단

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화급한 것은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 가 되 는것이다.

나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노회에서, 총회에서, 삶의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키고,고소 고발하는 자인가? 양보하고 손해 보면서도 화평을 만들어 내는 자인가 고민해 보아야 한다.복음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이들이 되었다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음의 확산을 가져오게 하는 데에 앞장서자.

넷째,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삶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복음의 역사가 이어져 오기까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역사임에도 많은 박해,반대,고통,죽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핍박으로 인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예수님은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반대,거역,내쫓검,배반,채찍,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다.그 결과 죄인이 용서되고,천국이 약속되고,갈등이 풀려지고 예루살렘에서 유대를 념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오늘 여기까지 복음이 확산되었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복음의 의를 위한 고난이 있는가? 어떤 박해로 복음의 확산이 막히고 있는가? 진정으로 복음의 확산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의’를위하여 ‘핍박을받는 용기’가필요하다.의를 위하여 ‘예’와‘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의를 위하여 우리가 외쳐야 할 복음을 제대로 외쳐야 한다.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되고,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벚이 정오의 빛같이 빛날 수 있어야 한다.우리는 이것을 스데반에게서, 베드로,바울,주기철,손양원에게서 보았다.그러므로 복음의 확산을 위해 화평케 하는 자로,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다.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가져야 할 결단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복음으로 사는 믿음의 삶을 위해 복의 근원으로 부르시고,그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자로서의 새로운 자각이다.이 자각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는 자각이다.즉 본토,친척,아비 집을 버리는 용기가 있는 자각이며, 내가 복음으로 복받은 자가 되었다는 자각이다.그리하여 우리는 복음으로 복을 나눌 수 있는 ‘복의근원’,‘복덩이’라는사명감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성도 여러분!다시 꿈을 꾸자.그것은 우리가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복음의 삶을 통해 복음이 확산되어 누구든지 복을받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다음세대를 살리고,청년들을 살려 내고,교회의 중장년을 일으키고,노인 세대를 활성화시키는 실제적 실천 운동을 펼쳐 나가자.그fl고 교회 지도자들의 영성을 회복하는 기도와 말씀운동을 뜨겁게 펼쳐 나가자.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이것이 오늘과 내일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복음적 과제이다. 오직 복음으로,복음에의해,복음을 위해 사는 결단과 도전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설교 2.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마태복음 5 : 3-12

정헌교 목사 {청주강서교호I)

 

1.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이들의 벗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아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뭇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이다. 우리 성도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하게 대답 해야한다.

“그리스도인,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임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그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선뢰도가 매우 낮아졌기 때문이다.2013 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여론 조사에서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2배 이상이나 되었다.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언행일치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한 부도덕과 세속화가 그 이유였다.다른말로 하면 그리스도인 됨을 상설했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인 됨을 회복해야 위기상황에 빠진 교회에 희망이 있다.사설이 그렇다.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도덕성을 잃으면서 사회적 신뢰도가 끝없이 추락하여 진정한 내적위기를 맞이하였다.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고 위기를 극복하기원한다면 목회지들과 교인틀이 ‘그리스도인다운’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다운 도덕성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정체성의 회복,곧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만한다.

‘그리스도인다운’선앙인의 도덕성 회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열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존재인가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순종하여, 즉 우리의 실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계명(하나님사랑,이웃 사랑)을성령의 도움으로 지킴으로써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될 때 그리스도인다운 윤리적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대한 재발견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것이다.

2.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의 실체요 그 내용이라 할 수 있는것은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2000 년 전 유대 베들레햄에서 태어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죄와 죽음의 굴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셔서 우리를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셨다. 이것이 ‘복음’곧 기쁘고 복된 소식이다.이 복된 소식을 우리의 공로나 율법적 행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회를 경험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내용이었다.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틀은 죄와 사망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굳게 붙잡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갈 5 : 25).

16세기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복음 이해 속에도 믿음과 윤리적 책임성이 동시적으로 공존해 있었다. 믿음은 살아 있고 활기차고 활동적이며 능력 있는 것이다.그래서 믿음이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우리가 그렇게 묻기 전에 믿음은 별써 션을 행하며 또 언제나 선을 행하고 있다"이런 세상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이 포함된 복음 이해는 사실 성육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 속에 이미 드러나 있다.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 집중되어 있다. 곧 어툼과 죽임과 죄악과 억눌림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빛과 생명과 용서와 자유의 세계로의 초청과 그 현실화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께서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세상적인 가치와 행위에서부터의 탈출을 요청하는 회개를 선언함으로써(마 4 : 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기존의 세상적인 문화와 가치(예: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탐욕과권세욕 등)에대한 거부와 단절을 요구하신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에 응탑해 그분의 구원행위에 참여하는 인간이야말로 세상적인 가치를 타파하는 힘을 지닌 복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예수님은 세상적인 가치를 거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선포한 대로 사시면서

세상 변혁을 시도하셨으며, 그것 때문에 죽음에 처하셨다. 십자가란 그런의미에서 세상적인 모든 가치에 대한 거절과 파멸을 뭇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런 세상의 가치관을 심판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변혁을 시도한 하나님의 혁명적인 행위이다. 이런 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삶으로 보이신 복음 이해 속에는 윤리적 삶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복음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심판하고 새로운 변혁을 시도할 수 있는 구체적인모습을우리는마태복음의 산상수훈첫머리에 나오는팔복에서 찾을 수 있다.예수님의 팔복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옹다. ‘가진자가 복이 있다’는세상의 가치관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그 안에 진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예수님은 팔복 말씀대로 사시다가 그 말씀을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다.그리고 그 말씀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며 승리하심으로 역설적인 복음의 진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몽소 삶으로 보여주신 팔복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복음으로살아가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다.

 

3. 복음으로 사는 사람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은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신 ‘산상섣교’의서두 말씀이다.팔복 말씀은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의 세 가지 차원을 보여준다.

1) 복음의 사람

첫째,복음의 사람이란 ‘마음이가난한 자’(마5 : 3) 이다.가난한 마음은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와 고정관념을 부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인생길을 열어 놓는다.마음이 가난하려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찌꺼기와 응어리진 것이 없어야한다.세상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만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마음을 지난 자가 바로복음의 사람이다.

 

둘째,복음의 사람이란 애통하는 자’(마5 : 4) 이다.애통하는 사람은 남의 아폼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이다.새로운 미래를 함께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애통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병들게 된다.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급함이 없으면 영혼이 병들게 된다.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생이라면 영혼에 적신호가 몬 것이다. 영혼이애통해야 하나념을 만나고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서 자녀 된 은총을 누릴 수 있다.애통하는 자는 가슴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사명을 깨달아 기도하게 된다.애통하는 마음이 있을때 사람이 변하고 공동체가 바뀌어 그 안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들어 간다.그런 의미에서 애통해한다는 것은 축복이요 은혜이다. 이런 애통해하는 마음을 지닌 자가 복음의 사람이다.

 

셋째,복음의 사람이란 ‘온유한자’(마5 : 5) 이다.인간은 본래 온유하지않다.인간의 성품 그 자체로는 온유함이 생기지 않는다.하나님의 말씀을받아 성령의 역사 속에 붙들림을 받았을 때 온유해진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이다. 이 온유한 성품을 지닌 자가 바로복음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생각하고 하나

님의 은혜 때문에 인생이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복음으로 사는 삶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통치와 임재를 ‘갈망하는삶의 태도’(마5 : 6) 를 지니고 살아간다.복음의진리에 대해 목마르면서도 세상의 쾌락을 통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그런데 세속적인 쾌락과 욕망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이 해결되지 못해 생기는 인간의 붐부림에 지나지 않는다.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예수님은 갈망하는 인간에게 다가와 말씀하신다.“나는생명의 펙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라라"(요6 : 35).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는 답답함,내 안에 있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다 해결된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또한 ‘긍홀히여기는 삶의 태도’(마5 : 7)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긍흘은 진정한 변화의 역사를 가져오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긍흘의 마음으로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커셨다.긍흘의 마음을 지닌 자는 남의 성공은 싫어하고 남의 실패에 박수치는 매몰찬 세상적인 인간관

계를 극복하는 자이다.오히려 절망 가운데 희망을 주고,죽음의 역사를생명의 역사로 바꾸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난 삶의 태도이다.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마음을청결케 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으로’(마5 : 8) 세상을 보게 된다.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 이미 그 마음은 오염되어 거룩하지 못하고 불의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 주며 그 안을 거룩함으로 채워 주는 것이다.우리마음이 하나님만 바라보게끔 단순화시키는 것이 바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이다.

 

3)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하기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갈등과 반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평회를만들어 내는 화해자’(마5 : 9)이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갈등을경험한다.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도 갈등이 상존(尙存)한다.그런데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화평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화평의 은사를 주셨다.예수님도 이 땅에 화해자로 오셨다.그분이 십자가에 탈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세상적인 장벽과 차별이 철폐되었다(엠 2 : 1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은 세상의 참된 평화의 창조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이것이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법칙이다.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의를위하여’(마5 : 10) 자신의 피와 땀과 생명을내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와 자유를 붙들고 나아가는 자이다. 세상의 어둠을 거두고 빛의 역사를 일으거시려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깨닫고 그 고난에 참여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된다.이런 고난을기꺼이 감당하는 자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곧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요, 또한 이런 사람들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확장해 나가는 것이다.그래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줄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창 12: 1-2).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고 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처럼 사는 것이 너무 값진 것이지만,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도 하다.우리의 인간적인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우리가가진 이기적인욕망과삶의 태도와는상반되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다만 기도하면서 순종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이젓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것만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온전히 회복하는 길이요,복음으로 한국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갱신하는 길이라 확신한다.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며,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됨을 삶으로,온 몸으로 마음을 다하여 드러내어 축복의통로가 될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스도인, 복음으로 사는 사람 김치성 목사(총회교육자원부총무)

 

1. 들어가는 말

요즈음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전환기적 시기에 있다.첫째는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포스트모던 현상이다. 둘째는 경제적 가치가 가장 우선시되고 이로 인한 정신적 황폐현상이다. 셋째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성향의 비판이 심각해지고 있다.넷째로는 전체적인 인구와 함께 교인수도 줄고 있으며, 교회학교의 다음세대들도 갈수록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총회는 99회기 (2014. 9 - 2015. 9) 주제로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마5 :3 -12 ,창 12 :1- 3)이라고 정하게 되었다.이는 앞에서 나열한 전환기 시대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하며,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함이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단계들이 있다.첫째로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장에서 복음을 새롭게발견해야 한다.둘째,복음의 삶이 필요하다.마지막으로는 복음의 확산이있어야 한다 2017 년은 루터가 암울하였던 중세 봉건제도와 교황제도 아래에서 복음을 발견하여 비벤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을 붙여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0 주년이 되는 해이다. 필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의 이야기를 중섬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2. 복음의 재발견

1) 복음이란

복음이라는 말은 영어로 ‘Gospel ’이며이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한다.후에 라틴어로는 ‘evangelium ’으로표기되었고 ‘좋은소식’,‘기쁜소식’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영어로는 ‘좋은소식’(good news) 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wa rY상toν) 이라고 한다.원래 ‘유앙겔리온’은세속적 의미로 미래의 황제의 탄생과 그가 성년이 될 것,그가 황제로 즉위할 것과 같은 ‘기쁜소식’을의미하는 것으로 로마제국의 제의 속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1) 그런데 이 단어의 유대적 배경을 가진 구약의 단어가 있다.바로 ‘바사르’ 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기쁜소식을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특히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쁨 가운데 고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후에는 종교적 용례로 변천되기도 하였으며(삼상 31 : 9) ,노래 가운데에서 구원이 온 회중 안에 선포되기도 하였다(시 40 : 9). 또한 하나님의 사자가 시온에 이르러서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할 때 쓰이기도 했다(사52 : 7).3) 이러한 유대적 배경과 희랍어 배경을 동시에 지니는 ‘복음’이라는어휘를 신약의 기자들이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복음이

 

1) D. R.Jackson ,“복음"r기독교대백과사전.n 7권(1984).

2) O. A.Piper ,“Gospel,G"eorge Arthur Buttrick(ed ,)Th,e Interpreter 능 Dictionaryof the Bible. vol.2,(1962).

 

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이란 죄와 그 외 인간을 속박하던 여러 가지 굴레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속 사업을 통하여 구출되었음을 의미한다.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묵시록 기자는 그 구속사업의 목표를 ‘하나님의나라’라고 불렀고(마 3 : 2,4 : 17,13 : 11,막 1 : 15,4 : 11,녹 8: 10,계 1:6 등),요한은 ‘영원한삶(영생)’이라고말했으며(요 3 : 3,15,20 : 31),히브리 기자는 ‘하나님의새 백성’으로묘사하고(히 12 : 22,13 : 20) ,바울은 ‘구원(’0ωTηpia) 이라고 하였다(롬1 : 16,10 : 10,13 : 11,고전 9 : 22,엠 1 : 13,빌 1 : 28 ,살전 5: 9,팀전 1 : 15). 이러한 용어의 차이는 신약기자들의 영적인 배경이나 그들이 속한 집단의 다양성을 반영해 준다 4) 이러한 복음의 다양한 표현에 대하여 두 가지로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1)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으며(마 3 : 1,4 : 17,막 1 : 14),여러 지방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고, 병을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예,마 4: 23 ,9 : 35,녹 8 : 1,16 : 16). 즉,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의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으로는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이며(녹 4 : 16 ← 21),하나님의 아들이시고(마 11 : 27) ,하나님 나라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왕국(마26 : 29)이라고 하셨다.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그 자신과 그의 사역 속에서 실현된 것이라 하선 것이다(마13 : 16 이하,눅 10:23 이하,요 5 : 39).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념의 나라를 위하여

3) 케르하르트 킷텔 편 r선약성서선학사전~(서울:요단출판사,1986),307쪽.

4) O. A.Piper ,446쪽.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설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나리를 전하셨다. 즉 메시야는 사람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블 다가오게 하셨다(요 10 : 11,17,18).51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블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초청하셨다. 율법의 멍에에 의해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참 쉽을 제공해 주시고(마11 : 28),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마11 : 5,녹 4 : 18). 그리고 초청받는 이들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막1 : 14) 구원을 경험하며(녹 19 : 9)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18 : 18,22,24).그러나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책임도 따르게 됨을 언급하선다.그는 마지막 심판 때에 최후의 심판자가 되실 젓이며(마 7: 22-23 ,25: 31-46) ,그러기에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어야 하며(마 5 : 22,28,32,34,39,44) ,겸손,성결,사랑및 신뢰와 같은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마5-7 장,18장).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특권이 따르게 된다.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고(막 14 : 36,롬 8 : 15,갈 4 : 6),하나님의 용서(마 18 : 21- 35)와 평화(요14 : 27)를 경험하게 된다.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와 공급(마 6 : 25 - 34 ,7 : 7 -12) 및 영원한(요10 : 29) 사랑의 보살핍을 받게 된다. 성령의 인도하심(요 14장→ 16장)을 받으며 아버지 집의 영원한 비밀(요 14 : 1→6)에 참여하게 된다 6)

(2) 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메시지

복음의 여러 표현들 속에서 사도들의 메시지를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메시지는 주로 설교적 설교(케리그마)와 기독교적 가르침(디다케)으로 나누어진다.

 

5) D R.Jackson,“복음"r기독교대백과사전 J 7권(1984),980쪽.

6) 위의 사전, 981쪽.

 

그 첫 번째로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고전15 : 3 이하),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사죄와 구원(고전15 : 3) ,성경적 증거의 강조(고전 15 : 3 이하),부활의 강조,사도들의 증언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죽음’‘,부활’‘,증언’‘,성서’‘,능력’‘,용서’라는 여섯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메시지의 핵심 중 여섯 가지와 관련이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그리스도의 죽음주제 행 2: 23 ,36,3: 13-15 ,4: 10 이하,5 :30,10: 39,13: 28이하

(2) 그리스도의 부활주제 행 2 : 24 - 36,3 : 15,4 : 10 이하 5: 30 이하 10 : 40

13: 30 ,33-38

(3) 사도들의 증언주제 행 2 : 32,3 : 15,5 : 32,10 : 39 - 42,13 : 31.

(4) 성서주제 행 2 : 17 - 21,25 - 28,34 이하,3 : 18,21- 25,4 : 11,5 : 30 이하,10 : 43,13: 16-23 ,27,29,33-36 ,40 이하

(5) 능력주제 행 2 : 15 - 20 ,22,33,38,3 : 12 이하,16,4 : 9 이하,5 : 32,10: 38,40 이하

(6) 용서주제 → 행 2: 21,38-40 ,3: 19,26,4: 12,5: 31,10 : 43,13: 38 이하I)

 

두 번째로 이러한 설교적 행위와 탈리 사도들은 가르침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들은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의 특권에 대하여 가르쳤다.그특권이란 구원이었다(엠 2 : 8). 구원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이요(골 1 : 26) 하나님의 능력(롬 1 : 16) 이다.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펼요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선물이다(롬 3: 24 ,6 : 23).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다(롬 1 : 17,3 : 26 ,4 : 5).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7) 위의 사전, 982쪽.

 

 

십자기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 인간과의 화해를 도모하시기 때문에 이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며(롬 6 : 1-11)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이와 아울러 사도들은 믿는 자들의 책임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그들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합당하며(살전 2 : 12),복음에 합당한(벌 1 : 27) 생활을 해야 하고,서로 간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롬15 : 1← 3),겸손과 형제애로 살아야 한다(빌 2 : 1-11). 또한 용서(엠 4 : 32)와 부부애(엠 5 : 25이하),거룩과 순결(롬 6: 4,고전 6 : 15 ← 20) 및 확산과 희망(고전 15 :20)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다.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을 다른 사람틀에게 증거해야 함도 가르쳤다(롬 10:15).8) 이렇게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보면 조금은 복잡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그리하여 필자는 복음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의 삶,십자가에 죽으심, 그의 부활, 재림을 통하여

나타난 대속함의 은혜와 믿는 자들의 하나님의 자녀됨, 영생의 삶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한다 9) 둘째로 복음이란 조벙글리가 말하였듯이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돗을 인간이 순종하게 하시며,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이

 

2) 복음의 재발건

 

8) 위의 사전, 983쪽.

9) B. B. Warfield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Philadelphia : PRPCO,1950),

5-33 쪽.

10) E. J. Furcha and H.Wayne Pipkin(ed .l싼,'ophet,Pastor ,Protestant: The Work

of Huldrych Zwingli after 뀐've Hundered Years(Allison Park: Pickwick Press ,

1984) ,79쪽.

 

(1) 복음의 재발견

앞에서 언급된 복음은 항상 시대마다 때마다 여러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역사적인 사건으로, 재발견되어 왔다.복음은 항상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도전을 주며 영감을 준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복음을 재발견한 대표적인 사람을 거론한다면 역시 루터를 생각할 수 있다.이는 그가 발견한 복음의 사건이 그 시대 전체를 새롭게 만드는 혁명적 사건이 되었기 때문

이다.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헥은 어느 날 급작스럽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여러 가지 요인이 배후에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그 당시 독일은 스페인과 함께 신성로마제국의 주된 구성원이었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영주인 7 선제후 (7 electors)와 200여 개의 제후국들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이 제후국들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통일성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당시 80여 개의 도시들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권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족국가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더구나 도시의 시민들은 집권층인 영주들과 대립하고 있었다.그리고 봉건체제의 붕괴와 함께 중산층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독일에서는 뭔처 같은 이에 의해 농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요동을 치고 있던 차에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는 시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들었다. 당시 로마교황청은 교황청의 확장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사치와 안일에 빠져 있었고,독일 내의 가톨릭교회는 성직매매,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불륜,수도승들의 타락과 씨움 등으로 당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독일의 제후들,귀족과 중산층들은 기툴릭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항거하며 세금거부 및 독립운동을 벌여 나갔다 11) 이러한 변혁을 꿈꾸던 시기의 중섬에 루터가 있었고,또한 루터 자신이‘복음의재발견’으로이끈 한 사건이 있었다.루터는 문학 학사과정을 마치고 친구와 길을 가던 중

 

11) 이형기, “복음을 재발견한 루터의 종교개혁과 루터교의 형성 (16서171),r기"독교사상』저1498호 (2000. 6) ,177-178 쪽.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이후 어거스틴수도회에 입문하여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그러나 수도원의 삶을 살면서 루터는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압박감을 풀 수 없었다.그는 비텐베르크로 옮겨 갔고,1511년에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루터는 로마의 계단

교회 (Scala Santa: 거룩한 계단)를무릎으로 오르면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빌라도의 법정으로 가는 돌계단을 걷는다고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다 문득 “오직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The just shall live byhis faith) 는 깨달음으로 그 즉시 일어서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사건이있었다 12) 그 후 그는 신학박사를 받고 1512 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와 신학을 강의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비댄베르크 대학 끝자락에 위치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꼭대기의 작은 다락방에서 강의를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루터는 이곳에서 그의 유명한 ‘탑의경험’을 하게 된다.이 경험은 루터가 복음을 재발견한 것을 말한다.즉,성경의 핵심인 복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그는 이 경험과 함께 시편 강해 (1513 -1515) ,로마서 강해 (1515 -1516) ,갈라디아서 강해 (1519) 를 하면서 복음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3) 이 강의들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지만,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어떠한 공로와 상관없이 구속받게 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통하여 용서를 얻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이러한 용서와 구속이 성화의 새로운 사람의 시작이라고 하였다.14)

 

12) Thomas M. Lindsay. A History of the Reformation ,이형기,치종순 역 r종교개혁사 (l()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0),217쪽.

13) 이형기 r종교개혁 신학사상~ (서울: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4) ,24-26 쪽.

14) Thomas M. Lindsay,r종교개혁사 (lJ ,)223쪽.

 

이러한 루터는 급기야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교회정문에 붙이면서 당시 가톨릭교회를 정변으로 반대하였다. 이는 교회사적으로나 국가 사회적으로나 커다란 변혁을 일으켰다.루터에게 나타난 바와 같이 한 개인의 복음의 재발견이 그 시대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경우가 참으로 많다.칼빈이나 웨슬레 등도 복음을 재발견하여 사회를 변화시킨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2) 루터가 발견한 복음의 원리

오직 말씀 (Sola Scriptura)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의 이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5)그러나 당시 서방교회는 교회의 전통과 성경의 권위를 동등하게 여겼었다 16) 이는 교황 그레고리 1세 (540 - 604) 이래로 서방 기독교는 교회의 전통(전승)과성경이 교황의 권위 아래 종속된다고 주장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성경해석은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그러나 루터는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과 또한 전통과 성경의 동등한 권위 설정에 반대하여 ‘성경자체의 자기해석’(scriptura suii psius interpres) 의 법칙을 내세웠다.그는 성경의 경전성과 영감성을 받아들이면서 ‘오직성경으로만’이란 입장을 내세웠다 17)

루터는 독일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성경의 해석이나 그 해석의 확인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15) 말틴 루터, 지원용 역 r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교회의 바벨론 감금,크리스찬의 자유J (서울:콘콜디아사, 2008) ,298쪽.

16) 이형기 r종교개혁 선학사상 j ,119-120 쪽.

17) 이형기 r전통과 개헥J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1990) ,252쪽.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성경의 해석이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젓이 아니라 전 회중에서 주어진 것이 분명하기에 교황에게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하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고,해석할 수 있고,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삐이러한 의미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커며 그의 원리를 ‘오직성경으로만’으로 정하였다. 이는 ‘복음’을 종교개혁의 원리로 정한 것이다.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신앙’이라는 명제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리 중 하나이다.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원리로 생각하였다. 이는 루터의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기도 하다.루터는 자신의 고행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 한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깨닫게 되었다.루터는 1519 년의 옥탑 사건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의 공로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고,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루터는 체험한 것이다 19) 루터는 그리스도인틀의 자유를 위하여 신앙이 절대적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사람이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 : 10)는 구절을 거론하면서 신앙과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그러면서 그는 선앙은 오직 내적인 사람 안에서만 지배할 수 있으며 신앙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고 내적인 사람은 어떠한 외적인 공적이나 행위로 인하여 의롭게 되거나 자유롭게 되거나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20)

 

18) 말틴 루터 r말틴 루터의종교개혁3대 논문 .독일 크리스찬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감금,크리스찬의자유OJ ,38-42 쪽.

19) 이성림 r복음과 개혁:루터의정치윤리01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11),79-83 쪽.

20) 말틴 루터 r말틴 루터의종교개혁3대 논문 :독일 크리스찬귀족에게 보내는 글,교회의바벨론 감금,크리스찬의자유01 ,300쪽.

 

그러면서 루터는 신앙의 능력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첫째로 신앙은 인간의 의와 구원을 위하여 율법이나 공적이 펼요치 않게 한다.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은총을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약속들은거룩하고참되고 의롭고 자유롭고 선이 가득한 평화의 말씀이다.신앙으로 이 말씀에 매어 탈리는 영혼은 이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고 완전히 이 말씀에 동화된다.

그 어떤 선행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거나 영혼 안에 거할 수 없다.하나님의 말씀과 신앙만이 영혼 가운데 다스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 가운데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며 그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아무 선행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선앙의 첫째 능력이다 21)

둘째로 우리의 영혼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선앙으로 하나님께 가장 잘 복종하게 된다는 점이다.이 복종은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만 된다.참된 신앙이란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그에게 드림으로 인하여 진리와 의를 이루는 것이다.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롬4 : 3) 고 언급하고 있으며,만일 우리가 진실로믿는다면 동일한 이유로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의로 여검 받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22)

 

셋째로 신앙은 죄를 정복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신앙은 신부가 신랑과 결합되는 바와 같이 영흔과 그리스도를 결합시카는 것이다.신앙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 자신의 것처럼,또한 한 영혼이 가진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가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것처럼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다.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되고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고 죽음과 지옥에 대해서 안전하게 되고 영원한 의와 생명과구원을 받게 된다.이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가능하다 23)

 

21) 위의 책,303-304 쪽.

22) 위의 책,304-306 쪽.

23) 위의 책,306-308 쪽.

 

오직 은혜 (Sola Gratia)

루터는 ‘오직은혜’에대하여 그의 시편 강해 (1513 -1515) 와 로마서 강해(1515 -1516) 를 통하여 ‘칭의’와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오직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사건을 듣고 믿는 이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죄 사함과 섬판을 사하여 주는 은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직은혜’는 ‘칭의’의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오직은혜’는죄인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 사함을 사랑의 선물로 표현하여 주기도 한다 24) 즉,오직 은혜는 칭의와 관련하여 기술될 수 있는 것으로써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하나념이 주신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게 된다.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구원론을 전제로 하기에 선교의 중심에도 ‘오직은혜’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25)

넘쳐흐르는 사랑 (Quellende Liebe)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질을 자유와 봉사로 규정하고 있다.주님이 주시는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유함을 그리스도인틀에게 선사하며,동시에 칭의와 구원은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회개의 삶과 념쳐흐르는 사랑과 감사의 삶을 살게 한다.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념쳐흐르는사랑’이다.이는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말미암는 것으로 믿음이 사랑 안에서 활성화되는 것(갈5 : 6)을 뭇한다 26) 그러므로 루터는 신앙으로부터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며, 사랑에서부터 이웃을 기꺼이 섬기고 감사나 배은,찬양이나 비난 및 소득이나 손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기쁘고 자의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나온다고 한다.성령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자유롭고 기쁘게

24) 황금봉,“교회갱신을 위한 선학탐구와 신학실천 고찰"r신학과 목회』저120권(2003) ,

262-263 쪽.

25) 이형기 r종교개혁 신학사상 01 ,136쪽.

26) 위의 책, 135-138 쪽

될 것이며 그럴 때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고 모든것을 소유하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게 된다고 한다 27)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좋은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되어 마치 그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그리스도에게서부터 좋은 것이 우리에게 흘러들어 왔으며 지금도 흘러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처럼 ‘되시었고’또한 그가 마치 우리이신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실한 규범이다. 참되고 진실한 선앙이 있을 때 사랑은 참되고 진실하게 된다.이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13 : 5)고 했다. 결과적으로그리스도인은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산다.신앙에 의하여 하나념에게 올려지며 사랑에 의하여 이웃에게 내려간다.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과 그의 사랑 가운데 머물게 된다 28)

 

만인제사장직

‘만인제사장직’은루터의 사상 중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소책자에 주로 담겨져 있다.만인제사장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게 되는 결과이다. 기독교인에게 참자유를 주는 것은 믿음이며,믿음과 자유가 있는 사람은 교회의 직제에 얽매이지 않는다.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사제이기 때문이다 29) 루터는 ‘사제’‘,승려’‘,성직자들’이란 표현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어 사용하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그는 성경에서 교황,주교 및 군주라고 불리는 사람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가르칠 사람들에게

 

27) 말틴 루터~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감금,크리스찬의 자유 J ,332-333 쪽.

28) 위의 책,337-339 쪽.

29) Thomas M. Lindsay ,r종교개혁사 (l)J ,252쪽.

 

‘섭기는자들’,‘종들’‘,청지기들’이란명칭을 사용하고있음을 주지시켰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공적으로 가르치고 목회할 수도 없으며,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하였다.그러나 그 청지기 직책은 지금 무섭고 포악한 권력으로 변질되어 기독교의 은총과 신앙과 자유및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30)

즉,루터에게 만인제사장직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 가르침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형제,공동상속인,동료가 되게 하셨으며,하나님의 현전에 담대히 나아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동료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을 뭇한다 31)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에 (1) 서로를 위 한 기도 (2) 서로서로의 위로 (3) 서로서로의 죄의 고백과 용서 (4) 서로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고 설교하며 확산시키는 일들로 생각해 볼 수있다 32)

 

3. 복음의 확산과 그 교육원리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에 대한 정의와 아울러 복음을 재발견한 루터의 모습과 그의 주장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렇게 복음을 재발견한 사람에게는 사명이 주어지게 된다.그 사명은 우리 주변에 진리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여야 하고 이 복음이 확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 : 31~33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처럼,누룩처럼 온 세상에 점점 퍼져나가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또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30) 말틴 루터 r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감금, 크리스얀의 자유J ,314쪽

31) 위의 책,313쪽.

32) 이형기 r종교개헥 신학사상 OJ ,141쪽.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가루서 말속에 갖다넣어 전부부풀게 한누룩과같으니라”복음은 겨자씨처럼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점차 우리 주변에 확장되어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고,어떻게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을까? 펼자의 견해로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우리는 복음의 기초를 튼튼히 할 펼요성이 있다.물론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력과 선교전략 등이 중요하지만 루터의 만인제사장직의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면,선앙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복음의 기초를 재차 점검해 보아야 한다.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는 복음을 경험하며 확신하는 교육과정이 펼요하다.즉,내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에 성삼위 하나님의 나라를 나의 궁극적 삶의 목표로정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갖는 과정이다. 이를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확신이다.성경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확신의 모습을 요구한다.여호수아는 세캠에 모인 백성에게 하나님께대한 선앙의 확산을 요구하였다 :“만일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선틀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 : 15). 엘리야도 아합 정권 아래에서 이방신에게 노출되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모호하였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강하게 권면하였다 :“엘리야가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물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변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변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18 : 21).

요즈음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사회는 달콤함과 안락함으로 우리를 신앙의 길에서 유혹하고 있다.특히 우리의 자녀들이 이러한 유혹에 취약하여 신앙생활에서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중요한 것은 신앙의 확신이다.이 확선은 성삼위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내가 하나념 안에 거한다는 확신이다. 이러한확신은아브라함이 경험한것과같다. 당시 아브라함은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다.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장사였다고 한다.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 속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 : 1- 3). 이에 아브라함은 그동안 자신의 내면 세계를 형성하여 왔던 그 모든 세계를 떠나 하나님과 더불어 신앙의 길을 떠나게 된다.그 길은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는 길이며,하나님을 더욱 갚이 알게 되는 교제의 길이었다. 요즈음 우리 자녀들에게도 아브라함의 길이 필요하다.자신 주변의 불신앙의 길을 떠나 믿음의 길,확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의 확산은 그리스도인들의 념치는 사랑으로 말미암는다.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의 흘러념치는 사랑의 물결을 타고 전파된다. 인색함,이기심 등의 자기중심적인 좁은 마음을 통해서는 복음의 물줄기가 막힐 뿐이다. 그리고 흘러넘치는 사랑이란 그리스도께서 나와 우리를 위하여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이률 이웃과 같이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사랑의 모습에 대하여 멸리히 (p. Tillieh) 는 “사랑은소외된 인간틀을 재연합시켜 주는 힘이고, 삶의 원동력”이라고 하였다 33) 흘러넘치는 사랑은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모든 계층과 인종의 장벽을 허불어 버린다.그리하여 그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여기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많이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잘생긴 자와 못생긴 자라는 대비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일 뿐이다.그리고 이 흘러념치는 사랑은 상대방에 대하여 경청하며 존경을 표현하며 상대방의 이야기와 그 의중을 ‘들어주는것’이고,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많고,또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셨기에 값없이 나의 것을 나누어 ‘주는것’이다.그리고 흘러념치는 사랑에는 용서가 있다 34) 나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상대방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는 자세가 우리를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게 만든다.우리는 이 힘으로 사회와 소통하며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셋째로 복음의 확산은 그리스도인틀이 천국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때에 성취된다. 마태복음 5 : 3~12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팔복의 삶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시민이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신다.천국시민은 욕심이 많으면 안 되며 마음이 가난하여야 한다.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하

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온유한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한다.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의에 목말라야 하며 긍홀한 마음,즉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또한 하나님을 봐올 정도로 마음이 정결하여야 하며 세상에서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갈등을 조정하여 화평케 하여야 한다.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의를 따를 때에 혹 핍박이 오더라도 그 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33) Tillich ,Paul ,Love ,Pm’잉and Justice: ontological Anal] 경'is and Ethical Applications (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54),25-33 쪽

34) 위의 책,84-86 쪽.

 

넷째로 복음의 확산은 선교에 힘써야 한다.선교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상 명령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카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 19-20).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선교와 전도를 혼동하고 있다.전도와 선교의 개념을 보는 관점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로 보쉬 (D. J. Bosch)35) 가 설명한 선교의 개념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해된다 :(1)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교회로서의 선교 (2)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선교 (3) 구원의 중재로서의 선교 (4) 정의를 구함으로서의 선교 (5) 전도로서의 선교 (6) 상황화로서의 선교 (7) 해방으로서의 선교 (8) 문화화로서의 선교 (9) 공동의 증거로서의 선교 (10)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 의한 목회로서의 선교(11)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증거로서의 선교 (12)선학으로서의 선교 (13) 소망 안의 활동으로서의 선교가 있다.그러나 좀 더 단순화된 개념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전도를 선교보다 넓은 개념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둘째로는 전도와 선교를 동의어로 보는 관점이 있으며,셋째로는 선교를 전도보다 넓은 개념으로 보는 관점 등이 있다.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선교와 전도는 분리되지는 않지만 선교를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36)

작금의 기독교의 여러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다.그 중의하나가 성장의 지체 및 정체현상이다. 특히 우리의 다음세대가 저출산과기타 이유로 인하여 우려스러울 정도로 그 숫자에서 위축되어 있다.이제 99회 총회에서는 선교적 마음을 품고 ‘교회성장운동’을벌이게 된다.

 

35) 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Paradigm Shifts in Theology of Mission (Maryknoll ,NY: Orbis Books ,1991),368-510 쪽.

36) 검동션,호남신학대학교 편 r신학이란 무엣인가 ?J (서울:한국장로교출판샤 199에,410-411 쪽

 

그운동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 전개된다.(1) 다음세대 (2) 청년세대 (3) 장년세대 (4) 노년세대 (5) 지도력 개발이라는 5개의 세대별 접근을 시도할 것 이다.이 운동을 통하여 교회가 성장되며 복음이 확장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나기를바란다.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에대하여 여러 가지를 정라해 왔다.복음에 대한 정의를 그 어원부터 삼펴보았고, 그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도 정리하였다.그리고 복음을 재발견한 사람 중 루터를 대표적으로 연구하였고,그 내용도 간략히 점검하여 보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자세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짚어 보았다.결론적으로 정리하면 복음에 대한 확신의 단계,넘치는 사랑,천국시민의 책무를 다함,그리고 행동으로 선교함이다.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항상 재발견하며 복음의 삶을 살고 복음을 확산하는 선교의 삶을 사는 사람틀이다.아무쪼록 앞으로 더욱 복음의 귀한 역사가 우리를 통해 전개되기를 바란다.

 

 

저출산,고령화 속에서 복음을 소통하는 교회교육

박상진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기독교교육학)

 

.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한국교회가 항해하는 배와 같다면 엄청난 파도를 만난 것과 같다. 너무나 크고 강한 파도이기 때문에 배의 갑판이 부서지기 시작하고 선설에 물이 차 들어오기 시작하고,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한다. 한국교회라고 하는 선박에 부딪히는 파도의 정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파도가 있을 수 있다.그런데 가장 강력하게 한국

교회를 강타하고 있는 파도가 있다면 저출산,고령화의 파도일 젓이다.이미 한국교회는 이 파도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고,이 파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이미 1980년대부터 교회학교 학생수의 감소 현상이 시작되었고, 전체 기독교인 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감소현상은 더욱 섬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1)중고등부를 비롯한 교회학교 부서가 사라지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으며,농어촌으로 가면 교회

학교가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생태계로 변화되고 있다.성장을 멈춘 한국교회,급격한 교인수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더 이상 교회를 유지 할 수 없어서 교회 문을 닫는 경우가 발생한다. 무리하게 성전을 건축한 교회들은 끝내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서 경매로 내어놓는 경우도 허다하다.그런데 이런 현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저출산,고령화의 파도가

한국교회에 미칠 영향은 보다 더 심각하다. 교인들의 인구분포가 1960년대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서서히 역 피라미드 구조로 변화해 가고 있다.자라나는 세대와 젊은이가 사라지고 노인틀이 주종을 이루는 교회가 됨으로써 교회의 역동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이 글을 통하여 이러한 저출산 시대의 한국교회 교회교육의 위기를 다루되 이러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삼아 복음을 소통하는 교회교육을 모색해 보려고 한다.

 

저출산, 고령화사회 속에서 복음을 소통하는 교회교육

저출산, 고령화사회 속에서 교회교육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인가? 기존의 교회학교 패러다임과는 어떤 다른 교육구조가 가능할 것인가? 학생수가 적어도 적용가능한 교회교육 구조는 무엇일까 저출산, 고령화 현상 속에서 오히려 신앙교육의 본연의 모습을 추구함으로 진정으로 복음을 소통할 수 있는 교회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1) 관계구조

저출산,고령화 현상 속에서 자라나는 세대의 인구가 감소하게 되고,교회학교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한 영혼에 대한 귀중함과 소그룹 (small group) 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교회교육의 성격도 많은 수의 학생들을 암에 두고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형태가 아닌 관계를 강조하는 구조로의 변화가 요청된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소통하고 기독교교육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사실 기독교 신앙은 강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교회교육에 있어서는 명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관계다. 전통적인 ‘학교식’교육형태는 지식을 전탈하는 것에 용이한 구조였지만 신앙을 형성하고 을 변화시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신앙적인 변형 (transformation) 을 위해서는 관계구조가 요청되는데, 더욱이 저출산, 고령화 현상 속에서는 교회교육의 구조가 학교식 체제보다는 보다 관계지향적인 구조가 바람직하다. 인원이 많지 않아도 가능한 교육구조일 뿐만 아니라 소규모 인원일 때 오히려 내면을 변화시커는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이러한 접근이 요청된다. 오늘날 인터넷만을 대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는 아이들,가정에서조차 부모와의 대화가 상실되어 가고 있는 아이들, 그들의 내면에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다.교회교육은 이러한 관계성으로 이들의 마음을 엮고,사랑으로 마음 문을 열어 복음을 소개해야 한다.교사와 학생의 인격적인 관계야말로 ‘인격적인하나님’을알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관계적 구조의 상징적인 모텔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일 것이다.교사와 학생,학생 상호간의 관계는 그 어떤 교육내용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관계 자제가 교육하는 것이요,서로가 관계 속에 있다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다고 할지라도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관계적 교육구조에는 멘토링을 비롯한 일대일 만남의 관계구조가 있고,토의를 강조하는 소그룹 성경공부와 제자훈련,그리고 가정과 회중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방식 등이 있다.구체적으로 어떤 관계 구조가 가장 바람직할 것인지는 교회의 상황과 목회철학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인격적 관계를통해 삶의 변화블추구한다는 것이다.파커 팔머가 말히듯이 가르침은 진리를 순종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인데,진리는 3인칭으로 관계 밖에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2인칭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으로 존재한다. 교회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열마나 많은 것을 가르치느냐보다 얼마나 갚은 관계를 맺느냐이다.

 

2) 공동체 교육

저출산,고령화 현상 속에서 교회교육은 공동체적인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성경을 보면 복음의 소통은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이는 교사 1인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식 구조보다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나눔이 가능한 구조로의 변회를 의미한다.오늘날 교육에서도 그것이 일반교육이든 종교교육이든,모든 교육의 영역에서 감지되는 중요한 변화는 공동체를 강조하는 경향이다.오늘날에는 공동제와 분리된 개인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근대주의적 이원론 (dualism) 이나 개인주의(indi vidualism)를 극복하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지식도 마찬가지이다.모든 지식은 사적인 (private) 젓이 아니라 공동체적 (communa l)인것이다.모든 지식은 함께 아는 자들 (co - knowers) 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그렇기 때문에 모든 앓은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웨스트호프는 기독교교육의 자리를 학교 교실로부터 신앙공동제로 옮길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신앙공동제 안에 참여함을 통해 한 인간이 공동제 안에서 문회를 내면화 히듯이 일종의 문화로서의 선앙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는 신앙 공동제가 다음의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공통적인기억 혹은 전승,곧 삶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삶의 방식,그리고 공통의 목적과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둘째,신앙공동체는 상호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이어야 한다.셋째,신앙공동체는 세 세대 (generations) 의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고 그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그리고 신앙 공동체는 다%댄 은사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웨스트호프는 이러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식 (ritua l), 경험 (experience) ,

그리고 활동들 (activities) 을 기독교교육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터전으로 보았으며, 이를 통해 신앙이 형성되어 간다고 본 것이다.종교개혁 이후 근대시대에는 ‘말씀신학’이중섬이 되고 ‘설교’의중요성이 부각되었지만,상대적으로 렬 강조되어 온 성례전이나 공동제의 여러 종교의식의 중요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마나 잠 가르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느냐가 선앙형성에 관건이 되는 것이다.저출산,고령화 시대에는 종래의 일방적인 학교식 구조에서 탈피하여 비록 소수의 인원이 라고 하더라도 공동체를 형성하고,세대 간의 만남과 구성원 간의 삶의 나눔을 통해 신앙이 형성되어 가는 공동체 교육이 요청되는 것이다.

 

3) 참여적 구조

저출산,고령화 시대에는 보다 참여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구조가 요청된다.복음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기에 복음을 소통하는 교회교육은 참여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신앙적 앓은 스스로 참여하여 경험할 때 비로소 획득되어지는 것이다.기독교적 인식론은 앓에 있어서 조망적 의식을 강조하는 객관주의적 인식론과는 대조적으로 알려지는 존재(하나님)에대한 아는 자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존의 교회학교 구조는 교사의 강의나 설명에 의존한 교육구조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면 저출산,고령화 현상 속에서 교회학교는 보다 참여를 강조하는 교육구조의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의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이 경험하고 참여하여 온 봄으로 체험하는 신앙교육이며, 청각이나 시각만을 사용하는 교육이 아니라 오감을 활용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기도에 관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교육이며,전도에 대해서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전도에 참여하고 경험하는 교육이다. 이러한 참여적 교육방법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걸맞는 교육방법이기도 하다.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인 참여의 성격을갖는다. 그틀은자선이 참여할수 없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단적인 예로 TV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작가가 본디 작성한 내용이 바뀌기도 한다.네티즌의 활발한 활동은 나라 전체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이런 참여의 힘 때문에 정치,언론,방송,경제,분화 등 사회 전반이 여론의 흐름에 따라 매우 민감하게 움직여 가곤 한다.폐쇄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섬을 끌지 못하고,쌍방향 커뮤니케이션 기반의 소통 방식을 갖춘 곳이 살아남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상호 작용할 수 없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단지 소유하거나 보고 즐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직접 참여해야한다.사람들은 어떤 것이든 그 생산 과정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교회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이 수동적인 관중이나 청중이 아니라 앓의 주제자와 적극적인 참여자가 될 때 진정한 선앙교육이 이루어절 수 있을 것이다.

 

4) 간세대 교육

저출산,고령화 시대는 교회교육에 있어서 세대 간 통합 및 학년 간 통합을 추구하는 간세대 교육으로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전통적인 교회학교의 구조는 발달단계에 따라 부서가 구분되고,그 안에서도 학년에 따라 분반이 나누어지는 특성이 있다.규모가 큰 교회는 학년 단위로 교육부서가 편성되는 경우도 있고,총회에서 개발되는 공과도 학년별 교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학년별 접근은 지나치게 인지발달이론에 근거한 교육이다.복음의 소통과 영성의 형성은 인지 발탈에 예속되는 것은 아니다.비록 어린이가 인지적으로 미숙하다고 하더라도 영적 제험이나 종교적 경힘을 할 수 있다.때문에 지나치게 인지적 발달 수준만을 고려한 교회학교 교육은 오히려 풍성한 선앙교육을 제한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것이다(양금희,새로운 모벨,93).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데, 그 공동체는 웨스트호프가 지적한 대로 삼대가 함께 있는 간세대 공동제이다. 교회는 이러한 모든 세대가 함께 모여있는 공동체인데,교회학교가 이를 세대 간 분리 구조로 변질시켰다고 할수 있다.교회 안에서 세대간 통합예배를 활성화하고 삼대가 함께 신앙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를 구분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학년 간 통합을 통해 공동체를 경험하고 기독교적전승이 자연스럽게 계승되고 상호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교회와 가정의 연계

저출산,고령화 현상 속에서는 보다 교회와 가정의 연계를 통한 전인교육의 추구를 요청하고 있다.복음적 앓이 아니라 복음적 삶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열 아침 분반공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6일 동안의 삶과 연결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정과 연계되어야 한다.주일학교가 역사상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결정적인 한계가 있는데 바로 교회학교와 가정의 분리이다.교회학교에서는 교사틀에 의해서 교육이 이루어질 뿐 가정의 부모들과의 연계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점점 가정 특히 부모의 자녀 신앙교육의 사명이 약화되어 가고,교회학교는 자체의 성장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고,이로 인해 교회학교와 부모의 분리는 더 심화되어 가는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저출산,고령화 현상 속에서 향후 교회교육은 이런 ‘학교식체제’에의한 교회와 가정의 분리의 한계를 극복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교회와 가정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교회에서 실시하는 부모교육이다.부모교육은 부모를 자녀교육의 책임자로 세우는 교육이다.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교육을 담당하는 ‘선앙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명감과 목적의식, 그리고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과정이다. 미국의 노스포인트 (North Point Community) 교회가 시도하고 있듯이, 주된 신앙교육의 책임을 부모가 지니고 교회는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재를 개발하여 제공하고, 주일에는 부모들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축제의 예배를 드리고 가정에서 배운 내용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한 예라고 할 수 있다.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되고,가정은 교회 같은 가정이 되어 서로가 연계될 때 진정한 기독교교육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6) 평생교육

저출산, 고령화 시대는 교회의 노년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디자인을 요청하고 있다.전통적인 교회교육에 대한 이해는 자라나는 세대를 그 대상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교회교육은 주일학교 또는 교회학교와 동일시되었고, 교회학교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교육은 단지 교회학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교육은 자라나는 세대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life -long education) 이다.복음의 소통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 주일학교운통이 기독교교육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교회교육의 대상을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국한하는 경향이 있어 왔고, 이로 인하여 교회교육은 성인에게는 펼요하지 않고,자라나는 세대들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다. 기독교교육은 요람에서부터 무텀까지, 평생의 과정을 통해 지속된다. 유아, 아동교육이 펼요함과 동시에 성인,노인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저출산, 고령화시대에는노년교육에 대한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데 10대,20대에 교육받은 것만으로 길어진 노년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낼 수가 없다.교인의 생애전 과정이 교육의 과정이 되어야 하고, 교회교육은 이를 실천할 수 있는평생교육 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교회가 은퇴자들을 위한 은퇴자 교육을 마련하여 ‘후반전’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생업만이 아니라 다 한 봉사활동과 은사개발을 통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태교에서부터

호스피스교육까지, 출산에서부터 임종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기독교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과연 교회학교가 존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게 하고 실제적으로 교회학교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교회학교의 위기는 복음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교회교육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그동안 양적 성장에 취해서 보지 못했던 한 영혼의 귀중함에 주목할 수 있고 규모를 늘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중심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제험할 수 있는 전환의 기회이기 때문이다.그리하여 내실 있는 목회와 신앙교육으로의 변화를 도모함으로 보다 진지하게 복음을 소통할 수 있다면 이러한 위기는 축복으로 향하는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다.상황에 종속되지 않고 어떻게 응전하느냐가 중요하다. 교회학교 학생수의 감소로 인하여 교회교육이 위축되거나 기독교교육의 소명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수에게 집중하여 생명적인 변회를 일으키는 복음적 교회교육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이러한 변회를 복음적인 관점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과거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 매여 있게 될 때에는 저출산,고령화는 한국교회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제 그동안의‘교회학교’패러다임을 극복하고,‘교회학교성장주의’를념어서 복음을 소통하는 교회교육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남북통일을 바라봄속에서 복음의 재발견 하충엽 목사(영락교회 선교전담)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마5 : 3 -12 ; 창 12 : 1- 3)의 주제의 틀에서 “남북통일을 바라봄 속에서 복음의 재발견”은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마5 : 3) 로서 자신의 울타리를 낮추고 타자를 받아들임에서 시작한다.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남북한사람틀의 창조통일공동제를 형성할 수 있다.복음은 이를 위하여 남북한사람들의 마음 안에 서로

를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한다. 두 번째로는 ‘긍흘히여기는 삶의 태도’(마5 : 7) 이다.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반도에 의원이신 예수님이 필요함을 이야기할 것이다. 복음은 남북한사람들의 죽은 정신을 살리고잘못된 개인주의의 삶의 태도를 공동제의 삶의 태도로 고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평화블만들어 내는 화해자’(마5 : 9) 에서 남북분단을 념어온

국민이 기뻐하는 복음통일을 이룸을 바라본다.

 

2. 복음으로 남북한사람들의 창조통일공동체를 형성하다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의주제해설에서 “복음의사람이란 ‘마음이 가난한 자’(마5 : 3) 이다”라고하였다.나아가 “하나님이창조하신 위대한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자들이 복음의 사람이다”고 하였다.더 나아가 “마음이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쳐 놓은 울타리와 고정관념을 부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인생길을 열어 놓는다"고 해설했다. 이 해설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공동제를 형성하심으로 구체화 하셨다. 예수님은 의인이시면서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선언하신다(마 9 : 13).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바라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으로 의롭게여기는 의식을 따르는 사람들만 그들의 공동제로 인식했다.그들은 그 인식에 갇혀 있었다.바라새인들은 헬레니즘에서 닮은 것은 닮은 것에 의해서 안다는 에로스의 원리를 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헬레니즘의 틀,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틀을 깨고 죄인들과 공동체를 이루선다. 나와 전혀 다른 타자를 수용하고 포용하며 공동체를 이루신 것이다. 이 복음의 공동체는 나아가 원수까지도 공동제 구성원으로 들어오게 한다.몰트만은 이 복음의 공동체를 ‘다양성에의한 공동제’(unity by diversity)cf 말한다.나아가 그는 타자에 대한 열린 (openness) 마음을 강조한다. 자신들이 쳐 놓은 울타리를 조정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복음의 공동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남북한사람들의 통일공동체가 복음공동체이어야 하는 이유는 남북한사람들은 70년 동안 (1945- 2015) 분단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우리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기에 서로 다른 언어와 행동과 정신으로 사회화가 되어 있다.북한사람들은 수령절대주의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회화 되었다.그 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남한에들어와 사는 북한이탈주민 중에 한 분은 교회에 처음 왔을 때에 은혜 받으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감히 평민이 은혜 받으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생각했다.왜냐하면 북한에서는 절대 권력자인 수령이 주는 무상치료, 무상급식,무상교육을 은혜로 생각되어지도록 사회화하기 때문이다.반면에남한교회의 성도들에게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고백한다. 이것은 남북한사람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함께 공존하며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민족정제성이 이질화되어 있음을 나타낸다.동족 상잔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독일도 통일 후에 서로 다른 인성과 문화로 인하여 사회적 후유증을 앓았다.그런데 남한사람들과 북한사람들은 독일보다 분단기간도 더 길뿐만 아니라 동족상잔의6 . 25 전쟁까지 경험했다. 서로 한민족끼리 죽이는 전쟁을 했다.이 전쟁을 통해 남북한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되었다.그러므로 대한민국의 통일은 의인이시면서 죄인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가지고 남북한 민족 공동제를 이루어 가야 한다.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선을 지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복음통일이다. Hyatt and Anne Moore 가 그린 아래 성만찬 그림은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공동제를 이루고 있다.왼쪽부터 몬타나, 북아프리카, 케냐,중국, 에쿠아도르, 아프가니스탄, 예수님,에티오피아, 멕시코, 브라질, 파프아뉴기니아, 콜롬비아, 몽골이다.남한사람이 북한사람들처럼 될 수 없듯이 북한사람들도 남한사람들처럼 될 수 없다.민족정제성이 ‘동화’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그렇다고분단 전으로 돌아가서 그때의 민족정제성을 회복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하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민족정체성을 존중해 주고 함께 상호작용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창조복음통일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포용의 공간이 준비되어져야 한다.

 

3. 복음은 포용의 공간을 창출한다

교회에서도,가정에서도,사회생활에서도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란 결코쉬운 일은 아니다.세상에서 분쟁이 있는 지역에서 화해를 이루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아프리카 남아공에서는 만댈라에 의해서 흑인과 백인이 화해를 이루기도 했지만 그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다.르완다에서는 종족 갈등인 후투족과 투치족 내전으로 8천 명이 살해당했다. 선진국인 영국,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전쟁이 아직도끝나지 않은 채 서로 담을 쌓고 살고 있다.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인종갈등과 종교(기독교와 회교)갈등이 함께 일어나서 대량 학살을 경험했다.중동에서 중국에서 세계 도처에서 갈등과 분쟁과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이렇게 분쟁이 있고 갈등이 있고 전쟁이 있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평화의 주로,갈등의 해결자로,아픔의 치유자로,깨진 관계의 회복자로 오셨다.예수님은 타지를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셨다.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예수님처럼 사람을 포용하기 위한 공간의 크기가 계속커져 간다.신약성경 누가복음에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녹15 :11-32). 밀리슬로브 볼프(Miroslav Volf)그는의 책 「배제와포용」에서 탕자의 비유

를 통해 포용의 공간의 관점으로 탕자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아버지와 큰아들)을비교한다.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먼저 달라 하여 먼길을 떠나 창기와 함께 놀면서 그 돈을 다 써버리고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려 해도 주는 자가 없게 된다.그는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열마나 풍족한가 하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아직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그탕자의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아 준다 (20 절).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연다.이것이 아버지의 포용이다. 반면,큰 아틀은 일터에서 돌아와 잔치하는 소리가 들려 그 내용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에게 말한다.

“내가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주어 나의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젠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하면서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큰 아들의 배타이다. 포용은아버지처럼 정의와 공평을 뛰어념어서 이루어진다. 포용은 누가 더 옳고누가 더 잘못했는가라는 정의의 문제를 념어서 이루어진다. 포용은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의 공동체를 창출한다. 그러나 배타는 관계를 단절시고 공동체를 깨지게 한다.예수님은 이 세상에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시며,그들을 포용하선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으셨다.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리신 예수님,그 안에 세상 모든 죄인들을포용하고 있다.그 안에 자신을 팔아념긴 가롯 유다도 제외하지 않으셨다.만일 그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포용의 공간이 넓을수록 관계의 회복이 일어난다.포용의 공간은 세월이 흘러간다고 해서 나이만큼 저절로 그 공간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이포용의 공간의 크기와 관계의 회복은 정비례관계이다. 인간이 어떻게 마음 안에 포용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가? 회개가 제일 먼저이다.관계가깨질 때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게 된다.세상에서는 가해자가 회개해야 한다.복음은 피해자의 회개를 요구한다. 인간의 타락한 죄성은 “저사람이 내 암에 무릎 끓고 용서해 달라고 벌지 않으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다.이것은 인간의 심령을 한 평짜리 작은 독방에 가둔다.피해자의 회개는 그곳으로부터 해방을 준다.피해자의 마음에 증오와 미움이 복음으로 녹아질 때에 기쁨이 회복되기 때문이다.두 변째는 용서이다.회개가 이루어지면 따라오는 것이 용서이다. 그러나 용서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으며,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성령의 도움으로 용서가 이루어진다.그러나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어떤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으면 세월이 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일리는 있지만 출발은 틀렸다.출발은 용서가 펼요하다.기억에서 잊어버렘과 용서는 영어로 말하면 비슷하다.기억을 잊어버림은 ‘Forgettir 따이고 용서는 ‘Forgiveness ’이다.그러나 이것의 차이는 크다.용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나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벌을 주지 않으며,복수를 하지 않고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놓아 주는 것이다.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용서하면 언되 너머의 에덴동산이보인다.미워할수록 마음의 공간은 좁아지지만 용서할수록 마음의 공간은커진다.세 번째는 화해이다. 이 화해는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지위가 높고 낮음의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화해,부자와 가난한 자 간에 이루어지는 화해는 일방적인 화해의 형식만 보일 수 있다.그것은 진정한 화해가아니다.진정한 화해는 예수님 안에서 가능하다.포용의 공간은 진정한 회개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창출된다.포용을 통해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회개와 용서와 화해가 없으면 갈등과 관계의 깨짐은 지속될 것이다.그러나 회개와 용서와 화해는 분단된 공동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창조할 것이다.남북한 통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이 회개와 용서와 화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한국교회는 남한사회에 들어온 약 2만 7천 명의 북한이탈주민틀과 함께 복음의 공동제를형성하는 것에 성공해야 한다.이것이 앞으로 통일이 되었을 때에 남북한사람들의 복음통일공동체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시금석이 될 것이기때문이다.이를 위해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포용이 중요하다.특히 통일 전에 북한이탈주민들은 한국교회성도들에 비해서 소수이고 지역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소수일 젓이기 때문에 약자이다.작은 자들이다.또한 그들은 교회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는

수혜자로서 약자이다.그러므로 힘의 작용이 일어나 그들이 불평등을 겪지 않도록한국교회 성도들에겐바른자세가펼요하다. 예수님이 작은자들을 섬기셨던 것같이 한국교회는 북한이탈주민들을 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세상에서는 서로 같은 사람들끼리 공동제를 형성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때문에 남한사람들과 다르게 사회화 되어 있는 북한이탈주민들과 공동제를 이루는 것에 설패하기 쉽고 위선적인 공동체를 만들면서 과시할기능성도 있다.나아가 그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탐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수 있다.의인이시면서 죄인과 공동제를 이루선 예수님의 정신이흐르는 국교회가 70 년 동안 너무 다른 사회에서 민족정체성이 이질화되어 있는 북한이탈주민들과 공동체뜰 헝성하는 것에 성공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세상을 향한 빛으로 볼 것이다.이것은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발견되게 할 것이다.통일 이후에는 통일 전에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이룬 복음공동제의 경험과 선앙적 자산을 바탕으로 2천 4백만 명의 북한동포들과 복음통일공동체를 꿈꿀 수 있다.남북한의 통일이 복음통일이 되고 남북한사람들의 복음통일공동제를 형성하는 것은 북한사람틀의 정선을 얄리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4. 복음은 북한동포의 죽은 정신을 살린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 : 12) 라고 선언하신다.여기에서 예수님이의사이고 병든 자란 죄인이다.그러므로 죄인에게 예수님이 펼요하다.한반도는 허리가 단절된 병든 자이고 평화블 잃어버린 죄인이기에 한반도에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잃어버린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시면서 이 병든 조선에 펼요한 것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만이 이 조선을 살렬 수 있다고 믿었다.그 신념과 신앙으로 독립운동을 하셨고 건국대통령이 되셨다.제헌국회에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국회를 여셨다 1945 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반쪽만 해방이요 광복이다.북한은 절대 권력을 3대에 걸쳐서 세습하는 비정상국가로 외부 세계와는 문을 닫고 백성틀의 인권을 유린하며 기아에 굶어 죽게 하고 있다.무엇보다도 수령절대주의의 주제사상으로 북한동포틀의 정선을 죽여 놓았다.그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선 은사와 달란트가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발견할 기회가 없어 활용할 수도 없다.그러므로 북한동포들의 죽은 정신을 살리기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지금까지의 역대 정부의 통일론에는 북한동포들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빠져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통일론은 ‘북진통일론’과‘선

건설 후통일론’이었다.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공산독재체제를 무너뜨려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북한 전역에 펼치는 것을 유일한 통일의 과업으로 보았다.박정희 대통령 시대인 1970 년 중반까지는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력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선건섣후통일론’이었다.남한을 산업화하고 경제발전과 부국강변을 이루어 북을 능가할 때에 본격적으로 통일논의를 하고자 하였다. 노태우와 김영삼 대통령 시대에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1989 년 9월)’과‘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94 년 9월)이 있었다.이 둘은 큰 차이는 없고 세계냉전이 끝나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때 나온 통일방안이다. 이 시기에 ‘남북기본합의서’와‘비핵화선언’등이 체결되는 발전은 있었지만 북한동포틀의 죽어 가는 정선을 삼라는 길은 제시되지 않았다.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는 ‘햇볕정책’과‘평화번영정책’이었으나 내용상에는 별 차이가 없다.이 정책들은 북한은 쉽게변화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고,통일정책에 대해서 남남갈등을 유발했다. 이 정책들 역시 북한동포들의 죽은 정신을살리는 정책은 아니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 ’과‘드레스멘정책’은북한동포들의 죽은 정선을 살리는 길을 열어 줄지 지켜볼 일이다.어떠한 통일정책이라도 그것의 가장 근본은 북한동포들의 죽은 정신을살리는 일이어야 한다.그래야 북한동포들이 잠재적 창의력과 생산성을가지고 자생적으로 경제와 정치와 문화를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그들의 죽은 정선을 살릴 길은 복음이다.복음이 들어가면 그들의 정신은 살아나고 깨어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젓이다.이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그들의 창의력과 생산성을 높여 자생적으로 사회 전반적인 분야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5. 복음은 남한사람들의 개인주의를 통일민족을 이루는 공동체주의로 바꾼다

남한사람들은 개인주의화가 강화되고 있다.학교에서는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서로 경쟁하게 하며 이기주의적인 사회화를 강화하고 있다.기업도 다른 기업보다 뒤처지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경쟁구도 속에 사람들을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만든다.남한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개인자유주의 철학에 갇혀 있다.돈을 쟁탈하기 위해 천륜도,인륜도 어기고 공동체도 파기하며 극단적인 이기주의 사건 사고가 사회에서끊이질 않는다.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급기야 통일비용을 왜 우리가 부담해야 하느냐는 이기주의로 ‘통일무관심론’과‘통일회피론’이퍼져가도록 큰 역할을 한다.이는 북한의 인권문제와 기아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히듯이 보게 한다.우리 대한민국 국민 공동체가 일섬으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뭉쳐야 그 불을 끄고 통일공동제를 이룰 수 있다.하지만 우리가 무관섬한사이에 정말 강 건너 있는 중국이 그 불을 끈다며 북한에 친 중국회를 하고있다.북한의 비정상 권력이 붕괴될 때에,북한에 급변한 사태가 벌어졌을때에 북한동포들의 의약품과 식량과 안전을 위해 달려가 그틀을 품을 준비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되어 있지 않다면 북한동포들에게 중국이 다가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북한에는 친중국정부가 들어서고 3·8 선은 휴전선이 아닌 국경선이 될 것이다.결국 대한민국은 거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주권국가, 민족자겸주의의 국가를 지속하기 어렵게 된다.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반으로 나윈 국가가개인주의로 그 반쪽을 외면한다면 결국 주변 강대국들로 인해서 독립국가

로,자주국가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복음은 공동체이다. 교회공동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교회공동체는 ‘나’란없고 ‘주님의봄’만있는 것이다.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개인의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또는 자아회귀가 이루어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젓이다(갈2 : 20). 주님은 이것을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제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말씀하셨다. “아버지여,아버지께서 내 안에,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 : 21). 한국교회는 복음증거로, 바른 복음적 삶을 훈련시킴으로 한국국민이 개인주

의,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할 사명이 있다.한국교회 성도틀은 스스로 북한동표들을 향한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서 북한동포들을 끌어안는 본을 한국사회 구성원들에게 보여야 한다.특히 북한정권의 붕괴로 인하여 북한화폐 기능이 상설되고 북한보위부와 안전성과 군인들이 북한주민들을 약탈한다면 북한동포들은 난민이 될 수밖에 없다.그때에 개인주의지들은

북한동포들에게 식량과 의료품을 나누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값을 지불하는 데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난민이 된북한동포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을 포용하며 위협으로부터 그틀을 지키고식량과 의약품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을 행해야 한다.이를 통해 통일과 함

께 다가오는 극단의 상황에서 복음은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이 될 것이고북한동포를 구하는 길이 될 것이다.뿐만 아니라 북한동포들이 친중국화로 중국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고 남한사람들과 함께 통일공동제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남북한사람들이 하나가 될 때에 통일된 대한민국은 7천만명의 국민이 되어 남한과 북한은 상호작용으로 웅장하게 아시아로 유럽으로 뻗어 나아갈 것이다.유럽과 중앙아시아와 일본과 북미지역과의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통일된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게 될 것이며세계 중심국가가 되는 것이다.즉,복음은 남한사람들에게 개인주의를 벗어버리도록 도와 북한사람들이 어려울 때에 다가가서 희생하게 하며 남북한사람들이 민족공동체로 하나 되게 한다.통일은 대한민국이 아시아로,

유럽으로,북미로 뻗어 나아가는 물류 중심국가가 되도록 만들 것이다.복음이 대한민국을 개인주의로 인한 망국의 길에서 돌이켜 통일국가로, 세계중심국가로 바꾼다. 그래서 복음신앙은 국가를 사랑하는 애국이다.

 

6. 복음통일은 온 국민이 기뻐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반도의 통일은 ‘온국민이 즐거워하는 통열’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우리들의 꿈이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이유는 수 없이 많다.먼저 북한이 생각하는 통일의 목적과 방법이 남한과 다르며 남한사회 안에서도 통일정책이 나뉘어져 있다.심지어 20041건도에 YMCA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청소년들 40%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른들은 북한을 대하는 관점이 대립되어 있으며 북한이탈주민들과 남한사람들이 한공동제를 이루지 못한 재 서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온 국민이 즐거워하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는 일은참으로 어려 울 것이다.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성경에서 통일국가를 이룬 지도자는 이스라엘의 다윗이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이스라엘은 마침내 온 국민이 즐거워하는 통일을이루게 된다.그 비결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구한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삼하6 : 15) 에서 보면, 다윗과 온 이스라엘 국민들이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즐거워하고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신 것이다.사실 이스라엘은 갈등과 동족상잔의 전쟁의 역사가 길었다. 지파 간의 분열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할하여 점령해 나아가는 여호수아시대와 사사시대 400 년 동안에도 지속된다. 사사시대에는 분노에 찬 이스라엘 연합군이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였다.두 번에 걸친 장기간의 골육상전(骨肉相戰)의 전쟁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베냐민 지파는 겨우600 명의 장정만 남게 되었다. 그 이후에 이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최초의 왕 사울이 세워진다. 사울이 전쟁에서 죽자 권력자들 °111개 지파를 규합해서 시울의 이들 이스보셋을 지도자로 세우고 마하나임을 수도로삼아 국가를 세운다.나머지 남은 유대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삼고 헤브론을 수도로 삼아 나라를 세웠다. 이 두 나라는 계속 골육상전(骨肉相뿔예의비극 전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분단된 나라를 다윗을 사용하셔서 통일국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붙들고 다윗은 마침내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다윗은 수도를 마하나임도 아니고 헤브론도 아니고 예루살렘으로 삼는 지혜로운 정치를 펼쳤다. 외교적으로는 두로 왕과 히랍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블레셋을 쳐서 영토를 확장했다.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정치적 수도를 잘 정하는 것만으로는, 외교적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통일을 이룬 것으로 보지 않았다.온 이스라엘 국민들이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것을 진정한 통일로 보았다.다윗은 분단된 열두 지파들이 마음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정신’,즉 ‘야훼신앙정신’임을알았다.그래서 다윗은 오벤에돔의 집에 있던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삼렘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법궤를 모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상정하는 것이다.야훼신앙으로 열두 지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온 이스라엘이 통일을 즐거워할 수 있었다.이 모습은 사무엘하 6 : 15에 “다윗과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로묘사되어 있다.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의 공통된 정신인 ‘야훼신앙’으로하나를 이루는통일의 축제를 바라보며 시편 133 편이 쓰였다.“보라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어떻게 다윗은 이스라엘을 온 국민이 즐거워하는 통일국가로 만드는 지도자가 되었을까? 다윗은 영적인 지도자인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또한 정치일선에서 만난 정적(政敵사울을 통해서 훈련을 받으며 깨닫게 된 것이 많았다.다윗은 사울이 상황에 따라 신앙윤리가 바뀌는 것을 보았다.사울은 블레셋과 극한 대립 시에 두려워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제사를 지냈고,사무엘로부터 비판을 받자 사울은 회개치 않고 상황상 어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서 결국에는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이 모든 것을 가까이서 지켜 본 다윗은 비합리적이지만 크고 작은 일들을 여호와께 물으며 판단했다.그 결과 다윗은 정적을죽일 기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맡기며 원수도 사랑하는 포용력을 보였다.사울은 인생목표가자기 영광이었지만다윗은그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 통일국가를 이루었다.사울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다윗은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백성틀에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이스라엘 국기에 이스라엘의 영토를 상정하는 두 개의 푸른 선들 중간에 다윗의 별이 새겨져있다.다윗이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마다 수많은 결정들을 할 때마다 하나님을 어떻게 붙들었는지는 다윗이 지은 시편들을 보면 얄수 있다.

“나의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 : 1).

“여호와여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여호와는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도움을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시28 : 7).

이렇게 다윗이 쓴 시가 시편 150편 중에 무려 73편 이상이다.다윗은그의 손으로 여호와를 붙들고 그 어려운 통일국가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한 지도자였다.다윗에게는 자신은 어리석고 미익탤 사람이지만 여호와로부터 지혜와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여호와의 손을 잡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여호와여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염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라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 : 11-12). 다윗은 그의 손으로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속해있는 하나님을 믿고 붙들었다.다윗은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었다.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존경하는 미국 대통령은 아브라함 링컨이다.그 이유는 링컨이 흑인노예를 해방시켜서보다는 미국이 남북으로분단될 것을 막고 통일국가로 만들어 강대국으로 갈 수 있는 기틀을 놓았기 때문이다 4월 30 일 미합중국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 선포된 기도와 금식에 대한 선언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은 사람의 의무일 뿐만아니라 모든 나라의 의무입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을 겸손하게 자백하는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을 수 있는 것이라는 확선을 갖게 합니다.성경에서 선포하고 역사를 통해 입증된 대로 최고의 진리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신 나라들만이 참 복을 누리게 됨을 믿는 젓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 당시 미국의 전체 인구는 3천만 명이었다.미국이 남북으로 분리되려고 할 때 60만 명의 전사자가 전쟁을 통해서 분단이 아닌 통일을 지켰던 것이다.그는 하나의 미국을 지커기 위해 수많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끊임없이 시편을 읽고 외우며 다윗을 본받으려고 했다.미국 국민들이 링컨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미국의 분단을 막고 통일국기를 이루어서 강대국으로 갈 수 있는 기틀을 잡았기 때문인 것이다.통일독일의 첫 번째 대통령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케는 1994년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에 독일 언론들로부터 ‘국민의관섬과 의지를 결집시키고높은 차원의 정치를 구현했던 지도자’라는평가를 받았다.그가 1990년 10월 3일 ‘통일의날’연설한 연설문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모든독일 국민에게 효력이 있는 독일연방공화국 헌법 전문에는 이 순간 우리를 모두 감동하게 하는 다음과 같이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율적인 의사결정으로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성한다. 우리는 통일된 유럽에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중차대한 과제들에 대해서 주님과 세계 모든 국민들 암에서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설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독일이 주님 앞에서 책임을 통감한다는 고백이다. 바이츠제커 역시 다윗의 시편을 즐겨 읽으며 하나님을 붙들었다. 그 결과 바이츠제커는 대통령 재임기인 1990년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독일 통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오늘날 독일은 유럽연합을 지도하는 중심 국가가 되었다.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 69년의 역시률 보내왔다. 이제 2015년도에는 분단 70년이다.그 동안 여러 가지의 통일논의가 이루어져 왔다.모두 그근거가 어디로부터 나왔느냐도 중요하고 얼마나 온전하게 나왔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부터온전하게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다.이를 통해서만 통일에 대한 ‘공통된 정신’의햇불이 온 국민들 마음에서 타오르게 될 것이다.다윗이 ‘야훼신앙’으로 이스라엘 모든 국민들 마음에 진정한 통일의 불을 지폈던 것처럼,한반도에서도 어떤 지도자가 나와 온 국민이 즐거워할 통일의 공통된 정신으로 온 국민들 마음에 불을 지피게 될 것이다.이를 위하여 그 대한민국 국가의 지도자는 한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영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해야 한다.그런 지도자에 의해서 한반도는 온 국민이 즐거워하는 통일을 맞이하게 할 것이다.

 

7. 나오는 말

분단 70 년을 맞는 2015 년에,남북한사람들 모두가 복음의 역사로 남북한사람들의 마음에 70 년 동안 서로 다른 체제와 문화에서 살아오는 동안다르게 형성된 민족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복음창조통일공동체가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남한 땅으로 들어온 북한이탈주민들을 품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한다.진정으로 통일을 통한 선진국으로 가며 아시아의 중심국가,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기 위해선 북한사람들의 정신이 먼저 살아나는 복음이 절실히 필요하다.또한 남한사람들의 개인주의가 공동체주의로 바뀌는 복음의 역사가 필요하다.온 국민이 기뻐하는 이 복음통일을 이룰 지도A}들이 한국교회에서 준비되어지기를 기도한다.

 

 

신약학자가본 복음의 삶 정창교 교수(대전신학대학교)

 

1. 들어가는 말

세간에서 들려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그 원인은 일차적으로 그리스인들의 삶이 복음적이지도,윤리적이지도 못함에 있다.이런 상황 가운데 제99회 총회 주제가 “그리스도인,복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정해진 것은 그리스도인틀의 정체성을 되물어,세상 가운데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가치관으로 살아왔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며 다시 ‘복음의본질’(ad fantes)로 툴아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세부적인 부제를 “(1) 복음의 사람,(2) 복음으로 사는삶,(3) 복음으로 하나념 나라 확장하기”로 정하여,복음에 대한 정의 및 복음으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그리고 새로운 선분을 소유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삼아야 할지,즉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리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위의 세 가지 부제는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한 해답은 한국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고,교회 안으로 빌려드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시대적 흐름을 막아내는 데기여해야 한다.또한 복음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성경적인 삶의 원리를 재조명하는 시도여야 하며,결국 한국교회에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과 같은 선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라온’은‘좋은소식’(good news) 을 의미한다.그리스 로마 문학에서는 새로운 황제의 탄생이나 등극 또는 선행과 관련된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유대문학에서는 같은 어원을 가진 동사(유앙켈리조마이)가‘여호와가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선다’는사실을 선포할 때 사용되 었다(사40 : 9; 52: 7 ; 용 2 : 32 ; 나 1 : 15). 하지만,바울은 ‘복음’이라는말을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며, 예수그리스도 사건은 그의 ‘십자가의죽음과 부활’을가리카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즉,바울서선에서는 바울이 전한 예수의 오섬과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의미한다(롬1 : 1- 4,16; 고전 15 :1 ; 고후 2 : 12). 그리고 ‘내가복음을 전한다’라는동사는 이 메시지를 입으로 전한다고 할 때(롬1 : 15 ; 고전 1 : 17; 9: 16) 사용되고 있으며,동시에 ‘그리스도를전한다’(고전1 : 23; 15: 12)라는 표현과 대체 가능하다.이와 같은 맥락에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자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 이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역사를 복음의 내용과 동일시하게 되고,70 년경 등장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드러나듯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책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됨에 따라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3. 다른 복음과 참된 복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로마서 에베소서,빌립보서 등에서 강조하고 있는 이신칭의(以信稱義)사상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핵심이자 성경이말하는 복음의 성격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갈라디아서에서 등장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율법과복음’인데,사도 바울은 ‘복음’과‘다른 복음’(갈1 : 6 → 9) 으로 구분하고 있다.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선언한다(갈 2 : 16). 즉,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롭게 됨을 주장하는 것은‘다른복음’이요,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됨을 가르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은혜의 복음이요 참된 복음이라는 것이다.이에 대해 루터는 두 가지 의(義)로다시 풀어 설명하고 있다.즉,율법적인 의는 ‘능동적인 의’,‘공로에의한 의’로서인간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질 수 있고,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의이다.또 한 가지 의는 믿음의 의로서 ‘수동적인의’,‘은혜의의’,‘그리스도의의’로특징지어지며,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건에 기초한 인간에게 거저 주어진 의(義)

이다. 그런데 루터는 세상에 사는 한,두 가지 의(劃의 영향 가운데 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그는 육은 율법적인 의에 의한 능동적인 의에 고발 받고괴롭힘 받지만, 영은 수동적인 의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기뻐하고 구원함을 받는다고 설명한다.그래서 루터에게 있어서 소위 ‘우리의신학’은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를 혼돈하지 않고 정확히 구별하도록 가르치는 신학을 말한다.그것은 ‘율법과능통적인 의를 치워버리고,복음을 통하여 모세와 율법을 제거하고,고통 받는 자와 죄인을 위하여 오선 그리스도의 약속을 보여주는 피동적 의를 내세우는’신학을 말하는 것이다(김창선"사도 바울의 투쟁J ,32-34). 루터는 이 구별이 입으로 말하기는 쉬우나 경험과 실천의 차원에서는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하지만 우리가 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거부했던 다른 복음,즉 율법의 공로에 의한,인간의 능동적인 의는 결국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에(갈 4 : 9) 그리고 ‘종’(4갈: 1,3,7)의 자리에 여전히 머물게 한다. 하지만 은혜의 복음에 근거한 의는성령에 의해 이꿀림 받을 뿐만 아니라 ‘아들’ (4 : 5 -7) 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부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였다.이와 같이 율법을 초월하여 믿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 (5 : 1)는 율법의 멍에,종의 멍에가 아닌‘사랑안에서 노릇’하는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준다. ‘짐을서로 지며’(6 : 2) ,세상 가운데 ‘션을행하는 자들 (6 : 9) 로 살아가게 된다.우리와 우리의 공동체와 삶의 터전에서 선과 사랑을 실천하며 또한 그것의 행하는 열매를 맺게 한다.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적대A}들이 내세운 육체의 자랑 대신 우리는 ‘주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6 : 14) 만을 자랑하는 복음의 삶을 추구할 것을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율법의 공로에 의거한 능동적인 의는 우리를 끊임없이 제한하고 옥죄지만 은혜의 복음에 근거하여 우리에 거저 주어진 수동적인 의는 늘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더 큰 섬김으로, 더 큰 사랑의수고로 이끌어 나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함께 풍성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공로를 의지하는 다른 복음이 아닌 참된 복음대로 삼아야 한다.이 참된 복음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세상 섭기고 봉사하게 하여 이웃까지 풍성하게 만든다.

 

4. 팔복에 드러난 복음의 사람

본 주제의 신약의 구절은 마태복음 5 : 3~12 의 활복에 관한 말씀이다.복음의 삶을 섣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이자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복음의 삶을 자세하게 표현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마태복음 내에서 팔복은 마태복음에서 뼈대를 이루고 있는 다섯 개의 설교(5-7장,10장,13장,18장,24 - 25장)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산상수훈 (5 -7장)에서도첫머리에 등장한다.팔복은 앞으로 전개해 나갈 하나님 나라에대한 출발점이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 산상수훈과 팔복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가르침인가이다. 즉,예수님이 지칭하신 ‘복있는 사람’이누구인가의 문제가 된다.마태복음 5 : 1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선다.이때 ‘제자들’이나오는데,여기에서 언급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쫓는 지들의 통칭으로 볼 수 있다.그러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의 두 입장,즉 산상설교의 청중을 열두 제자로만 국한시카느냐 아니면 확장시킬 수 있느냐로 나눠지는데, 폐쇄적인 단체가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 제자로 부름 받은 교회가 그 청중이라고 간주할 수있다.이 시대로 말하자면,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복되다’(마카리오스)의 의미

복음의 사람,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개념 중의 하나는 ‘복있다’,‘복되다’에해당하는 ‘마카라오스’이다. 특히마태복음 5 : 3~12 에 등장하는 소위 팔복은 ‘왜냐하면’이라는귀결절로서그 복의 참된 의미를 부연설명하고 있다.헬라어 ‘마카리오스’는히브리어 ‘아쉬례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대단히행복한’또는 ‘지극히운이 좋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즉,히브리어 ‘아쉬레’는현 상태에서 지극히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이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상과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을 누리며 느끼는 내적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여기서 분명한 사설은 행복의 개념이 세속적인 젓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차원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2) 팔복(마5: 3-12)

팔복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특정을 가진다면, 김지철의 구분을 따라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세 가지 차원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즉,처음 세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대변되는 ‘마음이가난한자,애통하는 자,온유한 자’는세상의 지배적인 논리인 소유적 차원이 아닌 존재적 차원에 대한 설명이요,둘째는 복음의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삶의 태도와 목표를 지니고 삼아야 하는지(의에 주라고 목마른 자,긍홀히여기는 자,마음이 청결한 자)를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셋째는 복음적인 삶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 차원(화평하게 하는 자,의를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으로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복 있는 사람의 세 가지 차원을 하나씩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심령이가난한 자들’(5 : 3) 로서,마지막 여닮째 복과 같은 이유,즉 ‘하늘나라가그들의 것이다’라고말함으로써 수미상관(indusia) 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본문에서는 누가복음에서와 같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녹6:2 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심령이’(프토뉴마티)를삽입한 것은 이사야 61 : 1의 반영으로 보이며,물질적으로 가난한자들에게 특징적인 마음 상태를 소유한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특히 ‘심령에 있어서’(토프뉴마티)는 문법적으로 관계의 여격 (dativus relatianis ,장흥길, 「산상설교J. 68)으로 ‘심령과의관계에서’라는뭇으로 해석될 수 있다.그러므로 누가에 없는 이 표현은 실제적으로 가난한 자나 약자에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할 수 있다.

복 있는 사람들인 ‘가난한자들’(호이프토코이)에게 있어서 특징적인것이라면 사회적-경제적 관계에서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고,하나님께만 의존하며,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하나님만 바라보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세상에 의존하지 않고,그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마4 : 20,22) 하나님께만 의존하기로 결단한 자들인 것이다. 어원적으로 살펴볼 때도 구약에서 ‘가난한자’를대표하는 ‘아니’와‘아나브’는힘이 없어 힘을 가진자들에게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호소할 수 있는유일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들로 표현되고 있음을확인할 수 있다(시 14 : 6; 25: 16; 69: 29 ; 사 61 : 1 등).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있다(시34 : 18; 40: 17 ; 사 61 : 1- 2). 결국 히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곧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것으로 인간의 노력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난다.

 

두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애통하는자들’(5 : 4) 로서 현 상황에 대해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사야 61 : 2하반절(‘모든슬픈 자를 위로하되’)의맥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샤、f야 61장에서 바라본다면 애통하는 지들이 애통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인해 이방세력에 압제당하고,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사 61 :1-4). 결국 그들의 애통은 의로운 자들이 고통당하는 반면,악한 자들은번영함에서 오는 철저한 상실과 무력감과 절망적 현실적 상황에서 오는애통이다(양용의,「하나님의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J ,353). 이와 같은 애통함이 제자들에게도 공감을 가지는 것은 제자들 역시 현 세상 가운데 탈취당하고, 압제당하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마 5: 10-12). 여기에서 우리의 상황과도 연결지어 볼 때 빈익빈 부익부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상황이다.그러한 상황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그 고통에 동참하는 삶이 애통하는 삶이다. 하지만 애통하는 지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위로를 받을 것’이라는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위로를 받는다’가현재 시제가 아니라 미래 시제로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받게 될 위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사람의 위로가 아닌 인간 내면의 김숙한 슬픔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온유한 자들 (5 : 5) 로서 시편 37 : 11 의 맥락 가운데 이해되어져야 한다.시편 37 : 11의 ‘온유한자들’로번역된70인역의 ‘호이프라에이스’에해당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나빔’인데위,에서 삼펴본 바와 같이 어휘의 의미에 있어서 첫 번째 복과 매우 유사하다.또한 그들은 ‘작은자’,‘겸손한자’(Georg Eichholz) 들로 규정될 수 있으며,특히 예수님 자신의 성품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마 11 : 29) , 본문에 나타난 ‘온유한자들’은영어성경에서 ‘meek’,‘gentle ’로,독일어 성경에서 ‘Sanftmlitigen ’으로번역되고 있다.즉,온화하고 부드럽고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누리는 행복을 맛보고 있기에 대인(對人)과사회에서 그러한 자세로 드러

나게 되는 것이다.온유한 자들이 받을 복은 ‘땅’인데일차적인 의미인 이스라엘 영토를 넘어 종말론적인 의미로서 천국의 비유적 표현,즉 종말롱적인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그렇다면 미래형으로 쓰인 ‘상속받을 것이다’에따라 ‘온유한자들’이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 나라를 상속받을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사 65 -66 장 ; 계 21-22 장),

 

네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들’(5 : 6) 로서 구약의 시편 42 : 1~2,107 : 5~9 과 이사야 55 : 1~2 등을 반영하고 있다.제자들이 목마르게 추구하는 ‘의’(義)마는태복음서에서 중심 주제어이며,하나님께서 주시는 종말론적인 선물이다 (G. Eichholz). 또한 길리히 (R A. Guelich) 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의메시야적 통치를 통해 선물로 주어진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에 의거하여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뭇에 맞는 행동”을지칭한다(마 5 : 20; 7: 21). 여기서 ‘의에주리고 목마트다’라는의미는 ‘의를간절하게 구한다’는의미이며,특히 주목할 것은 귀결절에서 언급되는 ‘배부르게될 것이다’라는표현이다. 이는 미래수동태이자 신적 수동태로서 배부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장흥길,71).

 

다섯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긍흉히여기는 자들’(5 : 7) 로서 표준 새번역과 공동번역 개정판에서 ‘자비한사람’,‘자비를베푸는 사람’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는데,이 자비는 그의 가르침은(마 6 : 12; 9: 13 ; 12 : 7 등)물론 그의 모본을 통해서도(마 9 : 27 ← 31; 17:14-18) 그 중요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또한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비가 베풀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마5 : 43 -48 ; 녹 10: 29-37) ,만 탈란트 빚진 자의 비유(마18 : 21- 35)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우리 자신도 자비를 행할 것을 요청하선다.그 비유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바,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다는 것이며,나아가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자비를 또한 베풀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그러므로 다섯 번째 복 있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부터는 하나님이 하신 일,은혜로 주어진 우리의 신분과 복은 물론 우리가 행해야 할 과제도 또한 통시에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현재 우리의행위 가운데 드러나야 할 자비로운 모습은 장차 닥쳐올 섬판 때에 결정적인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와 연관되어,결국 제지들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여섯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청결한 자들’(5 : 8) 로서,시편 24 : 3~4 을 반영하고 있는데,특히 시편의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진실함과 나뉘지 않는 충성심을 가진 자를 뜻한다.즉,윤리적 행동과 마음의 일치를 의미한다(양용의,361). 하나님께만 온 관심과 사랑을 모으고 그분께만 충성을 바치는 자들 oj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다. 이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을볼 것이다’라는약속은 구약에서 두 가지 다른 입장으로 나타난다. 먼저는 하나님을 본다는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라고 규정함이요(출 3 : 6; 19: 21; 33:20 ,23),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매우 축복된 특권으로서 규정하고 있는데(시11 : 7; 17: 15 ; 용 19 : 26) ,이 두 번째 특권을 아무런 자격 없는 제자들에게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일곱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평회를이루는 지들’(5 : 9) 로서,칠십인역과선약성경 전체를통해 이곳에서만등장하는단어이다 (Hapaxlego menan). 이는 단순히 화평한 상태에 있는 자나 화평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는 자가 아니라 직접 그 자신이 화평(에이레네)을만드는 사람들을 말한다.그래서 표준새번역은 ‘평화블이루는 사람’,공동번역개정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으로번역하고 있다.특히 이 ‘화평케하는 것’은복의선언 단락 중 가장 실천적인 과제이며, 성경이 의미하는 평화(화목-관계가 좋아짐,화합,조화-하나가 됨,쉽을 얻음 안식함, 건강 마음이 강건함,장흥길, 77)와 관련되며, 또한 사랑 계명 (마5 : 38 - 48)과도 관련되어 있다.그리고 귀결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려질 것이다’(사역)라는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미래수동과 신적 수동을 통해 다시 한 번 그렇게 불러 주설 분은 ‘하나님’이시라는점이 강조되고 있다.한 가지 첨언할 것은 평회를 이루거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사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나 서로의 이익과 맞물리거나 힘의 경합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보하고 예수님처럼 다른 뺨을 대주며,속옷뿐만 아니라 겉옷까지 그리고 5리가 아닌 10리를 동행할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즉,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손해를 볼 준비가 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넉넉한 마음은 ‘하나님의통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닮 번째,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의를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틀’(5 :10 -12) 이다.본문에서 ‘의’(義)마는태복음에서 7번(마3 : 15; 5: 6,10,20; 6: 1,33; 21: 32) 이나 언급되는 핵섬 용어로서 마태복음, 좁게는 산상수훈의 윤리를 이해하는 열쇠어 (Key word) 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결어가신 그 길은 의의 길이요,제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의도 하나님의 의이다 (5 : 20). 또한 보상을 바라며 인간 스스로의 업적을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의는 배제되어야 하며 (6 : 1),제자들은 늘 하나님의 의를추구해야만하는데 (3 : 15; 5: 6; 6: 33) ,그 의의 핵섬 내용은‘사랑’ (5 : 43 - 48; 22: 34 - 40) 이며,그 의는 횡금률로 요약될 수 있다 (마7 : 12).

비록 구약에서 박해받는 것을 행복으로 규정한 곳이 없지만,현실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제자들의 가치관,세계관, 그들의 삶이 추구하는 방향과 목표는 소위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될 수밖에 없고,그런 요소들은 다수의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끼쳐,결국 박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박해를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오그메노이’는현재완료형 분사 시제로서 실제로 제자들이 박해를 이미 당하였고, 현재도 계속하여 박해를 당하고있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베드로전서 4:4 의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는 언급은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어 구별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해까지도 올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결론적으로 복 있는 지들은 이제 ‘웃을수 있고,기뻐할 수 있다’(5 : 12).비록 세상 가운데 손해를 보면서 살아가지만 그 섬령이 가난하고, 애통해하며,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깨끗하여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선앙의 눈으로 살아가며, 화평을 만들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는 지들은 결국 복 있는 자들,행복한 자들,그리고 복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왜냐하면’으로이끌어지는 귀결절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복들은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받게 될 보상들이지만 첫째와 마지막 여닮 번째 복음으로 사는 자들이받게 될 것은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즉 현재 경험하며 또한 현재 누리며살아가는 ‘하나님나라 통치’의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복이다.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닮 가지 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살아가길 바라시는 ‘복음으로삼아가

는 사람의 전형(典;1Jl)f’이다가.장 기본적으로 존재에 관해 처음 언급된‘심령이가난한 자’,‘애통하는자’,그리고 ‘온유한자’의세 유형의 특정은세상의 물질적 소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념어 하나님께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적 특성이 강조되었다. 이어 하나님의 선하신 뭇에 집중하는 ‘의를추구하며 사는 삶,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과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삶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잘 지적해 주고 있다.나아가 공통체를 향해 ‘화평’을만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뭇인 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희생해야 함이 마지막 두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의 모습 가운데 강조되어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복음의 삶과 그 원리

복음의 삶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의 사건을 믿음으로,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존재,새사람 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세상 가운데 사는 원리를 말한다. 소위옛 것인 세상 가운데 통용되던 삶의 원리,육체의 소욕과 정욕의 추구를따라 사는 삶의 목적,가치관과 방향들을 모두 버리고,하나님의 약속에의지하여 그분의 손을 잡고 성령 안에서 한 걸음 한 결음 믿음으로 동행하는 즐접고 가슴 벅찬 삶의 원리이다.세상에서 지배적인 소유적인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삼아가는하늘나라를 향한 분명한 목적 있는 삶이요 원리이다. 이것은 세상에서는깨달을 수도,맛볼 수도,경험할 수도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삶의 원리이다.

 

1)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보여주신 복음의 삶,그리고 그에 따른 가르치시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바로하나님의 말씀이다.즉,복음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가르침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사도 바울의 언급대로 ‘구원에이르게 하는 지혜’를가져다주는 구원론적 의미 이외에 ‘교훈과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팀후3 :15-17). 이러한 성경의 교육적인 의미는결국 하늘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적절한 지침을 가져다주는 교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성경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그 가운데 개입하셨고,어떻게 인간들이 반응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성경에 나오는 이러한수많은 예시적,예표적 사건들을 통해 성경은 21세기의 변화무쌍한 시대적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절한 기준과 지침과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뭇 가운데 머물며,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룩’(덤4전: 5)한 삶의 한 방편이다.또한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과 진보를 이룰 수 있는 핵섬적인 전리와 교훈이 담겨 있기에(골2:2 ← 3; 엠 4 :13 -15) ,성경의 가르침은복음의 삶을 잘기에 가장 적확한 가르침이며, 가장 중요한 원라이다.

 

2) 성령의 이끄심대로 사는 삶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성부께서 보내 주시고 그 성령께서 당선이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므로(요14 : 26)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요 16 : 20). 사도 바울도 실제적인삶에 있어서 세부적인 일상의 수많은 결정을 성령의 이끌림,성령의 가르침으로 할 것을 제시한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 아닌 성령을 따라살아야 하며,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야 할 것을강조한다(롭 8 : 14 ; 갈 5 : 16). 특히 어떻게 사는 것이 이미 성경에 드러난 계시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움직이셔서 우리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돕는 분이시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 더욱 명확하게 그 의미가 밝혀지게 될것이다(멤후1 : 21). 또한 성경에 드러나 있는 구체적인 예가 아닌 낯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복음에 대한 적용을 할 때에도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깨닫게 하시고,생각나게 하신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사도바울은성경의 가르침 성령의 인도하심과구별되는또다른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즉 하나님의 뭇을 쫓을 것을 우리에게 권변한다.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편지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님의뭇’(살전4 : 3; 5: 18)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그 구체적인 내용은 ‘거룩함(’4 :3)과 ‘항상기뻐하고,쉬지 말고 기도하고,범사에 감사하는 것’으로써하나님의 성도들을 헝한 세부적이고 실제적인 바람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베드로는 이 단어를 두 가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데,먼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수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뭇’(벤전3 : 17)을 ‘선행’으로 명시한다.즉,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해받고 고난당하는 상황에서도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밝힌다.또 한번은 베드로전서 4:2 에서 언급되는데, 이방인의 뭇(벤전4 : 3)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인 되기 이전의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사람의 정욕(벤전 4 : 2) 대로 살아왔던 ‘과거의삶의 방식과 양태와 내용’과전적으로 반대되는 삶을 말한다.즉,하나님을 따라(뻗전 4 : 6) ,그리스도를 따라 (2 :21)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뭇을 따라 사는 삶이다.

 

6. 복음의 삶에 방해가 되는 것들과 대안들

 

1) 옛 것과 뒤에 있는 것 대신 앞에 있는 것으로

누가복음 9 : 57 이하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사람의 후보를 예로 드시면서, 제자로서의 삶이 쉽지 않음을 지적하선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어디든지 쫓겠다고 자원하여 따르겠다는 첫 번째 후보에게는 길거리에 쉽게 볼 수 있는 여우들도 굴을 가지고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답하시면서 그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기를 가르쳐 주신다. 이어 예수님의 ‘따르라’는초청에도 불구하고아버지의 장사를 핑계로 예수님 따르기를 미루는 두 번째 후보에게는 아버지의 장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것을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는 따르나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이유 있는 변명을 하는 세 번째 후보에게는 ‘쟁기를잡은 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 합당치 않다’라고말씀하신다. 특히 예수님께서세 번째 후보에게 하신 말씀에 귀 기울여 본다면, 먼저 ‘뒤를돌아본다’에해당하는 헬라어는 미완료의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즉,헬라어 용법상 과거의 반복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를 사용하여 쟁기 잡은 자가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반복하여 돌아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즉,예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목표와 과제를 부여받은 사람이 그 목표가 놓인 앞을 향하여 탈려갈 때에 반복하여 뒤를,과거를 돌이킨다는 말이다.이 돌이킴은특히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고 참된 기쁨뿐만 아니라 비난과 고난을 수반하는 길이기에 그 힘든 순간에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가리킨다.이는 마치 광야에서 힘들 때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같다.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늘 뒤를 돌아보게 하고 앞에 계신 주님의 모습과새로운 목표를 흐리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벌립보서 3장에서 ‘뒤에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빌3 : 13) 라고 말하면서 ‘앞에있는 것’을향해 달려간다고 말한다.바울에게 있어서 ‘뒤에있는 것’은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지나온 삶이라는 의미를 넘어 특히 그토록 열심히 추구하던 율법에 충실한 삶을 의미한다.바울은 그것을 배설물 같이 여기는 가치관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삶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어 지금까지 쌓아온 흠 없는 율법적인삶(빌3 : 6) 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께 잡힌바 된 삶,하늘로 방향 지어진 새로운 삶으로 몰입하여 투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것과 뒤의 것이 아닌 우리를 붙잡아 주신 주님이 지시하시는 새 방향(창12 : 1- 3 ; 히 11 : 8 -11) 으로 내게 주어진 쟁기만 잡고 하늘 위(곧3 : 1- 2)의 훗대를 향하여 암만 보고(녹9 : 62) 나아가야 할 것이다.더 이상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2) 욕망(에피튀미아)대신 성령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약에서 38회 등장하는 ‘에피튀미아’는일반적으로 욕망,정욕 등으로번역되는데,단순히 성적인 욕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죄악 된 욕망을 의미한다.또한 하나님의 뭇에 반대되고 금한 것에 대한 욕구를 의미한다.가장 먼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등장하는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 (갈5 : 17)은 성령의 인도하심에따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그 열매는 @ 성도덕을범한 죄틀(음행,더러운 것,호색)@종교적 영역에서 온 죄(우상숭배,주술)@ 대인관계(사회적)에서의죄(원수맺는 것,분쟁,시기,분 냄,당 짓는 것,분열함, 이단,투기)@ 특별한 이방인들의 죄(술취함,방탕함)로 구분될 수 있다.이와 같은 구분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갈 때 개인은 물론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즉 사회적인 죄악으로확장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이처럼 은혜의 복음대로 삼아가는 사람은 성령의 이꿀린바 되어 성령의열매를 맺는 사람들이지만, 복음대로 삼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육체의 욕심에 이꿀린바 되어 육체의 일을 하게 된다.베드로전서 4:2 에서 ‘그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는더 이상 자연인으로서 하나님과대항하는 육체의 욕심대로 따라 살지 말 것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그리고 그 이후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성령에 이끌린바 된 삶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표현하고 있다.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성령을 따를 때 이와 같은 욕망을(갈 5 : 16 ;롬 8 : 13) 이길 수 있을 것이다.

 

7. 복음의 삶의 결과

 

1) 하나님께 영광(s이ideo gloria)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모든 인류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영광을 위함’이다(고전 6 : 20; 10: 31). 이것은 요리문답 1,2번에 명시되어 있듯이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고, 또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방법대로 삼아가는 복음의 삶을 삼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우리에게 따가운 시션을 보내고 있는이웃들로부터도 하나념께 영광을 툴리는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많은 병자와 귀선들린 자들을 고쳐 주셨다.이때 곳곳마다 고침 받은 사람과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눅5 :25 - 26; 17: 18)을 돌렸다는 보도가 함께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마태복음 5 : 13 이하에서 언급하듯이 우리가 복음의 삶을 잘 때,즉‘소금’으로서맛을 내고 ‘빛’으로서사람 앞에 밝히 비출 때,드러나는 외부에서의 결과는 그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외부의 사람틀이 ‘하나님께영광을 돌리게’된다는 것이다.

 

2) 칭송 받음

복음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요17 : 9 -11)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세상에서의 삶에서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그라나 그리스도인들이 꼭 펼요한 소금과 같은 존재로,그라고 어둠을 밝히는 존재로서(마 5 : 13 → 14) 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한다면, 오히려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그 가능성은 먼저 사도행전에서 찾이볼 수 있다.복음의 삶을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온 백성은 칭송을 하였고(행2 : 47; 5: 13) ,또한 감히 상종하지 못할정도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행5 : 13).이러한 칭송받음이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아니더라도 외부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복음적 요소들은 자기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고(고전 10 : 24) ,자기 권리를 먼저 포기할 줄 알며,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며(마5 : 9)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마5 : 7). 이러한 대(對)사회적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에는 결코 비난이 아닌 칭송이 뒤따를수밖에 없다.

 

3) 선교적 열매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복음의 삶을 살 때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결정적인 결과는 선교적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먼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참된 복음의 삶을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에게 주께서는 날마다 믿는 사람들을 더하게 해 주셨다(행 2 : 47).베드로전서 3장에서의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하는 남편을 둔 여인은 자신의 정결한 행실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벤전3 : 1). 이처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적인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이세상에서 선행과 복음의 삶을 살 때 칭송과 함께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돌이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8. 나가는 말

위에서 복음의 삶이 무엇인지 신약성경을 중섬으로 잘펴보았다.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이며 더욱 간단히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시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성령과 함께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는 가는 삶이 복음의 삶이다. 이러한복음의삶을잘드러내주는팔복은우리가어떤존재인지,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었다.또한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의’에주라고 목말라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함을 알려 준다.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갈지에 대해 내 것과 내 권리를 포기할 줄 알며,긍흘히 여기고,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알려 준다.우리가 이를 행할 때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지금 여기서(마5 : 3,10)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친히 갚아 주시고,보상해 주실 것이다(마5:4-9). 또한 복음의 삶은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바처럼 율법의 공로에 근거한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믿음으로거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세우는 삶이다.그러므로 늘 하나님께의존하는 삶이다.특히 그 성경의 가르침,성령에 의해 이끌림 받으며,하

나님의 뜻에 늘 순종하는 삶이다.또한 현실에서 우리가 복음의 삶에 방해가 되는 옛 것과 육체의 정욕을 다 이겨내고 늘 성령을 따라 살 때,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선교적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이러한 복음의 삶을 살 때 한국교회는 자연스럽게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되고,오히려 교회를 비방했던 사람들의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다.

 

 

 

부록1. 산상보훈 8복

 

* 산상수훈 : 혁명적 설교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천국시민의 대 헌장이다

그리스도인의 복: 영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영적인 것 현세적인 것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먼저 추구해야한다 영적 복=평안 자유 기쁨 육적 복은 일시적인 것이다

* 진정한 행복은 우리 안에 있다 이 복은 빛처럼 널리 퍼진다

하나님 은총을 입은 자들은 그것을 잃지 않도록 더욱 노력해야 한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

*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참 행복이 불가능하다 자기의 공로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 시32;1-2 모든 축복은 죄 사함으로부터 시작된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복의 길을 간단하게 제시했으나 인간은 돈 명예 등 행복을 복잡하게 추구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게 보여서는 않된다

* 산상보훈(마5:-7: )에서 8복은 하나님은혜로 복은 받은자의 정체성, 그리고 벅받은 자의 삶의 태도. 그리고 복을 세상에 확장시키는 의무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팔복의 실천은 복음의 삶을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복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복을 선언하고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팔복의 말씀을 통하여 실천적 복음의 삶을 팔복의 삶으로 구현돌고 결단하자

축복의 전달자, 피스메이커가 되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십자가와 성령을 통한 마음과 근본적영의 변화가 없이는 어떤 복음의 구현과 실천도 가능하지 않다. 이에 새로운 삶과 행동의 실천을 위해 복음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중생의 역사가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다. 남을 위한 존재들로서 거듭남이 없인 결코 하나님의 복된 샬롬의 나라에 입성할 수 없는 것이다(요 3:5).

 

자연적 출생은 자기를 위한 출생이라면 거듭남(중생)은 하나님과 타인을 위한 출생이다 중생(거듭남)은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내 죄값을 치루기 위해) 죽으시고 나를 의롭다하심을 위해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도를 내 구주요 내 사람의 주인으로 믿고 영접하면 누구나 중생한다 신분이 하나님 자녀로 바뀐다 이것은 신분상 거듭남이다 하나님 자녀가된 사람은 평생 하나님 ㅇ느혜와 도우심으로 죄와 싸우며 회개하며 예수님 성품을 닮아야 한다 죄악된 성품이 예수님 성품ㅇ로 바뀌는 것이 성품의 실질적인 중생이다 이런 성품의 중생이 이뤙질수록 믿음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장성한다 성품이 깨긋해지고 믿음이 성장할수록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을 깨닫고 그말씀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구원받아 복을 받은 자임을 알아야한다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살아야 한다

8복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면 누구나 누리는 복이다 주님의 행복선언이다 당신은 가장 귀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자녀되면 8복이 함게 임한다 당신은 8복을 맺는 복된 나무가 되는 것이다 한 성령님의이 나무에 9가지 열매가 맺히듯이 ... 8가지 복이 당신 안에 이미 씨앗으로 심겨져 있다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았어도 복된 나무는 복된 나무이다 (감나무 사과나무 열매 안 맺혀도 나무이다)

존재 자체가 복된 존재이기에 복을 맺지 못하는 것이 기적이다

 

8복은 감탄문으로 되어있다 명령문이 아니다 조건절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하면 나희에게 천국을 준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복: 마카리오스 : 고대 마카르 에서 온말

1) 큰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 어느 한 섬에만 들어가면 행복해지는 경우 이섬을 마카르라고 했다

2) 사막을 가던 여행객이 지쳐 쓰러졌을 대 모든 사람이 다 마실수 있는 오아시스를 만난을 때 이 나그네가 누리는 안식과 평화를 말한다

이땅의 질병 고통중에서 주님을 만나면 무한한 행복자가된다 주님 준비하신 오아시스를 발견!

이복은 영원한 복이다 물질적인 것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자체가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가 복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행복이다 중국동포들은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갖게되면 춤을 춘다

인간은 자기가 행복한 줄 몰라서 불행하다 정신지체아 수용시설에 가서 이틀만 봉사하고 오면 자식 에 대한 불평 사라진다 건강하게 대소변 보는 것만 보아도 감사가 나온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마음이 가난함= -갈급함, 부족함과필요를 강하게 느끼는상태 부족힘을 느껴야 겸손해진다

-전혀 소유가 없는 자이다. 소유가 많은자는 마음이 부자이다 부(富)는 우리 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한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이다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못사는 자( 잠3:5)

-영적으로 가난한 자. 나는 하나님 도움으로 산다는 겸손한자이다(약4:6)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이다

- 허약한 마음이 아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적 가난이 아니다

* 가난; 떳떳한 가난 & 부끄러운 가난(게으름으로) 가난은 죄가 아니다 좀 불편한 것뿐이다

* 우리 사람이 충만해지기 전에 먼저 비워져야 한다 행복은 먼저 마음이 문제이다

*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예수(=천국)를 영접하게 되어 예수의 소유(자녀)가 된다 그러기에 천국이 저희의 것이 되어 천국시민이 되고 복된 자가 되는 것이다

* 여기서 복=최고의 복이다 최고이 복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다 소유해도 천국 소유 못하면 아주 불행한 자이다 천국 모르면 큰 불행이다

* 천국 : 마음 안에 있다, 하늘 위에 있다, 우리들 사이에 있다,

천국 삶은 이땅에서 체험해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도 천국건설의 일꾼이 되어라 에수 계신곳이 천국이다 예수(천국)를 증거하라 이세상은 여관이다 영원히 머무를 곳이 아니다 천국 소유해야 기쁨이 있고 여유가 생긴다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이다 소유로 행복해지려는 사람은 아직도 복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나중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줄 알아야 한다 자기가 부자인줄 모르고 행복한 줄 로미고 살기에 불행한 것이다 인생 삶은 누구나 문제와 고통이 다른다 그대마다 너희는 심령이 간난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 천국이 너희 것인데 얼마나 복된 일이냐 견딜수 있다 라고 위로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마음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구원의 소식을(복음)전하러 이땅에 오셨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18장 바리새인은 자랑의 기도함=심령이 부요한자이다 세리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아닌것

1) 물질 가난이 아니다 지식 가난이 아니다 2) 마음이 약하고 용기가 없는 자가 아니다 자주 낙심하고 절망하는 자가 아니다 3) 마음을 비우는 자가 가난한 자가 아니다 : 기독교는 진공상태를 인정하니 한다 한귀신쫓아냈더니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왔다 (마12:43-45) -기독교는 비우는 종교가 아니다 채우는 종교이다 영적으로 빈 영혼을 채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욕구를 가진다 가져야 한다 비우는 것은 위험하다 “예수님 내 심령이 목이 마름니다 채워주소서! 이렇게 갈구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대부분의 부자는 마음도 부자이어서 재물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찾지않는다

(마19:23-24)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음(심령)이 가난한 자

1) 마음 가난한 자= 프토코스, 너무 가난하여 타인 도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 한 사람

마음이 강해 자기 의로 가득차고 자기철학 주장 편견이 강한자는 하나님 도움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구원하시지 않는다

가난한 마음은 치료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남의 도움을 받으려하지 않는 자는 교만한 사람이다

자기가 비참한 죄인이고 아픈것 병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은 무서운 교만이다 가난한 마음이란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치료를 수용할 줄 아는 마음이다

2) 심령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내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 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다(죽을 때는 다 놓고 간다) 마음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예수는 이 우주의 왕이라고 인정한다

3) 하나님만 의존하고 그의 도움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도우심을 사모하여 헐떡거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살수 없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이다 돈에 목마른 사람은 돈을 찾는다 쾌락에 목마른 사람은 쾌락을 찾아헤멘다 심령이 간나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헐떡거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하나님은혜를 사모하고 그앞에 드리는 사람이다

 

천국은 마음 가난한 자의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 천국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곳이다 교회도 가정도 직장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곳이 천국이다 내 생각 내가치관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헤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인도하실수가 있다 거듭나게 하실수가 있다 교회에서 무엇보다 먼저 가난한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목말라 사모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갈급히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복을 찾아 헐떡거리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며, 이런 자에게 하 나님은 복을 주신다. 심령이 가난해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그를 다스리시고, 거듭나게 하신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 죄에 대하여 자기 허물에 대해 극도로 슬퍼하는 자, 그리고 고난을 짊어지는 자가 애통하는 자이다

사6:1-3 이사야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 하나님을 보아야 자기 모습을 본다

* 자기 허물과 죄에 대해 애통하는 자는 예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痛悔)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도다"

*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위로도 없다 기독교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은 죄를 애통하고 회개한 후에 오는 것이다 인생에 가장 큰 슬픔은 죄에 대한 슬픔이다 슬픔은 그 자체가 축복이 아니다 죄를 애통하는 것이 복이다 슬픔이 불행의 표시만은 아니다 죄를 슬퍼하는 자는 회개하게 되고 새삶이 됨으로 위로와 기쁨이 있다 배드로도 죄에 대해 애통했기에 새사람이 되고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 햋빛만 비추이는 땅은 사막이 된다 (아랍 격언) 행복만 있는 삶은 영혼을 시들게 한다 잔치집 가는 것보다 상가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

* 회개는 왕복거리가 필요하다 자기 부정 아픔이 뒤따른다 죄에 대해 애통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 세상을 위한 애통은 헛된 것이다 우는 자는 겸손하게 된다 자신에 대해 진실하게 된다

*애통이란 말은 헬라어로 “펜테오”인데 본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애곡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는 참된 애통은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점까지도 자신의 허물인 것처럼 함께 아파하는 것이며 가족, 이웃, 내가 속한 공 동체의 약점 때문에 우는 눈물이고, 하나님 나라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나라를 위한 눈물임을 말하고 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 나라는 복이 있다. 예수님이 흘리셨던 눈물이 바로 이런 눈물이다.지금 이 민족은 중차대한 시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각자의 가슴에도 예수님의 눈물이 흘러야 한다. 불충했던 과거를 통회하는 베드로의 눈물이 있어야 쓰임받는 제자가 된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는 헌신이 있어야 사랑받는 성도가 된다. 자식의 영혼을 끌어안고 몸부림하는 가나안 여인의 기도가

있어야 가족을 구원한다. 천국계단은 눈물로 오르는 계단이다.

*눈물에는 거짓이 없다

(전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다. 애통은 애통 자체에 복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흘리는 인간적인 눈물이 아 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흘리시는 눈물,하나님이 주신 눈물일 때 그 눈물은 대단히 큰 복이 된다는 것이다.

눈물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생리적 눈물이다. 둘째, 정서적 눈물이다. 기뿔 때나 슬플 때,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감정의 눈물이 많은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 강하다고 한다.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오래 사는 이유도 이 정서적 눈물이 풍부하 기 때문이라고 한다.

셋째, 성경이 말하는 영적 눈물이다. 마태복음 5장 4절이 말하는 ‘애통하다’ 는 이 말은 우선 강도에서 가장 강한 표현이고, 가장 신령한 눈물로 영적인 눈물을 말한다. 이는 예수님의 눈물이 요, 성령님의 눈물이요, 성령의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그 눈물은 곧 하나님이 주신 눈물이다.

 

눈물 그 자체도 괴로운 것이지만 눈물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욱 비극적인 일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공동체,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하여 한탄하셨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 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며 나무라셨다 (마 11:17). . 유명한 설교가인 토마스 왓슨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낙원이 나타난다’ 고 했다. 스펄전은 “천국은 메마른 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마태가 말하는 애통의 첫 번째 영역은 죄 많은 자신을 보고 우는 눈물이다.

애통은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지고 찢어지고 불타는 순간 느끼는 아픔이다.

세상에서는 내가 깨지면 망하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내가 깨져야 살수있다.가슴이 깨져 열리면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눈물 샘이 깨지면 하늘이 보인다. 지아가 깨지면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게 된다. 일찍이 다윗은 시편 32편 3절에서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히는 사람마다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애통의 눈물은 순수한 눈물이다. 죄를 보고 애통하는 지를 예수님은 용서하신다. 자기를 보고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의 은혜를 부어주신다.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복되구나! 눈물이 있는자들이여.오,놀랍도다.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 들이여. 위로가 너희 것이로다r’

"애통은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 는 사람,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교만의 눈으로 자기를 보 기 때문에 울수가 없다. 뒤늦게나마 새벽부터 씨를 뿌리며 눈물을 흘려야 한다. 기억하자. 나를 살리고 자식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힘은 눈물에서 시작된다. 눈물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꾼다. 눈물은 또한 황폐한 땅을 축복의 땅으로 바꾼다. 유대 문학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이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다. “자녀들아, 나는 너희들의 죄로 인해 너희를 징벌하노라. 너희는 이제 에덴 동산을 떠나 슬픔과 고통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의 자비는 계속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사실 너희는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곤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천국 창고에 값진 보물을 쌓아 두고 너회에게 줄 것이다. 그 보물을 얻는 비결은 바로 눈물이다. 삶의 고통이 너회를 억누르고 슬픔이 너희를 사로잡아 더 이상 너희 힘으로 견디지 옷할 때 너희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이다. 그럴 때 너희 짐이 가벼워짐을 느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이 말을 들을 때 슬픔이 그들을 엄습 해 왔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려 땅에 떨어졌다. 그들의 눈물이 메마른 땅을 적시고 처음으로 메마른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대대로 눈물로 땅을 적셨고 그때마다 슬픔은 사라지곤 하였다. 인간은 슬픔 가운데서 눈물을 흘려야 했지만 땅은 그 눈물로 인해 기름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애통하는 자의 복 사61:1-3

애통하는 자의 복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痛悔)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도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왕하20: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 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痛哭)하더라" 히스기야 왕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5)

*. 온유; 아나바 (히) 구부리다 굴복하다 낮아진다 순종하다 끝까지 인내하다

푸라우테스(헬) ; 야생 말을 길들여서 주인 말을 잘 듣는 상태이다

* 온유란 본능적인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길들여지고 잘 훈련된 성품,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훈련된 인격을 뜻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길들여진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 다. 또한 환자의 열이 오르고 몸과 얼굴이 벌겋게 되었을 때 이 열을 진정시켜 정상 온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온유란 두 극단에 서지 않는 중용의 자세이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며 겸손 한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갖는 것이다 강하나 부드럽고 겸손한 것이다 길이 참는 것이다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적 분노에 대해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다

* 온유는 세계 정복의 원리이다 맹수는 사라져가도 온유한 동물은 번성해 왔다

고난을 참고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다 자제와 순종이다 들짐승을 길들이는 것이다

* 온유한 자의 복 : 온유한 자가 기업을 차지한다 기업 = 땅=마음

* 온유한 것이 번성하다 소 토끼 양등 번성 맹수 공룡 柔能承强 泰强則切

* 땅을 차지하는 자는 분노하는 자, 잔인한 자 폭력을 일삼는 자가 아니라 부드럽고 친절하고 상냥한 성품의 소유자이다 포학, 완고함, 도전적인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 땅=마음(마13: ) 온유한자가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 정복하게 된다 겸손한 자가 정복한다

*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다스리는 권리를 회복시켜주신다 (창1:28)

* 모세는 가장 온유한 자이다 (민12:3) 모세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사53:7 그리스도의 온유함 마11:29 에수님은 온유하시다

* (딤후2:24-25)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 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부드럽고 온화한 말이 상대방을 , 적을 굴복시킨다 성령의 열매가 온유이다(갈5;22-23)

* 만족과 인내, 감사와 겸손이 없으면 내 기업이 없다 기업=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 나라

* 온유란 마음속의 폭력과 반대되는 것이다. 쉽게 화를 내고, 금방 얼굴을 붉히는 사람은 사고 치기 쉽다.욱하는 성격 때문에 살인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 어떻게해야 온유해질 수 있을까?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중생한 결과로 나타나는 성품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온유를 성령의 열매로 묘사한다. 온유의 뿌리는 성령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온유를 배울 수 있다.

* 온유한 사람은 언어가 부드럽다. 사람 관계가 부드럽다.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경직되어 있지 않다. 복이 많다. 공동체를 차지한다. 말씀도 차지한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5:6)

 

* 의=디카오수네 “ 그 의(義)” 바른 관계, 바른 것 고전1:30 예수=우리의 義

의롭게 되는 것 + 의를 행하는 것 . 완전한 義

* 의=올바른 것. 올바른 관계.

* 하나님-인간과 바른 관계(의)=찬양 경배 사랑 축복 * 사람과 사람과 바른 관계=사랑 실천

* 사람과 물질 바른 관계= 관리. 조화, 자연보호, 의미 없는 물질 지식은 위험하다

* 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먼저 의인이 되어야 한다 “ 죄인이 의를 생각하면 죄가 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상이 된다” --어거스틴 기독교만 義를 강조한다

* 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의롭게 되려고 . 의를 행하려고 주리고 목마른자 . 끈질긴 의의 추구자 는 배부를 것이다 인간은 갈망하는 것을 닮게 마련이다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게 된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갈급함이 없다. 내 영혼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이 영적 주림과 목마름이다.

* 육신의 것을 추구하는 자는 평생 만족이 없다 의를 추구하는 자만 만족한다 의로와지려면 언제나 어디서나 만족할 수 있다

* 하나님 의는 궁훌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궁휼함이 보충되는 것이다

義의 힘은 무섭다.예수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억하라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

* 마귀는 우리에게 능동적인 의를 요구하고 에수는 우리에게 수동적인 의를 요구하신다

* 교회를 잘 맏고 잘 섬기고 바르게 살기 위해 나와야지 잘살기 위해 나오면 낭패한다

* 먼저 의를 갈구하고 목말라야 한다 . 의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에 대해 말한다. 의를 행하기에 앞서 정의와 의로움을 갈망하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게 되는것과 같이, 의를 갈망하는 자가 의를 행하게 마련이다. 아직 의에 이르지 않았지만 의를 갈망하는 것에 참 행복이 솟아난다.

* 죄와 욕망이 제거될 때 영혼은 만족한다 육을추구하는 자는 만족이 없다 항상 배가 고프다

* 이 구절이 가장 복된 말씀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의에 기갈한 자=거룩한 욕망 큰 욕망이 있어야 저속하고 사소한 욕망이 죽는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암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 배부를 것이다

(요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의에 주리고 못마른자의 복=배부른 것=성령 충만한 것 도덕적 굶주림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 배부르게 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충만히 오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신령한 은혜로 넘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살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며, 형통하든지 고난 가운데 있든지 감사함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이 우리의 복이라는 것에 대해 감탄해야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당신은 참 복된 사람이며, 하나님이 당신을 배부르게 해 주 실 것이기 때문이다.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 궁휼: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고통을 당하느 자에게 적극적인 친절성 . 상대방을 이해하고 동질이 되는 것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궁휼=자비, 인자, 인애, 불쌍히 여기는 마음

* 주석가들은 이 본문을 긍휼을 베푸는 자란 뜻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긍휼한(merciful) 성품을 가진 자로 해석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남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을 언급한다. 일종의 측은지심이다. 영어에 ‘compassion’이란 단어가 있다. 감정을 함께 한다는말로, 우리말로는 ‘공감’으로 번역된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읽어야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남의 마음을 읽어야 나의 마음도 읽혀지게 된다. 행복이란 마음을 읽는 능력이다. 자기 마음에 각인된 행복의 글자들을 읽지못하는 사람은 행복에 문맹일 수밖에 없다.

 

* 궁휼히 없는 의는 냉정 무자비하기 쉽다 기독교는 궁휼의 종교

* 우리는 하나님에게 궁휼로 구원을 받았다 긍휼을 받았기에 남을 궁휼히 여겨야 한다 (요일4:19)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애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 헤세드 : 남의 생각 속에 뚫고 들어가서 동거동락하는 것. 궁휼히 여겨야 최후 심판 때에 궁휼을 받게된다

* 은혜는 허물을 제거하고 궁휼은 불행을 제거한다(벵겔)

* 궁휼은 돈이 없으면 마로도 가능하고 말이 없을 때는 눈물로도 가능하다

* 하나님의 의는 궁휼과 타협하지않는다 그러기에 궁휼의 정신이 보충적으로 필요하다

* 의의 토양 위에 궁휼이 자란다

기독교의 궁휼은,자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불교의 자비는 미도통자에 대한 연민의 각성이다

* 궁휼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야 지속된다 그리스도 밖의 궁휼은 야생 올리브에 불과하다

* 자비는 이중의 축복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이다 -쉐익스피어

* 궁휼의 방법 = 죄에서 구원해줌으로 ,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

* 자기의 비참을 알아야 가련함을 알아야 남의 가련함도 안다

* 궁휼이 없으면 궁휼 없는 심판을 받게된다 (약2;13) 하나님 진노(마18:34-35) 받게된다 사죄가 없다(마6:12-15)

* 동물 학대의 문제점

 

궁휼을 베풀어야 할 이유

(1)심판을 면하기 위해(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 기고 자랑하느니라"

(2) 주님을 존경하고 대접하는 일이기에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虐待)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 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마25: 이웃을 위해 긍휼을 베푼자 =주님 위해 한자 긍휼히 여기는 자가 큰 일을 했다 : 리빙스턴 시바이쩌 6. 자비의 입을 갖자 자비의 귀를 갖자 자비의 손, 발을 갖자

(3) 하나님 긍휼을 받는다 (마5:7)

야고보서 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심판이 있으리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은 남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긍휼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긍휼을 가장 잘 보여 준 사건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건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일화에 대한 주님의 결론을 들어 보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신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베푸는 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말이다. 마태복음 9:13은 말한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 주님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을 원망하 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격 없는 자를 자녀 삼아 주시는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큰 긍휼을 받았다. 그러므로 긍휼은 그리스도인 이 베풀어야 할 마땅한 의무이다. 이로 인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길 때에만 긍휼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긍휼의 선물을 주실 때에만 나도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 긍휼은 하나님께 나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긍휼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 하고 타인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 그래서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복이 임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긍휼을 나누어 준 것뿐인데 하나 님은 그런 내가 너무 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를 더욱 긍휼히 여기신다. 이것이 긍휼의 신비한 싸이클이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

* 마음이 청결함= 혼잡되지 아니함 동기가 순수하다 (청결은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다)

빈 것 . 단순 한 것. 잡념이 없다 두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 사심을 버리고 단순한 마음에 하나님 형상이 비춘다 청결이란 글자 그대로 깨끗하다, 순수하다,는 뜻이다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깨끗이 제거한 곡식에 사용되는 말이다

* 팔복의 핵심적인 단어가 나왔다. ‘마음’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헬라어로 ‘카르디아’로서 인간의 정서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정서가 순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정서가 순수한 사람은 사물을 비뚤게 보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으로,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본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것을 왜곡되게 본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보아야 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복은 마음의 안정과 정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사물은 그 본질과 모순되는 것을 그 속에 포함하지 않을 때 순수해진다 마음은 마땅히 사랑해야 되는 것을 사랑할 때 청결해진다 (

(시24:4-5)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한자)

* 영혼의 눈, 마음 눈이 밝아야 하나님을 본다 영이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 동양개념에서는 왕은 측근자만 볼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은 계시하신다 알게하신다

*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의 낙원이다 그곳에 하나님이 거닐기를 좋아하신다

* 우리 마음의 눈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다 회개해야 막아진다 음란 거짓 교만이 있으면 하나님을 뵐수가 없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 (요3:5)

* 거룩해야 눈이 밝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고난 중에 마음이 순수해진다 하나님을 뵙게 된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낮에도 별이 있으나 다른 것을 다 보기에 별을 보지 못한다 밤에만 별을 볼수 있듯이 모든 가치가 부정되고 마음이 단순하고 순수해질 때 하나님을 볼수가 있다

*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청결한 마음은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데는 교육도 무능하고 수양도 쓸데없고, 선행도 무익하다. 마음의 청결은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는 하 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디모데전서 4:5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말하며 인간의 도덕과 수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로 인간이 청결해짐을 말하고 있다.

* 마음이 청결하면 복도 받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영적으로, 마음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보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다시 오실 주님, 재림하시는 그분을 보게 될 것이다.

 

7. 화평하게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 화평=샬롬 , 평화. 엡2:4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을 화평케하신다 우리는 인간과 인간을 화평케 해야한다 화평케하는 자 행복 번영 보호자된다

* 우리 민족과 똑같이 아픈 역사를 많이 가진 나라가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전쟁에 시달려 왔다. 때문에 유대인의 소원은 평화였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 이라는 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샬롬이란 인사는 단순히 별 탈 없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모든 좋은 것과 온전한 만족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샬롬은 모자람이 없이 온전한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 화평은 거저 오지 않는다 도모해야 한다 힘써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가 있어야 눈물(동정) 웃음(기쁨) 아픔(희생)이 있는 곳에 화평도 있게 된다 (고후5:18 우리에게 회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 화평을 도모하는 자가 되라 그래야 하나님 품성을 닮은 하나님 아들로 인정받게된다 아들은 상속권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순종한다 사랑한다 거룩하다

 

* 죄와는 투쟁하고 죄인과는 화평하라 평화하라

* 세상은 영웅을 높이나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자를 높히신다

* 화평해야 일이 잘되고 기쁨이 있고 복되도다 (잠15:17 21:19 27:15-16)

* 불화하는 경우 : 용서가 없고 시기, 질투, 교만, 회개가 없기에

* 화평케하려면 :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한다 ) 관용하고

인내해야 한다

* 자신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화평을 추구할수 없다 (거짓 , 전염병등)

공교롭게 북한의 평양이란 이름도 ‘평화의 도시’ 라는 뜻이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 평양이 평화는커녕 늘 전쟁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파하는 모순을 바라보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 예수님은 화목의 제물이다 (엡2:12-16)

주님은 십자가에서 한 손은 우리 손을 한 손은 하나님 손을 잡으시고 우리 사죄를 하나님께 호소하시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고 용서받았다

*. 하나님과 싸우지 말라 하나님 주신 감동 소멸시키지 말라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라 그다음 자기자신과 화평하고 이웃과, 그리고 자연과도 화평하라

*. 화목의 책임 =성도의 의무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벧전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아브라함과 롯 관계 : 아브라함의 이권을 포기함. 양보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누린다고 하였다.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 . ‘하나님의 아들’이란 별명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며, 미래에 영원히 있게 된 종말론적인 선물이다. 천국에서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다.

* 신약성경에서 ‘화평’ 이란 말은 ‘에이레네’ 라고 하는데 88번 정도 나온다. 이 말은 신약 27권에 상당히 골고루 나오는 단어이다. . ‘에이레네’ 는 구약의 ‘샬롬’을 번역한 말인데 신구약을 합하면 이 평화란 말이 400번 이상 등장한다.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 란 말은 화평을 세우는 자, 평화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은 평화를 만드는 자, 즉 영어의 ‘peacemaker’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은 평화를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화해를 창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알래스카 에스키모들은 ‘평화’ 란 '원수를 친구로 삼는것' 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peacemaker 이다. 싸움을 말리는 사람을 peacemaker 라고 하는 반면,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 그리고 싸움을 붙이는 사람을 troublemaker 라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교회 생활을 행복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한다. Peacemaker 는 못 되더라도 결코 troublemaker 는 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공중변소에서 어렵게 차례를 기다리다 들어가 시원하게 볼일을 보는데 이런 낙서가 눈에 띄었다. 네가 사색에 잠겨 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이 되어 간다. 네가 밀어내기에 힘쓰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조이기에 힘쓴다. 그대 젊은이여, 당장 일어나라. 지금 그대가 편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나 혼자 편앙하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싸움터의 방관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죄자나 방관자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얻어맞으면서도 싸움을 말리고 평화를 창조하는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평화를 만드는 자인가 문제를 만드는자인가 하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된다.

 

오래전 김민식이라는 가수가 부른 건전가요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엿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깊은 산 작은 연못

 

- 이것이 소위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지는 곳이 공동체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성 프랜시스

 

8. (마5:10)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義=하나님의 義이다 첫째 복과 동일하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 자기 잘못으로 핍박을 받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신앙이 높은 수준에서만 가능하다

* 진실할수록 핍박이 많다 세상은 진실을 두려워한다 바르게 살수록 핍박이 심하다

적당하게 살려는 자는 핍박이 없다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핍박이 없다

* 기독교는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다 다니엘. 요셉, 아벨.....예수 그리스도

신앙인 핍박 당연하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 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신자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요일3;13 이상히 여기기 말라 요15:19 택함 받았기에 세상이 미워함 요15:18, 22. 예수께서 먼저 핍박을 당하심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 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 핍박을 통해 알곡이 가려진다 핍박중 신자의 인격 성품이 가장 잘 나타난다

 

* 나쁜 말을 들어도 잘 잊어버려라 그래야 건겅에 좋다 자신을 이기고 환경을 이겨라

* 순교가 최고의 영예이다 그리스도 고난을 기억하라 초대교회성도들은 직업까지 포기했다 지금은 핍박이 거의 없다 그래서 순수한 신앙 찾아보기 힘들다

* 주님 위해 한번도 고난을 당해보지 않은 자는 부끄러운 자이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아니라 또한 그 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핍박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성령이 역사하신다 두려워 하지 말라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을 받는 이유

(1) 옛 선지자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엘리야 이세벨 예레미야 구덩이

베드로 바울 폴리갑 익나티우스 주기철 손양원

(2) 그리스도의 제자된 증거를 나타내기에

(3) 하늘에서 상급이 크기에 (마19:29)

(4)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된다 (계2:10)

(5) 믿음이 성장한다

*하나님 위해 영광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은 신앙의 극치이다 세상이 감당 못한다(히11:35-38)

 

박해가 어떻게 복이 되는가?

첫째, 박해는 참된 성도와 가짜 성도를 구별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이 된다. 박해는 알곡과 가짜를 구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둘째,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풀무에서 순금이 나오듯이 핍박 속에서 순결한 믿음이 나온다. 서양 속담에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시내는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셋째, 고난은 신앙인을 성숙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것이 복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고난 속에 신앙이 일어나고 고난 속에 열매가 임한다. 뿐만 아니라 박해 속에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박해는 천국의 소망을 확실하게 해 준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박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며 그것을 5장 10절은 한마디로 “천국이 그들의 것” 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박해받는 사람에겐 항상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는 박해의 역사

로마의 통치에 시달리고 종교인들이 율법에 지쳐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온 그 사람들을 향하여, 정말 위로가 필요하고 달콤한 약속이 필요한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믿으면 너희가 박해를 받을 것이다. 나를 따르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것이다. ”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입을 열어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처음부터 고난과 박해와 죽음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

바돌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 예배한다.” 소리치며 톱에 켜 순교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을 맞고 쓰러진 후 목 베임을 당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메달려 죽임을 당했다.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를 부르다 죽었다.

사도요한은 백 살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 있는 순교자였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 교회 성도를 표현하는 1세기의 단어 가운데 ‘마르투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증인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순교자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헬라어이다.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증인 된 삶은 살면 순교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성도가 된다는 것은 곧 핍박과 박해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주님의 제자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고난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의외로 축복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팔복의 마지막 마태복음 5:12에서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또 다른 본질, 또 다른 차원이 있다. 기독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쓰고, 찡그리며 승리하는 종교가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편안해지고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

한다. 손해 보는 것이 행복이요, 고난이 기쁨이 되는 신앙을 잃어버렸다. 상식적인 헌신, 합리적인 희생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제 감동이 사라졌다. 교회가 무엇인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바로그곳이 교회인 것이다.

 

더글라스 파킨스 의 마귀 8복

(1) 바쁘고 피곤할 때 교회 나가지 않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마귀 친구가 될것이요

(2) 목사 흠과 트집을 잡는자가 복이 있나니 설교 시간에 은혜 받지 못할것이요

(3) 사정해야만 교회 나오는자가 되면 복이 있나니 어 교회 말썽만 일키는 자가될것이요

(4) 남의 말을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마귀가 좋아하는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요

(5) 걸핏하면 삐쭉거리는 자가 복이 있나니 작은 일에 화만내고 교회를 곧 그만 두게 될 것이요

(6) 하나님 일에 인색하여 헌금 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마기일 가장 잘 돕는자가 될 것이요

(7)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며서 이웃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될것이요

(8)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시간이 없는 자가 복이 있나니 내 꼬임에 쉽게 넘어가서 마침내 마귀의 조롱거리가 될것이라

 

 

부록 2: 12:1-3 아브람의 소명 주해.

 

(창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죄 많은 땅 우상의 도시인 우르에서는 축복 불가능하다

-분리시키는 하나님: . 믿음은 죄된 세상과 인연을 끊는 것이다 세상 더나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다 옛자아에서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 세속 편견에서 하나님 말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앙은 위험을 동반한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약속)에 근거한다 그래야 오래간다

-하나님 지시한 땅이기에 매력 있는 것

-떠나야 한다 믿음은 떠나는 것.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본성을 떠나 은총으로

세속 사상과 편견을 떠나 말씀과 하늘 지혜로 죄짓는 삶에서 떠나 거룩한 삶으로

옛자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떠나는 것이 신앙이다

-우상에서 악습에서 , 죄악에서 떠나야한다

* 당시 거의 무정부상태? 백성 보호불가 본토 친척 아비집 떠나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어디라로 가라는 말씀없다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열즐 땅이다 미리보녀주면 인간 나태해서 하나님을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마귀가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매일 미순간 하나님께기도하고 가분만 의지하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 -등불은 한 두걸음 나갈정도만 비추인다. 목적지까지 비추이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그 땅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대륙이 마주치는 세계중심지이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있어야 참 신 칭조주 하나님을 세계 여러 민족에게 전할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아브라함 부르심과 선택은 세계 인류를 구원코저 하시는 선교적 의미를 가진다

 

 

(2) (그렇기만 한다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이름을 유명하게 한다, 이름 떨치게 하리라) 너는 복이 될지라 (남에게 복을 끼치는 복덩어리가 될 것이다)

* 이축복의 약속은 바벨탑을 샇으려하던자들의 소원이었다 그러 축복은 탑을 쌓으므로 얻어지느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가능하다 본토 친척을 강화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들, 본토 친척 아비집은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세계를 말한다

*주는 자, 복의 근원이 되어라 복덩이가 된다. 신앙이란 인간의 경험의 세계,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현대교회가 인간의 이성에 맞게 ,현대인을 설득하기 위해 에수님의 동정녀탄생, 불활 승천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하니 현대인들은 교회를 찾지않고 점점 교회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예수님 탄생 부활 승천이 하나님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가라고 하신 곳이다

*예수를 누구라 하느냐? ..선지자중의 하나이다 예레미야이다 등등은 인간 경험의 세계에서 얻은 지식,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경험을 초월한 것 마16;17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인간 경험을 초월하는 것을 부인하거나 인간 경험 안에서 재해석을 한다면 진리를 찾을수 없다 진리를 영원히 잃게된다

* 아브라함이 믿음이 조상인 이유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도 이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옛것 본토 친척 아비집 온전히 버리지 못한 이들 많다

* 북의 근원= 물질 부요? 상호 축복시 아브람 이름사용? 영적인 복 = ok 말 그대로 아브람으로 인한 복의 기준

-복있는 자가 되어야 복이 온다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다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칼랄” 감소시키다, 낮게여기다)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메시야 탄생 의미 . 민족주의 지양)하신지라

-복덩이리가 되리라 영적 복의 기준이된다 가는데마다 복을 끼친다 타인을 복되게 ..이런 자식을 길러야한다 자기의 중요성 인식하고 확신하는 자만 승리한다 하나님 비젼 있어야한다

-네 이름 창대케하리라=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숙이게 된다

-많은 나라 조상이 된다 자식하나 키워도 큰 인물로 키워야한다 비젼 심어주고 훈련시켜 야 한다

-민족적 축복 = 위대한 나라를 만들겠다

-넓은 영토 주리라 13:15 롯은 소돔 고모라 좋은 땅을 차지할 줄 알았으나 결국 망했다

-많은 후손에 대한 약속 : 15:5-6 17:

-후손들에게 하나님 약속 확신시키고 죽으면 후손들 희망 속에서 산다 후손들이 하나님이 우리 후손들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갖게하라 자랑스럽게 확신하고 느끼며 살도록하라

-후손들 북복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미국 목사 자녀들 가장 잘된다 한국도..

-나하나 때문에 세계인들 축복받으면 복된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줄 알아야한다 예수님 하나님 아들 피값으로 산몸이다

-한국 민족으로 인해 세계 모든 민족 복받을 날이 오리라 하나님 뜻이다 마지막 시대이다

-내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성숙케하는 수단일 뿐이다 한국인들 고통 많이 받다

-믿는대로 된다

-늘 하나님 약속 생각하고 살라

-믿는 사람을 건드리면 큰일난다 하나님이 동행하시기에. 하나님이 싸워주신다

-소명은 현재 너보다 더 낳은 상태를 만들어 준다 (남보다 나은 상태가 아니라)

-유대교 기독교 회교 아랍인 모두 헤브론 참배.

-시작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시작하려면 -꿈과 이상있어야, 창의적 지혜, 결단과 희생필요

-아브라함 시작한 것: 예배(12:7)=제단 십일조 (14:20)=감사,청지기.할례(17:23)=헌신, 성별. 히브리 , 이스라엘 만족 시작됨

-아브라함은 분리되는 생애ㄹ르 살다 : 본토친척 아비집과, 조카 롯과, 아들과, 나중 재산소유도.

-모험이 없는 곳에 발전도 없다

-하나님 명령에는 축복 약속도 들어 있다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은총을 드러내 보이신다

=기독교 역사는 떠남과 분리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크게 쓰시기 위해 큰 두가지 시험 주시다. 고향 떠나라, 모든 가족 친척 떠나라. 아브라함이 순종한다고 하니 하나님은 내가 보호하마 하며 보장하시다 아브라함은 용기를 가지고 떠나다 하나님 제일주의냐 인간 중심이냐? 가 문제다

-행7:2-4 창11:31-32 갈데아 우르---하란(데라가 사망) ---가나안

죽음이 방해 끈을 풀어준다( 아브람 부친 데라가 사망) 육의 결합은 아브라함 영혼의 완전한 반응에 방해를 주고 있었다 그 방해 끈이 풀어진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가 없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란에 머물러 있지 말라 육과 결합하지 말라 땅에다 소망 두지 말라 이 세상 묶여 있는 거을 푸는 것도 죽음이다

* 우리 신자는 심판 죽음과 분리되어 있다 영원히 우리는 이미 전달된 빛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그때 하나님은 더 많은 빛을 주신다 간직하는 자, 가진자에게 더 갖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제로 인도하시지 아니한다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순종의 단계마다 복을 주신다

* 순종할 때 온갖 축복온다 (신28:1-14)순종은 믿음이 열매이다 믿어져야 순종한다 믿음이 열매는 하나님과 친교로 이어진다 참된 순종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전달된 새성품의 단순한 표현이요 흐름이다

* 하나님은 종교적 의를 지킴으로 새롭게 되라기 보다는 예수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영접하고 순종함으로 새롭게 되라고 하신다

-아브람을 부르신 목적 .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게 . 남도 복받게 하려고

-행7:4 하람에서 5년 기거함

 

* 복이란 생명을 자라게하고 번창하게하고 이세상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영혼의 활력,능력을 말한다 또는 그런 능력을 산출해내는 외부적 행운,하나님 주시는 통찰력과 지혜와 능력을 말한다 축복상태는 부족함이 없고 강건하고 온전한 자유한 것이므로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축복=히브리어의 바라크는 찬양이란 말이다. 축복인사 ,축복하는 행위는 타인에게 활력을 주는 것,나누어 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자손의 번영,재물의 부요,영예,대적에서 승리함,위험에서 구원됨등이 주로 복의 내용이었고 신약에는 구원 받는 것이 복이다. 영혼의 죄를 사함 받아 구원을 받아 평안을 누리는 것이 축복이다. 복을 받으려면 두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영혼의 활력 생명이 성장하고 복되게할 수 있는 무한한 능역이 이으시다 그분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복을 주셔야 한다 둘째는 우리가 복을 받을수 있는 태도와 노력을 해야한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믿어도 노력하지않는 자에게 복이 임하지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아니하면 복을 받을수 없다 앞으로의 세대는 과거보다 더 투명하게 되고 합리적인 시대가 오기에 적당히 살아갈 수가 없다. 배워야할것이 너무 많다 알기만 해선 아니된다 지혜가 있어야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능력과 지혜를 받지 아니하면 성공하기가 힘들다. 우리도 아브라함같은 복을 받아 복을 받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겠다

 

. 창12:1-9 믿음 장성하여 복의 근원되라

* 하나님이 손을 많이 댄 사람일수록 귀한 작품 인물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이 된 사람이다 유대교 기독교는 물론 마호멧교까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있다 그가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를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성장 시키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벽의 근원이 됙가지 많은 고난의 훈련과저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도 아브라함같은 복을 받을수 있다 단 그런 순종의 훈련을 바아야 한다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복을 받아야한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배경이 좋고 좋은 가문이라도 하늘의 복을 받지 못하면 평생 고생만 하다가 허망하게 이세상을 떠나고 만다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복의 근원이 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나만 잘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내가 받은 목을 인하여 다른 이들도 복되게 하라고 복을 주시는 것이다 나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기쁨을 얻고 나로 인하여 위험과 곤경에 처한 이들이 도움을 받아 사라나고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되어 구원을 받게 하는(가장큰복) 그 사람이 복의 근원이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거저 되지 않는다 장성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장성한 믿음을 가졌기에 복의 근원이 되다 그러나 그가 장성한 믿음을 소유하기까지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 훈련과정을 거치며 믿음이 자라났다 믿음은 자라야 한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기에 자라나는 것. 장성한 믿음이 있어야 큰복을 받는다 큰복을 받기 위해 믿음을 키워야 한다 복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오는 것이다 어덯게 믿음이 자라는가

1. 의지하던 것을 떼어버리는 훈련을 받으며 믿음 성장한다

2. 세상 방법 포기하고 거룩하게 사는 훈련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

3.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바치고 헌신하는 훈련을 받아야한다

떠나라-순종자에게 인간수단포기하고 거룩하게 살라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 헌신하라, 순종할 때 복의 근원이 된다 믿음=순종.

* 믿음: 달리 생각하는 것 히11:19 하나님이 죽은 아들을 능히 살릴줄을 생각하였다 남은 끝났다 절망이다 --다르게 생각.

믿으면 믿는대로된다. *믿음이 상황 현실을 앞서가야 해결 향상된다

* 하나님의 세가지 축복 약속

(1) 큰 민족:나라를 주겠다 영토, 백성, 주권을 주겠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토 영적 하나님이 주구너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고 약속, 땅의 것을 상징으로 하여 믿게 함

(2) 이름 창대하게 : 이는 개인 명성이 아니다 바벨탑과 연관 ... 이름 전재 양식 이름을 낸다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름내려는 것 =존재하고자 영원히 존재, 살고저하는 열망이요 욕구이다 이욕구가 나쁜것 아니라 방법이 문제 , 좌를 짓게되다 우상 숭배 하였다 창대케하리라= 이름을 내고저= 영원히 창대케 하는 것 영원 생명을 유지하리라 ( 모두 영적인 것이다 )

(3) 복이 될지라 ; = “복덩이” 요셉같이. 요셉 한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살고 복을 받게 된다 요셉은 복덩이다 나 때문에 당신 대문에 여러 사람이 봇이 복을 받게된다 이 사람 대문에 회사가 교회가 사는구나 그런 사람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