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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前자민련 총재

하마사 2015. 1. 27. 16:57

"국민은 호랑이… 사육사가 아무리 잘해줘도 언제 물지 모른다"

만화 일대기 '불꽃' 펴내는 김종필 前자민련 총재
"나이 90이 되어 가만히 생각해보니(年九十而知八十九非) 다 헛산 거구나 싶다"

'호랑이' 모르는 정치인들
더 겸손하게, 더 겸허하게 자기를 버리면서
나라를 생각해야 하는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회고록은 안 쓸 것"
뭐 좀 했다는 사람들 혼자 자랑하기 일색
같은 취급 받는 게 싫어… 老兵은 조용히 사라질 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터뷰가 계속되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연설하듯 말했다. 그는 나이 90이 되고 보니 “내가 뭘 남겨놨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한탄만 나온다”고 했다. 그는 회고록은 쓰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책은 평생의 벗이다. 요즘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역사물과 전기를 자주 읽는다. /이태경 기자
올해 구순(九旬·90세)을 맞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만화책이 나온다. 제목은 '불꽃', '현대사에 바람을 몰고 온 사나이 김종필 만화 일대기'란 부제가 달렸다. 김 전 총재는 회고록 같은 건 쓰지 않겠다고 오래전부터 말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만화책을 내는 데는 동의했다고 한다. 김 총재의 구술에 황선우 산학연종합센터 소장 등 측근들이 정리한 자료와 스토리를 바탕으로 만화가 김형태씨가 그렸다.

3월 출간을 앞두고 21일 남산의 한 호텔 식당에서 김 전 총재를 만났다. 그는 검은 외투 차림에 휠체어를 타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짙은 갈색 렌즈 안경 너머로 보이는 표정은 밝았다. "감기로 한 열흘 고생했다고." 그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감기는 거의 다 나은 듯했지만 여전히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왜 회고록을 쓰지 않고 만화 일대기를 냈나.

"만화로 내 일대기가 제대로 표현될까. 내 첫사랑 얘기로 영화를 만들면 돈 벌 거다. 좋아했지만 헤어졌고 헤어져서는 (그 사람이) 불행했거든. 그 사람이 암에 걸려서 인생 끝에 가서야 재회했지."

―첫사랑과 언제 재회했나.

"총리 되고 다음 해니까 1972년쯤일거다. 서울시장이 '아주 모범적인 여자 통장(統長)이 있는데 총리가 표창장과 금일봉을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여자가 총리실에 들어서는데, 아, 바로 그 사람이더라. 그쪽에선 나에 대한 보도를 보니까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그 사람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상을 주고 나서 물었다. '행복하냐'고. 그 말을 듣더니 그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불행한가 보다 싶었다. 그리곤 석 달 만에 암으로 죽었다고 하더라."

―마음이 아팠겠다.

"슬펐냐고? 유쾌하진 않지. 인생이 가지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의사였는데 전쟁통에 군대에 끌려간 후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딸도 얼마 후 죽었다고 한다. 아주 불행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날 보고 울음을 터뜨렸겠지."

"회고록 쓰지 않고 그냥 가겠다"

김 전 총재는 스스로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한가운데 있었다. 5·16의 기획자였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으며 공화당을 창당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의 막후 해결사이기도 했다. 그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길게는 1970년대 이후, 짧게는 1987년 대선 이후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3김(金) 시대의 한 축이었다. 1987년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고, 1990년 3당 합당, 1997년 DJP연합 등을 통해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늘 2인자였다. 2004년 정계 은퇴를 하기까지 43년 정계에 몸담는 동안 9선 의원이었고 국무총리를 두 번 지냈다. 그는 현대사의 주요 고비를 헤쳐오면서 한 시대의 풍운아이자, 변신과 처세의 달인이란 평을 동시에 듣는다.

―본격적인 회고록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회고록? 그런 거 써서 뭐 하나.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거다. 그러나 다 얘기할 수는 없다. 뭐든지 다 주면 재미없다. 뭔가 의문이 남아야 하는 거다."

―회고록을 안 쓰겠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여러 사람이 쓴 회고록을 다 읽어봤다. 특히 장관 지냈다, 뭐 좀 했다는 사람들이 쓴 회고록을 보면 자기 혼자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에이, 거기 껴서 회고록 쓰면 나도 같은 취급 받을 텐데 그건 싫다. 차라리 그냥 가는 게 낫지.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 장군이 한 얘기다. 지금 내가 그렇다."

―요즘도 책을 많이 읽나.

"책이 내 벗이다. 전기, 위인전, 역사물, 이런 걸 좋아한다. 요새는 옛날에 읽은 걸 서고에서 꺼내 다시 읽어보는데 재미있다."

―올해 구순(九旬)이다. 꼭 하고 싶었는데 못 해본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죽으면 집사람과 같이 누울 묘소를 고향 부여에 미리 만들어놨다. 묘비명도 만들었다. 내 인생철학은 '사무사(思無邪)'다. 허튼 생각은 일절 안 한다. 욕심부리지 않는다.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항산이 경제력이고, 항심이 민주주의다. 5·16 이후에 경제개발에 최선을 다한 이유가 바로 이거다. 금년에 내가 90인데, 90에 겨우 알게 된 거다. 여러 사람이 많은 것을 묻지만 소이부답(笑而不答),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묘비에 그렇게 써놨다. 나를 평생 조용히 내조해주던 반려가 고마운데, 영세(永世)의 반려로서, 끝없는 세상의 반려로서 이곳에 누웠노라고 썼다. 국회 서도(書道) 선생이기도 한 고강 선생이 비명을 써줬다."


	김종필 전 총재의 일대기를 담은 ‘불꽃-현대사에 바람을 몰고 온 사나이 김종필 만화 일대기’의 한 페이지.
김종필 전 총재의 일대기를 담은 ‘불꽃-현대사에 바람을 몰고 온 사나이 김종필 만화 일대기’의 한 페이지.

미리 만들어 둔 묘비명에 쓰인 '연구십이지팔십구비(年九十而知八十九非)'는 어떤 의미인가.

"나이 90이 되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 헛산 거구나, 그런 뜻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진짜 그렇다. 미국에서 뭐 좀 생각하는 사람, 일본에서 뭐 좀 생각하는 사람도 '내가 뭘 남겼다는 말이냐' 그러면서 죽는 사람이 많다. 젊어선 잘 몰랐는데 이제 졸수(卒壽·90세)가 되니까 알겠다. 졸수라는 게 이제 인생 졸업한다는 뜻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뭘 남겨놨단 말인가. 한탄밖에 안 나온다. 그것도 묘비에 써놨다. 내가 죽어 묻히거든 나중에 시간 있을 때 한번 산책하러 와봐라. 그럼 '이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한탄하면서 누워 있구나' 할 거다."


	그가 직접 쓴 묘비명이 새겨진 비석이다. 김 전 총재는 고향인 충청남도 부여에 부인과 함께 묻힐 자리를 마련해뒀다.
그가 직접 쓴 묘비명이 새겨진 비석이다. 김 전 총재는 고향인 충청남도 부여에 부인과 함께 묻힐 자리를 마련해뒀다. /산학연종합센터 제공

“내가 대통령 됐다면 더 못했겠지?”

―박근혜 대통령이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그건 박 대통령에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 소통하고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할 것이다. 진짜 소통 안 되나? 내 보기에 박 대통령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그럴까. 나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본다.”

―최근엔 지지율이 30%대까지 떨어졌다. 대통령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지지율이 떨어질까.

“국민이 호랑이라 그런 거다. 열 가지 중 하나만 잘못해도 물고 늘어지는 게 호랑이다. 열심히 하는 대통령에게 왜 지지율을 30%밖에 안 주느냐고 국민 탓해봤자 소용없다. 그게 국민이니까.”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상당 기간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그건 잘해달라는 기대다. 날이 갈수록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까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이고. 국민은 간단하게 뜨거워지고 간단하게 차가워진다. 왜 그러느냐. 그걸 묻는 게 바보다. 그런 게 국민이다.”

―2년 전 미수(米壽) 때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뭐가 가장 아쉬운가.

“뭔가 한 거 같은데 제대로 한 게 뭔가 싶다. 한탄스럽고, 후회스럽고, 국민에게 죄송하고, 그런 느낌뿐이다.”

―뭐가 그렇게 후회가 되나.

“조금 더 자유롭고 좀 더 민주적으로 자기 희망대로 살 수 있는 기반이 국민을 위해 다져졌으면 해서 혁명도 하고 했는데 미흡하니까 아쉽다. 미안하고 그런 감정이다. 더 잘했었으면 하지만, 내 능력껏 한 것이니까.”

―뭘 더 했으면 더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는 결과다. 국민이 지금보다 더 윤택하고 자유롭고 희망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을 굳혔으면 더 잘했다고 했겠지만 미흡하기 짝이 없는 거다.”

―만일 김 전 총재가 대통령이 됐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더 못했겠지? 하하하…. 남 하는 거 비평하는 건 쉽다. 자기가 해보라고 해. 더 못한다고. 그런 거다.”

―대통령이 됐다면 이건 꼭 했을 텐데 하는 게 있나.

“솔직히 얘기해서 나는 대통령 하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 두 번 대통령에 입후보는 했다. 그건 당을 만들고 정치를 계속 하려니까 할 수 없는 과정이었지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잘 도와서 대과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밑에서 도와 드리자는 게 내 정치 철학이었고, 그대로 했다.”

―하지만 1979년 10·26 직후처럼 대통령이 될 뻔한 기회도 있지 않았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난 아니었다. 그때도 난 원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에 비해 권력 의지가 약한 것일까.

“대통령 하면 뭐 하나. 역대 대통령을 잘 봐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나대로 그 사람들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고 싶지만 안 한다. 지난 일이니까. 다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할 텐데 내가 뭐라고 평을 하겠나. 수고들 했다고 생각하지. 그건 역사가 평가하는 거다. 국민이 평가하는 게 아니라 역사가 평가한다.”

―‘영원한 2인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지 내가 그랬나.”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2인자였던 노태우에게 자신의 경험을 살려 ‘2인자로서의 처신’에 대해 조언하지 않았나.

“이왕에 일을 벌였으니 잘하라는 뜻이었다. 잘하려면 전두환과 사이가 벌어지면 안 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 다음 사람이 나오는 걸 싫어한다. 나는 나라를 위해 그런 말을 한 거지 전두환이나 노태우를 위해서 한 게 아니다. 절대 권력자는 예외 없이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내부에 대립을 일으켜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방식)을 적용해서, 둘째 놈을 못살게 군다. 전두환 성격을 보니 그럴 것 같아서 둘이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조선일보, 201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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