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1000명 피신시키고 20년 후원한 조종사

하마사 2015. 3. 5. 18:09

'6·25 전쟁고아의 아버지' 딘 헤스 대령

‘6·25전쟁 고아들의 아버지’헤스 대령(당시 중령)이 고아가 된 한 소녀를 안아 올린 모습.
‘6·25전쟁 고아들의 아버지’헤스 대령(당시 중령)이 고아가 된 한 소녀를 안아 올린 모습. /공군 제공
1950년 12월. 물밀듯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를 막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철수'를 결정한다. 서울에 남은 전쟁고아 1000여명이 중공군 손에 넘겨질 운명이었다. 이때 한 미군 조종사와 군목(軍牧)이 나섰다. C-47 수송기 15대를 동원해 아이들을 제주도로 피신시키는 계획이 세워졌고, 고아들은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군목이던 고(故) 러셀 블레이스델 중령과 함께 작전을 이끌었던 딘 헤스 미 공군 예비역 대령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맨 마지막 차례 어린이가 C-47 수송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문이 닫히는 순간 내가 느꼈던 그 지극한 감사와 안도감은 내 평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 공군은 '전쟁고아의 아버지' 헤스 대령이 3일(현지 시각) 미국 오하이오주(州)에서 98세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1956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아들 3명을 두었으나 한국 고아 소녀 한 명을 입양했고, 이후 20여년 동안 6·25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다. 1950년 7월부터 1년 동안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하는 역할도 맡았다. 자신도 250여 차례나 출격해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공군은 존경의 표시로 헤스 대령의 전투기인 F-51D 무스탕에 좌우명 'By Faith, I Fly'를 번역한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과 소파상 등을 수여했다.

1956년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헤스 대령의 6·25 수기는 전후 60주년을 맞은 2010년 '신념의 조인'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책은 유명 영화배우인 록 허드슨 주연의 동명(同名)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평소 "조국을 위해 미군이 감히 나서지 못하던 작전도 수행하려는 한국 공군의 불굴의 용기에 감명했다"고 6·25 참전 소회를 밝혀 왔다. 하지만 "한국이 통일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다. 공군은 "당시 참전 미군 조종사는 100회 출격하면 비전투 지역으로 전출되는 것이 관례였다"며 "그의 헌신은 '신념의 조인'으로 대한민국 공군사에 길이 남게 됐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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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고아 1000명 구한 '전쟁 고아의 아버지' 딘 헤스 별세

 


	딘 헤스씨(가운데)가 이승만 대통령 부부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대통령기록관
딘 헤스씨(가운데)가 이승만 대통령 부부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대통령기록관

6·25 전쟁 당시 전쟁 고아 1000여 명을 구해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린 딘 헤스(97) 미 공군 예비역 대령이 3일(현지시각)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헤스씨는 1950년 7월부터 1년간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자신도 250여 회 전투기 조종사로 출격해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그는 1951년 1·4 후퇴 이후 중공군이 서울로 물밀듯이 내려오자 미 공군 군목 러셀 블레이스델 중령과 함께 15대의 C-47 수송기를 동원해 전쟁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무사히 피신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후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렸고, 그의 전투기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직접 쓴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1956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한국 고아 소녀 한 명을 입양했고, 20여년 동안 6·25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