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우한곤 베이직하우스 會長

하마사 2015. 1. 27. 16:51

국제市場 출신 최고 구두쇠 '까만 잠바 아재'… 올해로 기부 40년차

속옷가게 거쳐 패션회사 일군 傳說… 우한곤 베이직하우스 會長

앞에선 구두쇠, 뒤에선 천사… 떨어진 노끈까지 주워 써
그렇게 모은 돈, 알고보니… 어려운 학생 남몰래 후원

40년 개인 기부액만 11억, 회사와 별개로 私財 털어

돈에도 눈이 달려있습디다… 귀하게 쓰면 내가 귀해져
나쁘게 쓰며 대우 안 하면, 딴 사람한테 휙 가삐리지

영화 '국제시장' 흥행 이후 방문객이 부쩍 늘어난 부산 국제시장(중구 신창동)의 좁은 포목상 골목에 검은 점퍼 차림의 한 노신사가 10일 들어섰다.


	속옷가게 거쳐 패션회사 일군 傳說… 우한곤 베이직하우스 會長
부산 국제시장의 메리야스(속옷) 가게 점원으로 시작해 연 매출 5000억원이 넘는 패션 회사의 회장으로 성공한 베이직하우스 우한곤(73) 회장이 이달 초 국제시장을 찾아 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 김종호 기자
"아이고! 우리 사장님 진짜 출세했다 아이가" "올라와서 차 한잔하고 가이소"…. 시장 상인들이 그의 손을 잡으며 즐거워했다. 낡은 구두를 신은 노신사는 베이직하우스 우한곤(73) 회장이다. 1950년대 국제시장에서 메리야스를 파는 점원으로 시작해 시장 한쪽 속옷 가게 사장을 거쳐 연 매출 5000억원이 넘는 패션 회사의 회장으로 대성(大成)한 그를 국제시장 상인들은 '전설'로 여긴다. 한때 자신의 6평짜리 메리야스 가게인 '일흥상회'가 있던 자리를 찾은 우 회장은 "못사는 게 너무 싫어서 죽어라고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전설로 통한다. 국제시장 최고의 '구두쇠'로 불리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모은 돈을 40년째 남을 돕는 일에 쓰고 있다. 지난해까지 그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등에 개인적으로 사재를 털어 기부한 돈은 11억원에 달한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3000명을 넘어섰다. "자린고비 영감이 남 돕는 데 돈을 썼다고 그런가… 사람들이 '그것참 기이한 일이다'라고 자꾸 하대, 하하."

우 회장네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무렵 "하도 먹고살 게 없어서" 고향인 경북 경주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했다. "당시엔 기성회비를 안 내면 학교에서 쫓아냈어요. 학교 가려고 찹쌀떡을 떼다 거리에서 팔기 시작했지요." 추운 겨울이면 군고구마 장수가 볼이 빨개진 그에게 고구마를 올려 굽는 조약돌 두 개를 쥐여주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돌멩이의 따스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금성중학교에 입학해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고등학교에 가는 대신 교장 선생님에게 "취직자리나 소개해 주세요"라고 우겨 당시 '한수(漢水·한강) 이남 최고의 시장'이라 불리던 국제시장의 한 메리야스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16세 때 일이다.

1950~60년대 국제시장의 점원은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형님 공부시키려고 발벗고 나선 동생들이거나, 동생들 학교 보내려고 돈 벌러 나온 장남들이었다. 그는 '돈 버는 형'을 택했다. "제가 6남매의 누님 하나 있는 장남이에요. 저 하나 희생해서 열심히 벌면 동생들이 다 편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시장에 나왔죠."

주인집에서 숙식(宿食)을 제공해 다행히 밥값은 안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엔 목욕하고, 이발하고 국제시장에서 두 시간을 걸어 초량동에 있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다시 걸어 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동생 4명을 모두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에 보냈다. "시장에 난로가 없어요. 겨울엔 손발이 다 얼어 터져요. 동생들 따순(따뜻한) 밥 먹고 공부한다는 생각에 일했어요."

우 회장은 장터에서 일한 지 5년 만인 20대 초반에 상가 2층에 한 평짜리 자기 점포를 얻었다. 가게엔 '날마다 흥하자'라는 뜻으로 '일흥(日興)상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장 상인들은 그를 '까만 잠바 아재(검정 점퍼 아저씨)'라고 기억했다. 검게 물들인 군복을 '헐코(싸고) 튼튼하다'는 이유로 사서 서너 해씩 입어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는 시장 상인들이 버린 노끈, 상자 같은 포장재를 주워다 재활용해 썼다. 건물 문을 닫는 정기 휴무일에는 1층에 노점을 차리고 메리야스를 팔았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구두쇠' '자린고비' '독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 편으로 이상한 소문도 돌았다. "쓰리꾼(소매치기범)들을 옥상에 데려가서 돈을 쥐여 줬다더라" "A상회가 망했는데 저 아재 쌀 한 가마니를 팔아다가 물건 떼올 돈을 대줬다"….

그는 1975년부터 12년 동안 매년 모교인 금성중학교 학생 15명에게 학비를 대주었다. 중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으로 바뀌자 1987년, 집과 가까운 곳에 사무실이 있던 초록우산어린이재단(당시 '한국복지재단')에 계좌 이체로 돈을 보냈다. 재단 관계자는 "자꾸 돈을 보내는 '우한곤'이 누구인지 직원들이 모두 궁금해했지만 연락처도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의류 상품권 2000만원어치를 직접 들고 오고 나서야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고 했다.

우 회장은 일흥상회에서 번 돈으로 염색 공장을 인수했고, 2001년 대학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한 아들(우종완 베이직하우스 사장)과 함께 패션 회사 베이직하우스를 세웠다. 그는 "돈을 버는 법도, 쓰는 법도 국제시장의 문화에서 배웠다"고 했다. 국제시장엔 유난히 불이 자주 났다. 화재가 나면 도매상이 소매상의 구매 대금을 면제해주고 새 물건을 싸게 대주는 것이 시장통의 불문율이었다. 덕분에 상인들은 가게가 불에 타고 며칠 지나지 않아 시장 한쪽에 가건물을 올리고 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점원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점주가 가게를 얻어 내보내는 '제금 보내기'('분가시킨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문화도 있었다. 그는 "'돈에 눈이 있다'는 진리를 시장에서 배웠다"고 했다. "돈을 귀하게 쓰면 돈도 나를 귀하게 여겨줍니다. 돈을 가지고 나쁜 데 쓰잖아요? 그러면 돈이 '나를 이렇게 대우 안 해주는 사람한테 있을 필요가 뭐가 있나' 하고 가삐린다(가버린다) 이거죠."

그의 기부 철학엔 무엇보다 '받았으면 10배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조약돌을 쥐여 주던 군고구마 장수나 낯선 나라의 까까머리에게 중학교 등록금을 대준 얼굴 모를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지요. 정직하게 사는데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조선일보, 2015/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