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8시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 지하 공연장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야?" 개막 5일을 앞둔 연극 '먼 그대'를 연습 중이던 배우 윤석화가 날카롭게 외쳤다. "아, 예매를 하고 싶어서 찾아오셨대요." 급히 뛰어나갔던 공연장 직원이 답했다. 주말 밤에 직접 공연장까지 찾아와 표를 사겠다는 관객 앞에 배우는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아, 관객이시구나. 잘 안내해드려." 누그러진 그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관객. 지난 40년간 배우 윤석화를 있게 한 단어다. 그를 사랑하고 외면하고, 위로하고 비판했던 관객이 그가 6년 만에 서는 무대를 보러 모여들고 있다. 1975년 데뷔작 '꿀맛'으로 '천재 소녀가 나타났다'(극작가 이근삼)는 상찬을 받았던 그는 환갑이 되어서도 윤석화 이름 석 자로 120석 소극장을 채우고 있다. 지난 20일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50여명이 남아 그를 둘러싸고 꽃다발을 건네고 사진을 찍었다. 한 중년 여성은 "같이 나이 들어서 좋다"며 그를 얼싸안았다.
스타는 욕먹는 게 보시(布施)하는 것
"40년 전 데뷔 때야 제가 뭘 알았겠어요. 연기를 한다는 의식 없이 그저 느낀 대로 했어요. 정형화된 연기 틀에 맞추지 않아서 신선해 보였으려나."
지난 20일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택시 안에서 그가 말했다. 데뷔하던 무렵 연극판은 위계와 서열이 지금보다도 엄격했다. 동대파(동국대 출신), 중대파(중앙대 출신), 드라마센터파(남산 드라마센터 출신)들이 삼분한 세계에서 셋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못했던 윤석화는 "언제나 외톨이였다"고 했다. "연극계는 순수하고 정직한 줄 알았는데 차갑고 배타적이더라고요."
기가 죽지 않고 계속한 것은 "연극은 멋진 일이면서, 유명해지지는 않을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유명인들을 그때나 지금이나 함부로 부르잖아요. 왜 유명인은 존중을 못 받나 불만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유명인은 그렇게 대중에게 보시(布施)를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까지 못했죠."
1980·90년대 연극이 지성인의 자존심이요, 문화의 등대였던 시대의 한가운데에 윤석화가 있었다. 1983년 8월 그가 주연한 '신의 아그네스'는 170회 공연을 넘겼을 때 이미 3만명이 몰렸다. 평단에서 '기적'이라고 했다. 영화가 대중문화의 적장자(嫡長子)가 된 지금은 기대하기 어려운 흥행이다.
'아그네스' 이후 '하나를 위한 이중주'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 '덕혜옹주' 등이 잇따라 성공했다. 1990년대 말 그는 '출연작 30편을 모두 성공시킨 흥행 보증수표'로 통했다. 그의 연기를 두고 '가식적이다' '자기도취에 빠진 듯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신들린 듯한 몰입과 절절한 감정 표현으로 객석을 빨아들이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윤석화는 '신의 아그네스'(1983)부터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2)까지 승승장구하던 10년이 "가장 화려했고, 가장 쓸쓸했다."고 말했다. "하루는 참 잘한 것 같아서 천국이고, 다음 날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서 지옥이었죠. 조울증이었어요. 밤에 집에 가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전화번호부를 아무리 뒤져도 전화 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를 지탱케 해준 것은 관객이었다. "관객을 붙잡고 버틴 거지. 내가 뭔데 나를 보겠다고 찾아와주나 싶어서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한때 그렇게도 열광하더니 내가 힘든 일이 생기자 차갑게 돌아서던 관객. 그 불특정 다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들의 신기루 같은 애정을 붙잡고 여기까지 온 거죠. 그런 줄 알면서도 관객에게 무조건 순정을 바쳐야 하는 게 배우예요."
배신의 고통을 딛고… "나의 승리!"
윤석화는 "제게 연극은 허구의 땅에 세운 진실의 성채(城砦)"라고 말했다. 세상의 가면을 벗겨내고 진실의 민낯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배우로서 최고의 시기에 은퇴를 생각한 일도 있었다. 뮤지컬'명성황후' 때문이었다.
윤석화는 1995년 '명성황후' 초연 당시 성공의 주역이었다. 제작사는 윤석화를 명성황후에 캐스팅하면서 그에게 '캐스팅 변경 시 동의를 구한다'는 각서까지 써줬다. 그러나 2년 후 그가 모르는 사이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이 추진됐다. 주연은 윤석화가 아닌 신인 소프라노로 내정됐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윤석화는 "특정 제작자가 아니라 연극이 나를 배신한 것 같았다"며 "배신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모두 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고통을 준 연극은 구원도 줬다. 이듬해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 '마스터클래스'가 그를 일어나게 했다. "최고의 디바였던 칼라스가 딛고 일어난 이야기에 제가 일어선 거죠. 당신도 이랬군요, 공감하면서." 공교롭게도 마스터클래스와 같은 시기, 같은 공연장에서 '명성황후'가 재공연을 올렸다. 관객이 줄을 선 것은 마스터클래스 공연장 앞이었다. "마지막에 '나의 승리!'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얼마나 절절했겠어요." 마스터클래스의 연기로 윤석화는 그해 제8회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그에게는 배우로서 고수하는 원칙이 있다. "최고의 개런티를 달라고 해요. 액수는 중요하지 않아요. 줄 수 있는 최고. 그게 배우로서 자존심이에요. 대신 제가 최고를 보여줘야죠."
고통과 환희의 강을 엇갈려 건너온 윤석화에게 최근의 상처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다. 2010년 가족과 함께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웨스트엔드 연극·뮤지컬 제작에 뛰어들었다. 2011년 연극 '여행의 끝'을 시작으로 한국인 최초로 런던 웨스트엔드 프로듀서가 된 그는 2013년 5월 뮤지컬 '톱햇'으로 영국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인 올리비에상 3개 부문을 수상했다. 공동 프로듀서 5명 중 한 명으로 레드카펫을 밟고 기쁨에 젖어 있던 그에게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서울 공연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취소한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남편의 페이퍼컴퍼니에 명의를 빌려준 사실이 알려지자 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화여대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학력 파문' 등 여러 민감한 질문에도 평정을 유지하던 그는 공연 취소 대목에 이르자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 나이에도 기가 너무 죽고, 마음이 아파서…. 상처는 나이하고 상관없더라고."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연극 한 것이 후회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적도 있었고, 20층 꼭대기를 찾아헤맨 적도 있다"고 했다. "전 사막에 갖다놔도 살 사람이에요. 굉장히 터프해요. 연극만 안 했으면 뭘 해서든 잘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왜 연극을 하는 걸까. 연극이 무엇이기에. "저를 세상에 세워줬잖아요. 고난과 편견이 많았지만 감사한 일이죠. 감사를 계속 갚아야죠. 받을 때는 제가 잘났으니 받는 거고, 아닐 때는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되겠어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느냐는 질문에 성경 말씀을 꺼냈다. "유대인들이 40년간 광야에서 헤매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요. 하지만 가나안에 간다고 고난이 없나요. 고난은 언제 어디나 있어요.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윤석화는 "죽기 전에 미리 죽지 않는다"는 한 프랑스 여배우의 말이 좌우명이라고 했다. "살아 있으면서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내려놓는 거예요."
40년 배우 해보니… 나의 '먼 그대'는 관객
그는 '내려놓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기자의 귀에는 아직 다 내려놓지 못한 자신을 타이르는 주문(呪文)처럼 들렸다. "내려놓은 만큼, 고통을 대가로 치른 만큼, 뭔가를 얻어요. 문제는 보상이 죄다 정신적인 거라는 거죠. 물질적인 건 없고. 하지만 예술가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점영영영일프로라도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좋은 배우란 잘 사는 배우"라고도 했다. "잘 살아야 데뷔 40주년, 50주년이 넘도록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어요. 배우는 악기인데, 악기가 상하면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죠. 그래서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잘 살려고 해요."
공연 중인 '먼 그대'는 198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영은의 '먼 그대'를 그가 각색·연출한 1인극이다. 여주인공 문자는 한수라는 남자를 사랑하다가 받은 고통을 오히려 삶의 등불로 삼는다.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정신적 가치의 승리를 뜻한다. 윤석화는 "저에게 '먼 그대'는 연극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알게 해준 관객"이라며 "관객 앞에 무릎을 꿇고 또 꿇는 심정으로 매일 무대에 선다"고 했다.
말끝에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술이 좀 들어가면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들어보니 김민기의 '친구'다.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라는 기사가 참 좋아요. 세상에 용기와 신념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예요. 요즘은 극소수마저 사라져가는 것 같지만…. 예술이, 연극이 '아니다'라고 얘기해야죠. '(노래 가사처럼) 달리는 바퀴 소리'에 다 묻혀 지나가더라도."
-조선일보, 201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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