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이주영 해수부 장관

하마사 2014. 11. 9. 08:24

"그날 이후 200일…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이주영 해수부 장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한 '가슴 아픈 기록'

"장관놈 새끼라고 욕해도 묵묵히 머물렀더니… 장관님이라 불러주데요"

4選 의원서 울보 장관으로
"가족들과 얘기하다가도 그분들 울면 따라 울고…
살면서 이렇게 대놓고 많이 울어본 적도 없어요"

그의 품엔 실종자들 사진
실종자가 10명 남았을 때 가족들이 건네준 사진 뭉치 한장 한장 꺼내 보이던 그
목이 메고 눈시울 붉혀…

102일 만에 실종자 추가 수습
"서로 맡은 구역 바꿔서 교차수색 하다가 발견…
잠수사 헬멧 카메라에 포착 물 밖서 장면 보다가 찾아내"

희생 헛되지 않게 '安全, 安全'
"저도 車 뒷자리에 타면 이제 안전벨트 꼭 맵니다
어선에서 조업하는 분들도 구명조끼 늘 착용해야"

저는 그저 罪人이라서…
"머리카락 안 자르고 두니 허연 머리 자꾸 나오네요
가족분들이 저를 배려해서 염색도 하고 자르라고…"

"우리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부모한테도 참 잘했어요. 장관님은 자제분이 어떻게 되시나요."

지난 4월 25일 새벽 전남 진도 팽목항의 상황실 앞에 있는 가족대책본부 텐트 안.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던 이주영(63)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한 엄마가 이렇게 물었다. 또 다른 엄마는 "장관님 힘드실 텐데 좀 누우세요. 눈 좀 붙이셔야죠"라고 했다.

"그 전까지 나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장관놈 새끼'였다. '저 장관놈의 새끼, 물에 빠뜨려 죽여버려라'는 얘기도 들었고 멱살도 잡혔고 허리띠도 잡혔다. 자식 잃은 부모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주변에선 봉변당할 수 있으니 피하라고도 했지만 봉변 좀 당하면 어떤가. 그런 사고가 났으니 정부는 묵묵하게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죄인 아닌가. 그런데 밤새도록 대책을 논의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다가 새벽녘에 가족들이 나를 장관님이라고 불러줬다."

 지난 2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 지점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장관의 모습을 사진기자가 멀리서 찍었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은 정면 사진은 찍지 않겠다고 한사코 카메라를 외면했다. 지난 2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 지점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장관의 모습을 사진기자가 멀리서 찍었다. 4월 16일 참사 이후 한 번도 이발과 염색을 하지 않은 희끗한 머리가 바람에 휘날린다.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대참사의 수습을 총지휘하며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살면서 이렇게 대놓고 많이 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 김영근 기자
전날 상황은 거칠었다. 진도군청에 있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 실종자 가족들이 들이닥쳤다. 사무실 집기가 날아다니고 유리창이 깨졌다. 실종자 수색은 가족들이 기대하는 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당장 대책을 제시하라고 했다.

몇 시간 후 이 장관은 수색 계획을 만들어 김석균 해양경찰청장과 함께 팽목항으로 갔다. 처음엔 가족 대표들과 이야기하다가 엄마들이 합류했다. 일부 가족은 수중 구조작업 장비인 다이빙벨을 투입하자고 했다. 다이빙벨이 제대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등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이 장관은 가족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해경청장은 수색작업 지휘를 위해 자리를 떴다. 가족들은 이 장관은 못 가게 붙잡아두었다. 다음 날 아침 가족 중 한 명이 "장관님이 우리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보내주자"고 할 때까지 그는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구조되고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이 장관은 사고 당일 진도에 와서 7월까지는 거의 내내 이곳에 머물렀다. 해수부 장관이 다른 업무도 챙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8월부터는 반쯤, 세월호 참사로 파행을 겪던 국회가 정상화된 9월부터는 주말에 진도를 찾고 있다.

이 장관이 주말에 진도에 머문다기에 지난 2일 진도로 갔다. 세월호 사고 발생 201일째인 이날 진도 팽목항엔 바람이 거셌다. 방파제 난간에 빈틈없이 매인 노란 리본들이 거칠게 휘날렸고, 검푸른 바닷물은 무섭게 넘실거렸다. 여야는 지난달 31일 세월호법에 합의했고, 지난달 28일엔 102일 만에 295번째 실종자를 찾았다. 이제 남은 실종자는 9명이다.

이 장관의 현장 사무실이자 숙소인 진도군청 4층. 그는 푸른색 점퍼 차림이었다. 한때 얼굴을 뒤덮었던 수염은 깎았지만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길어 어깨에 닿았다. 썰렁한 사무실 한편엔 병풍이 쳐져 있고 그 뒤에 간이침대, 침대 위엔 슬리핑백이 있었다.

이 장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수색작업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인터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먼길 왔다며 차 한 잔을 내기에 앉아서 안부를 나누다 보니 세월호 참사 현장 수습 책임자로 보낸 지난 200일간의 이야기가 풀려나왔다. 그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가족'이라고 했다.

―실종자 수색작업은 언제쯤 끝날 것 같은가.

"언제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실종자 가족들과도 의논을 해봐야 한다. 오늘 파도가 4m 높이까지 갔다. 지난번 태풍 왔을 때보다 파도가 더 높은 것 같다. 이러면 작업 못한다. 기온이나 수온은 아직 괜찮지만 파도가 높으면 위험하다. 실종자 수색 현장에 있던 바지선은 목포로 피항했다."

―사고 수습 현장 총책임자로서 제일 중요한 원칙이 뭐였나.

"도망가고 피하고 이런 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욕만 먹지 수습이 안 된다. 사고 발생 며칠 안 됐을 때 실종자 가족들이 여기 있는 장관으론 안 되니까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버스 내놓으라고 했다. '뭐가 필요한지 말씀주시면 다 조치하겠다'고 설득했지만 안 통했다. 가족들을 제지하는 경찰 철수시키라고 해서 했고, 정홍원 총리 부르라고 해서 새벽 세 시에 총리 깨워 나오게 했다. 최대한 듣고 가능하면 그분들 원하는 대로 해드리려고 노력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게 앞서 이야기한 지난 4월 25일 새벽인가.

"엄마들이 '이 사람이 어쨌든 애는 쓰는구나' 하는 정도는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사고 수습 현장에서 많이 울었겠다.

"진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가족들하고 얘기하다가 그분들이 울면 울컥해서 따라 울었다. 살면서 이렇게 대놓고 많이 울어본 적도 없다. "

―가장 눈물나게 하는 일이 뭐였나.

"실종자가 10명이 남았을 때 가족들이 간직하고 다니라고 준 사진을 지금도 품에 넣고 다닌다. 4인 가족 중 딸만 살아난 경우도 있고, 선생님도 두 분 계시고…. 사진을 보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이 장관은 코팅한 사진 뭉치를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내 한 장 한 장 보여주다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금방 눈시울이 빨개졌다.
이주영 장관이 지난 2일 진도군청 4층 사무실에서 남은 실종자 사진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이주영 장관이 지난 2일 진도군청 4층 사무실에서 남은 실종자 사진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 김영근 기자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소통이더라

―정치인으로서 소통은 잘하는 편이라고 자부하지 않았나.

"정책 조율도 많이 했고 총선·대선 때도 일을 많이 했으니까 각각 다른 입장을 존중해 조율하고 전달하는 일을 많이 해온 편이다. 그 경험이 도움이 됐다. 가족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가능한 한 수용하려고 했다. 나중엔 가족들이 '우리 의견을 잘 반영해서 수용해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신뢰를 해주시더라."

―정치인으로서 과거에 했던 소통과 이번에 필요한 소통 능력은 달랐을 것 같다.

"가족들이 하고 싶어 하는 얘기를 충분히 들었다. 가족분들 따로 만나보면, 더 할 수 있는데 (정부에서)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들 하신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합리적인 요구면 수용하고 조정했다. 소통이란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하는 거였다."

―4선(選) 의원이지만, 팽목항에서 이전과는 다른 정치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나.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 어떻게 내 정치 얘기를 할 수 있겠나."

―여야가 최근 이른바 세월호 3법에 합의했다. 이제 세월호 상황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나.

"세월호 문제 해결 과정에서 세월호법이 타결됐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걸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여기 실종자 가족들이 그런 걸 논의하진 않는다. 나도 여기선 신속하게 실종자를 찾고 그 가족들을 만나는 일에만 주력한다."

◇수습 후 합당한 책임 지겠다

―세월호 사고 발생 첫 보고는 언제 받았나.

"지난 4월 16일 오전 8시부터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경제장관회의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다음 일정을 기다리는데, 오전 9시 29분에 문자 메시지로 보고가 왔다. 해경청장에게 전화해 상황을 듣고 인천 해경본부로 갔다. 길이 막혀 시간이 꽤 걸렸다. 해경 상황실에 들어가보니 이미 배가 뒤집어진 상태였다."

―팽목항엔 언제 도착했나.

"인천에서 김포 공항으로 가서 해경 비행기 타고 무안공항으로 가 헬기 타고 현장 지휘함으로 갔다. "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화제였다. 왜 수염을 길렀나.

"사고 수습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디 앉아서 면도를 할 수가 없었다. 면도기를 사오라고 할 정신도 없었다. 그냥 내버려뒀더니 수염이 자꾸 자라는데, 왠지 죄스러운 마음에 깎지 못했다. 나중엔 그렇게 길어졌는 줄도 몰랐다."

―머리는 한 번도 안 잘랐나.

"안 잘랐다. 수염은 외국에 국제회의 갈 때 깎았다. 머리카락은 까맣게 염색하고 다니다가 안 자르고 그냥 두니 허연 머리가 자꾸 나온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엔 가족들과 농담도 더러 했는데, 그분들이 머리도 자르고 염색도 하지 그러냐고 한다. 처음엔 제가 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그분들이 저를 배려해준다. '장관님이 국회 가서 의원들에게 혼나지 않게 지켜드려야 한다'고도 하고…."

―이 장관 가족도 진도에 가끔 오나.

"처음에 아내가 갈아 입을 옷을 챙겨서 들고 왔는데 실종자 가족들에게 너무 죄스러워서 안 만나고 그냥 돌려보냈다. 사무관 보내서 옷만 받아오라고 했다."

―밖에 있는 식당에서도 가끔 식사하나.

"김밥이나 비빔밥 그런 거 배달시켜서 여기서 먹는다. 외부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을 다른 분들이 보면 모양이 안 좋을 것 같다. 4월 16일 이래로 술 한잔 안 마셨다. 추석 때 여기 식당들이 다 닫았을 땐 컵라면을 먹었다. 우리부터 겸허한 자세로 있어야 한다."

이날도 군청 사무실에서 배달돼온 김밥과 어묵탕을 점심으로 먹었다.
이주영 장관이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이 자식·부모의 귀환을 염원하며 가져다 놓은 신발을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방파제에는 노란 리본과 함께 석가탄신일에 매단 연등(燃燈)이 그대로 달려 있다.
이주영 장관이 전남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이 자식·부모의 귀환을 염원하며 가져다 놓은 신발을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방파제에는 노란 리본과 함께 석가탄신일에 매단 연등(燃燈)이 그대로 달려 있다. / 김영근 기자
◇세월호 사고 수습 후 사퇴할 것

―지난 6월 개각 때 유임됐다.

"그 전에 유임 이야기가 자꾸 나왔지만 개각 즈음해서 사표를 보냈다. 대통령께도 전화드려서, 대통령께도 부담이 되니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나중에 청와대에서 밝힌 것처럼 사고 수습이 아직 안 끝났으니 계속 일하라는 뜻에서 유임시킨 걸로 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큰 사고나 문제가 생겼을 때 해당부처 장관에게 책임을 물어 사퇴시키지 않고 수습을 맡긴 건 드문 일이다.

"큰 사고 나면 장관을 즉각 자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선지 기자들이 자꾸 유임 소감을 묻더라. 나는 유임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그걸 말로 설명하려니 잘 안 돼서 대변인에게 보도자료를 내달라고 했다. '수습을 끝까지 잘하라는 국민의 엄중한 명령으로 생각하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 수습이 끝나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져야 할 책임, 거기 합당한 처신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사퇴하겠다는 뜻이다."

―그 입장은 지금도 변함없나.

"세월호 사고에 큰 책임이 있는 부처의 장으로서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사를 하다가 왜 정치를 시작했나.

"판사로서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너무 컸다.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점도 잘 안 맞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102일 만에 실종자를 찾으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

"가족들이 '지금까지 수색 제대로 못한 거 아니냐. 열 몇 번 들어갔다는데 왜 거기서 또 나오냐. 건성으로 한 것 아니냐'고 했다더라. 장관 오라는 소리도 나왔다. 그래도 그동안 유대가 있어서 못 가는 사정을 이해해주셨다. 지금까지 치중한 곳은 4층 선미 부분의 좀 넓은 구역인데 장애물이 무너져 내려 그걸 치우는 데 석 달이 걸렸다. 수색팀들이 그간 맡았던 구역을 서로 바꿔서 교차수색을 하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이다."

―어떻게 찾았나.

"물속에선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잠수사 헬멧에 단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위에서 보고 찾아냈다고 한다."

―세월호 선체 인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시간이 걸릴 거다. 지금까지 인양에 대해서 가족들이나 언론과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분들에게 인양은 가슴 철렁한 이야기다. 인양하자는 건 수중 수색 중단하자는 것으로 들린다. 인양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실종자를 찾는 건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그분들은 수중 수색으로 찾기를 바란다. "

―수색 초기엔 이 장관이 바지선에 가면 실종자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엄마들이 자주 가달라고 했다던데.

"당시엔 바지선에 한 번씩 들어가면 실종자들이 잘 나왔다. 수색 상황 설명회 때 매일 갔는데 어떤 엄마가 '우리 아들이 어젯밤 꿈에 두 번 나타났다'고 하더라. 배 밖에 있는 뻘을 헤집으면서 나오려고 하는 꿈을 꿨다는 것이다. 그분 아들이 있던 방에선 그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9명인가 나왔다. 그 엄마가 '그 방에선 더 이상 실종자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하길래 '아니다. 거기서 몇 차례 실종자가 나와 더 이상 없는 줄 알았지만 계속 나왔다. 또 나올 수 있으니 실망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 이튿날 그 방에서 열 명째 실종자를 찾았다. 그 엄마가 장관이 관심을 가지면 아이가 나온다고 해서 다른 엄마들이 '장관님, 바지선에 좀 가세요. 그럼 우리 아이 나올 거 같아요'라고 했다."
진도군청에 마련된 이 장관의 숙소 겸 사무실. 간이침대 주변을 병풍으로 둘러놨다.
진도군청에 마련된 이 장관의 숙소 겸 사무실. 간이침대 주변을 병풍으로 둘러놨다. / 김영근 기자
◇해수부 장관 될 줄 예상 못해

―지난 3월 해수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뜻밖의 일 아니었나.

"나는 원조 친박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대위원장이던 시절 정책위의장을 맡았는데 다들 진다고 하던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이겼다. 박 대통령이 대선 때도 정책을 계속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경선 캠프 선대위의 중요 직책을 맡았고, 대선기획단장을 했다. 김무성 대표 등을 비롯해서 대선 때 중추적 역할 한 사람들은 새 정부에서 임명직을 안 하기로 했다. 장관으로 거론된다고 해도 안 한다고 했다. 원내대표에 뜻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최경환 의원이란 복병을 만나서 잘 안됐지만…."

―당시 해수부 장관을 하기엔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수긍한다. 국회의원 4선 하는 동안 관련 상임위원회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마산이 지역구니까 항만, 수산업 등 관련 사업이 있어 예산 반영을 위해 해수부와 접촉해본 것 말고는 별로 인연도 없었다."

―해수부 장관은 참 어려운 자리라고들 한다. 18년 동안 장관 17명이 거쳐갔다는데.

"그때 그런 생각은 못하고 장관이 됐다."

―세월호 사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진상조사, 해경 해체 등 최근 합의된 부분을 마무리하고 나서 그다음엔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그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을 잘 수립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안전을 챙겨야 한다는 의식을 갖는 일이다. 나만 해도 이전엔 차 뒷자리에 타면 안전벨트 안 맸지만 요즘은 꼭 맨다. 어선에서 조업하는 분들도 구명조끼를 늘 착용해야 한다. 안전에 관한 기본사항만 지켜도 많은 인명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안전의식을 강화하는 건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돈도 시간도 많이 들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최소한의 안전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중고 선박을 해외에서 싸게 들여와 개조해서 연안여객선으로 쓴다. 금융지원을 해줘서라도 그런 고리를 끊고 새 배를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

―연안 여객선 외에 다른 교통 수단이 없는 낙도 주민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 아닐까.

"낙도에서 살아주는 것만 해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해양영토 보전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낙도 교통대책을 공공 영역에서 챙겨줘야 한다. 우리나라 연안여객선이 170여척 되는데 그걸 새 배로 다 바꾸면 약 1조4000억원이 든다고 한다. 고속도로 건설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리 큰 액수는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국내외 관광 증진이라는 측면까지 고려하면 우리가 그 정도 투자는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 장관이 팽목항을 둘러보는 동안 동행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 학생의 엄마가 이 장관을 보더니 다가와 인사했다. 자원봉사자들도 반갑게 다가왔다. 이 장관은 "물결이 이렇게 높이 일면 걱정"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걸어다닐 때 살짝 다리를 저는 듯했다. 어떻게 아프다고는 안 하고 그저 "다리 때문에 병원에 다닌다"고만 했다.

대참사 현장 수습 책임자로서 그에겐 트라우마가 없을까. 그는 "잘 모르겠다.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고 했다.

이주영 장관은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8년 제20회 사법시험 합격. 1995년 부산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었다. 제16대 총선 때 경남 창원을에서 당선, 17대 때 창원을에서 낙선했다가 2006년 재·보궐 선거에서 마산갑에서 당선. 이후 현 19대까지 4선(選). 2012년 새누리당 대선기획단장을 지냈고, 지난 2월 원내대표에 두 번째 도전했다 실패한 후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됐다.


-조선일보, 201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