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과 김동회의 몸놀림은 한 편의 예술이었다. 동물적 움직임, 상대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살기, 그리고 주먹과 현란한 발차기…. 종로 패권을 놓고 벌이는 고수들의 일대일 대결은 팽팽한 긴장감 그 자체였다.
"컷!"
임권택 감독 사인이 떨어졌다. 두 사람의 결투 장면을 지켜본 스태프와 출연진 200여명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퍼부었다.
1990년 개봉된 '장군의 아들'은 클라이맥스 부분인 김두한과 김동회 싸움을 비롯해 영화 전반에 흐르는 액션으로 당시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 영화에 '쌍칼'로 출연했던 배우 김승우는 "당시 한국에 그 정도 액션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영화는 대히트였다. 전설적 주먹 김두한을 다룬 탄탄한 스토리와 스케일, 연출은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됐다. 군 복무를 마치고 막 스턴트맨 생활을 시작한 정두홍(김동회 대역)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도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약 10년간 영화계에서 액션이 사라졌다. 민주화 이후 처음 만든 액션 영화가 장군의 아들이었다. 이후 액션이 한국 영화에서 하나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액션 영화가 늘어나면서 정두홍(49)은 액션과 스턴트맨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그는 "장군의 아들은 내 인생의 시작점이다. 그렇게 얼굴 없는 스턴트맨 세계에 들어서 올해 만 25년이 됐다"고 했다.
지난 22일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예술마을 서울액션스쿨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그가 거론한 영화들을 들으니 1990년대 이후 국내 액션 영화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장군의 아들, 테러리스트, 쉬리, 무사, 공공의 적,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신기전, 군도:민란의 시대…. 그가 참여한 작품은 100편이 넘는다.
영화계 사람들이 주저 없이 역대 최고급으로 꼽는 스턴트맨, 무술감독이라 불리며 한국 영화의 액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이 사나이는 뜻밖에 허리가 약간 구부정했다. 걸을 때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의사들은 척추 관절이 닳고 말라붙었다며 5개를 인공관절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을 하게 되면 일도, 인생도 모두 끝난다고 생각했다. 오늘 죽든 내일 죽든 스턴트에 목숨 걸고 가겠다는 마음이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그래도 움직이고 땀 좀 내면 허리도 좀 펴진다. 하하."
"주인공 욕심은 없다"
―영화판에서 스턴트맨들은 부상과 죽음의 경계선을 걷는 사람들 같다.
"죽음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앞만 보고 살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따로 있다. 스턴트맨은 누군가의 위험을 대신해 주는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저 배우 멋있다. 잘한다'고 할 땐 씁쓸했던 때도 있었다. 물론 부럽다. 하지만 연연하진 않는다. 나는 그만큼 연기도 못하고, 그만한 스타가 아닌데 어쩌겠나.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고 할까."
―실제로는 늘 주인공을 꿈꾸지 않나.
"짝패(2006년)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한번 해봤다. 인생에서 뭔가 하나 해냈다 하는 생각에 황홀하더라. 그때 사람들한테 그랬다. '나중에 자식 낳으면 이런 거 해봤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됐다'고. 그 영화 만든 류승완 감독에게 '당신을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한번 해보면 또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욕심이다.
"이젠 욕심 없다. 해보니까 별거 없더라. 연기 못한다고 욕만 엄청 먹었다. 지금은 단역도 좋고 대역도 좋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그의 왼쪽 쇄골엔 선명한 수술 자국이 있다. 1995년 가을 서울 송파구 지하철 2호선 신천역 인근에서 '본투킬(1996년)'을 찍다 왼쪽 쇄골이 박살 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이튿날 진통제 주사를 맞고 종로에서 찍는 '런어웨이(1995년)' 촬영장에 갔다. 영화 개봉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촬영 스케줄을 개인적인 일로 깰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배우 이병헌의 대역을 맡아 달리고 뛰어내리고 차에 치였다. 수술은 다음 날 했다. 의사는 혀를 찼다. 골반 뼈를 잘라내 접착제와 함께 쇄골에 붙이고 볼트 12개를 박았다.
―어쩌다 그런 부상을 당했나.
"늦은 밤 아스팔트 길엔 비가 내렸다. 주연인 정우성 대신 오토바이를 탔다. 몇 번 숨 쉬자 헬멧 안이 뿌옇게 됐다. '액션'이란 소리가 들렸고 출발은 멋있게 했다. 근데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오토바이가 달려갈 길에 구경나온 시민들이 비키질 않고 서 있었다. 핸들을 꺾었고 오토바이와 함께 나뒹굴었다."
―원래 고통을 잘 참는 체질인가.
"고통을 참는 데 특별 능력이 있을 리가 있나. 차라리 즐겼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이상하게도 고통이 오면 내 속에서 약해지고 나태해지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영화 '장군의 아들', 스턴트맨의 아이콘을 탄생시키다
―원래 배우가 될 생각으로 이 분야에 뛰어들었나.
"영화배우는 내게 동경 대상일 뿐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 서울 큰누나 집에 갔다가 용돈 받으면 동네 삼류 극장에서 살았다. 옛날 무술·액션 영화 많이 봤다. 엄청난 주먹, 발동작에 넋을 잃었다. 그래도 배우는 꿈도 못 꿨다."
―영화계와 인연이 닿은 계기는.
"제대하고 선배 소개로 국회의원 후보 수행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엔 유세 현장에서 폭력이 많았다. 그때 만난 다른 수행 요원이 영화 쪽 일을 좀 했다. '영화 해볼래?' 하는 말에 끌려 따라갔는데 알고 보니 미국 영화 직배(直配) 반대 운동 모임이었다. 거기서 여러 감독과 영화사 대표 등을 만나게 됐다."
―태권도 4단, 합기도 5단에 유도·검도·태껸 등 만능 무도인이니 스턴트맨 생활에 적응하기 쉬웠을 것 같다.
"처음엔 비디오물을 한 편 찍었다. 그런데 발차기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이건 완전 다른 거였다. 건달 흉내라도 연기 잘해야 하고, 맞을 때 '어이쿠' 하고 실감 나게 나가떨어져야 한다. 운동만 했던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하도 못하니까 나중엔 아예 제쳐놓더라. 하는 일 없이 한 달 따라다니고 20만원 받았다. 창피해 돈 돌려주겠다고 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을 텐데 그래도 견딘 이유는 어떤 매력을 발견해서였나.
"오히려 그 경험이 나를 완전히 바꿔놨다. 처음엔 도망갈까 고민 많이 했다. 그러면 이 바닥 영영 떠나는 거였다. 승부욕이 생기면서 독기가 올랐다.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언젠가는 최고가 되겠다고 했다. 하루 4시간 자면서 영화 액션을 공부했다. 보라매공원·관악산 다니며 나무 상대로 몸에 시퍼런 멍이 들 때까지 무술 연습을 했다. 그렇게 4년을 했다."
―그러다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것인가.
"어느 날 장군의 아들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다. 물불 안 가리고 했다.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맞아 넘어지고, 땅에 처박혔다. 임권택 감독님이 '컷' 하면 주변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머리가 쭈뼛 서고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속으로 '이런 거구나, 이런 거구나' 했다."
정두홍은 충무로 거물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그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시라소니(1992년)'에서 첫 무술감독을 맡았다. 만 스물여섯이었다. 그는 액션계의 블루칩으로 각광받았다.
―정말 살맛 났을 것 같다.
"카메라 앞에선 안 되는 게 없더라. 점프·킥이 왜 그리 잘되는지. 맞아도 아프지도 않았다. 테러리스트(1995년) 때 최민수 대역을 했는데, 수십 명과 싸우는 장면에서 상대가 발로 나무 테이블과 함께 내 다리를 그대로 찍었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때도 '괜찮습니다. 계속 가시죠'란 말이 나오더라. 사우나에 함께 간 선배가 슬며시 '두홍아 너 마약 하지'라고 묻더라. 그 얘기를 수없이 들을 정도로 미친 듯이 했다. 평소엔 기운 없이 지내는데 촬영만 하면 날아다니니까 이상했던 모양이다. "
―돈도 많이 벌었나.
"웬걸. 장군의 아들로 50만원 받았다. 한 해 작품 3개 해서 150만원 벌기도 했다. 교통비도 안 됐다. 그래도 난 괜찮은 편이었다. 그냥 좋았다. 밥은 촬영장에서 먹고. 몇 개월씩 일 없을 땐 이삿짐센터 일도 했다. 하루 4만~5만원 받으면 라면 사서 쌓아놓곤 했다."
말라깽이 약골, 태권도에 빠지다
그는 어릴 때 몸이 약했다.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충남 부여에서 살던 시절엔 학교에서 쓰러져 집에 업혀 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는 "못 먹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가난한 집의 7남매 중 막내였다. 아버지가 품삯 받아 가족이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어릴 적 그의 머릿속엔 온통 태권도 생각뿐이었다. 하얀 도복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어린이 태권왕 대회에서 여자 어린이가 우승했던 장면은 잊히질 않았다. 마루치아라치·태권브이 같은 만화영화에 흠뻑 빠졌고, 중학교 땐 읍내에서 이소룡 사진을 보고 열광했다. 고1 때 마을에 태권도 도장이 들어서자 곧바로 등록했다.
―어려운 형편에 태권도장에 다닐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
"초등학교 때부터 빈 병 주워 닦아서 팔았다. 서울 구로공단 등에 나간 누나·형들이 준 용돈도 모았다. 휴일이나 방학 땐 비닐하우스에서 작은 봉지에 흙 담는 일을 했다. 한 개에 1원이었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온종일 1000개씩 담기도 했다.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
―고등학생이 그렇게 계속 체육관비를 벌어가며 운동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한 달에 5000원이었데 딱 두 번밖에 못 냈다. 집에 10원짜리 동전 하나 없는 거 알면서 철없이 어머니에게 돈 달라고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막내야, 엄마 마음 아프게 하려고 그러니. 돈 없는 거 알면서 왜 자꾸 달라고 하니' 하시길래 '죄송해요, 사실 체육관 다니는데 돈이 없어서요'라고 했다. 그날 오후 관장님이 다신 집에 돈 달란 소리 말라고 하시더라. 이후 체육관은 공짜로 다녔다.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3~4시간씩 운동했다."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운동을 해야 했나.
"한(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음속 응어리라고 할까.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농사지으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땅이 없었다. 그건 남의 집 머슴 살라는 얘기였다. 어렸지만 가슴속에 한이 맺혔다. 아버지한테 꿈이 짓밟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평생 원망했나.
"군대 가는 날 아침밥 먹고 집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날 잡고 우시더라. 막내 군대 가는 게 안쓰러우셨는지…. 처음 아버지와 마주 앉아 울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걸 그때 알겠더라."
액션 연기는 감정 연기다
―액션 배우에게 정말 중요한 건 뭔가.
"감정이다. 액션은 감정 연기다. 무조건 인상 쓰고 나오면 보는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액션이라고 하면 무조건 몸으로 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아니다. 발차기 잘하는 친구는 많다. 그거 잘한다고 관객들이 사랑해주지 않는다. 행사장 퍼포먼스일 뿐이다."
―스턴트맨 눈으로 볼 때 '한국적 액션'이라는 게 있나.
"할리우드나 홍콩 액션은 화려하고 포장이 잘돼 있다. 그런데 과장돼 있다. 우린 현실적이다. 리얼리티를 강조한다. 영화든 방송이든 과장된 액션을 하지 않는다. 외국에선 와이어 연결해 날아다니지만 우린 책상 밟고 뛰는 식이다. 한번은 점프해서 뒤돌려차기를 했더니 왜 홍콩 흉내를 내느냐며 혼난 적도 있었다. 태권도 발차기라고 했는데도 절대 점프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한국적 액션이 해외에서도 통할까.
"해외에서 반응이 좋다. 매력 있다고 한다. 무사(2001년) 같은 경우가 그랬다. 미국 사람들이 '진짜 전쟁터에 있는 것 같더라. 소름 끼쳤다'고 하더라. 요즘 해외 영화계에서 우리 액션 모방한 것이 많이 나온다."
―스턴트의 매력은 뭔가.
"나는 젊었을 때 삶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었다.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없었다고 할까. 가진 게 있어야 목숨도 아깝고, 무섭기도 할 텐데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스턴트를 하면서 의미 있는 뭔가를 하고, 땀을 흘리고, 다리 부러져도 '괜찮습니다' 하는 게 좋았다. 스턴트와 촬영장에서 그런 재미와 쾌감을 느꼈다."
―위험한 스턴트 일 하려면 선배들한테 배워야 할 것도 많았겠다.
"아니다. 처음 스턴트 일을 하게 됐을 때 가르치거나 배우거나 그런 과정이 아무것도 없어 놀랐다. 운동했어? 예, 낙법 하지? 예. 좋아 그럼 와서 차에 받혀, 그러는 거다. 너 뛰어내려. 어디서요? 10층. 깜짝 놀라면, 너 운동했잖아, 못 뛰어? 그럼 가. 이런 식이었다."
―스턴트맨으로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나.
"매일매일이 한계였고, 모든 영화가 고비였다. 가르쳐 줄 사람도, 배울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데뷔 초기 스승은 홍콩 비디오였다. 그거 보면서 어떻게 액션하는지, 촬영은 어떻게 하는지 공부했다."
그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성룡을 '마음으로 모시는 사부'라고 했다. "몸에도 감정이 있다. 그들의 움직임은 차원이 다르다. 누구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한국의 액션 스타를 만들고 싶다"
그가 1998년에 만든 스턴트맨 교육기관 서울액션스쿨은 6개월 과정이 무료다. 누구든 도전할 수 있지만 과정을 끝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할리우드·홍콩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를 보고 놀란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운동하고 교육하는 곳이 전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액션스쿨 출신 60여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서울액션스쿨을 왜 만들었나.
"우선 스턴트맨들이 연습할 공간이 필요했다. 나도 처음엔 보라매공원 운동장에서 훈련했으니까. 또 한국에서도 액션 스타를 발굴하고 키워내고 싶었다. 홍콩만 해도 이소룡·성룡·이연걸·홍금보·원표 등 스타가 수두룩하다. 우린 한 명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서울액션스쿨에서 돈을 받지 않는 특별한 사연이 있나.
"고등학교 때 날 가르친 사부님 은덕을 그런 식으로라도 갚고 싶었다. 관장님은 내게 돈 생각 말고 다니라고 했다. 대학에 가게 된 것도 그분 덕택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분이다. 그리고 어릴 적 나처럼 배우고 싶은데 돈 없는 사람도 많지 않겠나."
―돈 안 받고 가르치니 사람이 많이 몰리겠다.
"매년 4월 모집 땐 70~80명 정도 온다. 끝까지 가는 사람은 10여 명 안팎이다. 올해 19기도 최근 2명이 그만둬 8명 남았다. 과정을 버텨내는 사람이 드물다. 특전사 할아버지가 와도 쉽지 않다. 그만큼 훈련도 힘들다. 완전히 군대다."
―우리나라 스턴트 수준을 평가한다면.
"몸으로는 세계적 수준이다. 장비와 시스템 부분에선 갈 길이 멀다. 영화는 스토리와 시스템·장비 싸움이란 점에서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사'라는 작품을 빼놓을 수 없다. 정말 죽을 각오로 했다. 중국에서 찍었는데 촬영 끝나고 맘에 안 들면 후배들을 사막 봉우리까지 선착순 달리기 시키고 그랬다. 때리는 척이 아니라 진짜 때렸고, 플라스틱 칼로 찌르는 척이 아니라(쇠로 조끼 같은 걸 만들어 안에 입고) 진짜 찔렀다."
―뭐가 그리도 절박했나.
"우리 액션이 후지다, 실력 없다는 말이 많았다. 그래서 제대로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소품 부서지고 난리였다. 싸움도 그런 싸움, 전쟁도 그런 전쟁 없었다. '와호장룡'을 찍었던 중국 스태프들이 몰려와서 보고 놀라더라."
―너무 힘들어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텐데.
"수도 없었다. 요즘엔 현장에서 뛰는 것보다 뒤에서 관리 일을 많이 하는데 마음이 더 힘들고 무겁다. 다치는 사람 나오면 어쩌나 마음 졸인다.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낫지. 스턴트하다 다쳐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일 못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얼마라도 지원하는 기금을 만들었다."
―스턴트맨을 위한 기금인가.
"한 명이 몸이 아파서 못 나왔다. 알고 보니 영양실조였다. 그 친구는 결국 스턴트를 포기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밥은 먹여야 하고 다치면 치료는 해줘야 한다. 한 달 내내 한 번도 일 못 한 사람에게 70만원씩 지원한다. 기금은 일 나간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갹출한다."
―스턴트를 하면서 가장 두려운 게 뭘까.
"후배들에게 죽지만 말아달라고 한다. 불구자 되면 내가 보살핀다, 똥·오줌 받아낸다, 난 그렇게 살아도 좋으니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비포장도로'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오직 자기 몸으로 부딪치며 길을 헤쳐왔다고 했다. 후회는 없고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한 날 서울액션스쿨에선 일본과 캐나다에서 온 영화 제작팀과 액션 배우 지망생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국내 배우 중에서도 액션 연기를 위해 이곳에서 연습하고 몸을 다듬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옛날엔 비아냥도 많이 들었다. '홍콩은 따라가니? 발끝도 못 따라가잖아' 그런 식으로. 이제 우리 액션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됐다."
이런 뿌듯한 현실이 떠올랐는지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조선일보, 201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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