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고향

하마사 2014. 9. 7. 19:06

본문: 눅 15:11-24

제목: 고향

찬송: 488장

목표: 고향을 생각하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한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하여 설교하기가 곤란할 정도입니다. 수많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대하면 탕자의 비유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어 뻔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와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 고향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추석연휴이기 때문입니다. 추석은 민족의 대이동을 불러오는 명절입니다. 명절에 왜 고향에 갑니까? 살아가면서 고향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저는 지난 주 월요일에 동생과 함께 고향에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선조들의 산소를 찾아 예초기와 낫으로 벌초했습니다. 여담이지만 벌초하다가 독사도 잡았습니다. 고향이 수몰예정지라 집들은 부서지고 사람들은 이주했습니다. 마을이 수몰되어도 고향은 마음속에 그대로 자리할 것입니다.

고향은 떠나온 사람에게 더 애틋하고 그립습니다. 고향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우리의 영원한 본향 천국을 소망해 보겠습니다.

 

고향은

1. 기다림입니다.(20절)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이 있는가 하면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태어난 고향과 자라난 고향이 다릅니다. 태어난 고향은 태어나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고 그 이후로 자라나서 지금도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자라온 고향이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고향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다메섹 도상이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 바울로 변화된 곳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에게는 갈릴리가 영적인 고향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는 양을 치다가 보았던 불붙는 떨기나무가 있었던 미디안광야였으며 엘리야에게는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펼쳤던 갈멜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거나 힘을 얻은 곳이 영적인 고향입니다.

우리가 삶에 지치고 몹시 곤할 때 고향을 찾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옛 동산에 올라보면 추억에 잠겨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시름을 달랠 수 있습니다. 저도 때로는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을 찾곤 합니다. 산등성이에 올라보기도 하고 냇가에 가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향교회의 작은 기도실에 들러 하나님께 기도하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을 돌아보곤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태어난 고향은 베들레헴이지만 실제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출생 후 잠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곤 태아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나사렛이란 말이 붙어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지켜보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마 13:57) 심지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내려서 생명까지 해치려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사마리아에서 배척받으시고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기다리는 영원한 고향을 사모하며 사셨습니다.

 

고향은 기다림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 중에서 자기 분깃을 챙겨서 집을 나간 후 허랑방탕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하며 재산을 낭비하여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그 때서야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들이 거지가 되어 집에 돌아올 때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기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기다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날마다 마을 입구를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렸던 아버지였습니다. 몰골이 변했어도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음속에 그리며 기다리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이 있는 곳이 고향입니다.

저도 저녁예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출발합니다. 부모님은 늦은 시간에도 주무시지 않고 불을 밝히고 아들 가족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려주시는 부모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집을 나왔는데 막상 갈 곳이 없다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어떤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왔는데 막상 갈 곳이 없더랍니다. 자기를 반겨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합니까?

탕자는 외롭고 비참한 환경에서도 아버지와 고향을 생각한 것이 은혜입니다. 비록 종의 한사람으로 취급받겠다는 심정으로 찾았지만 아버지와 고향이 있었습니다. 돌아갈 고향을 생각하고 돌아간 것이 은혜 중에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시고 돌아갈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받아주고 기다려주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과거는 묻지 않고 믿음만 있으면 언제나 받아주는 영원한 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기다림은 언제나 길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다림이 없었으면 삶 전체가 절망이요, 숨이 막혔을 겁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곧 축복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아픔이요 또 행복입니다. 기다림에는 행복이 따릅니다. 마음을 써야 합니다. 때론 일상을 놓고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기에 기다리고, 용서하기에 기다립니다.”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었고,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다림의 결과가 우리입니다. 고향은 기다림입니다. 사랑의 기다림이 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교통체증에도 불구하고 달려갑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다리게 하소서.

사랑하며 기도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의심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직 믿고 울먹이며 기다리게 하소서.

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타나 ‘기다려 주어 고맙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이 이렇습니다. 힘들어도 기다리고, 사랑하며 기다리고, 의심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믿고 울먹이며 기다리는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기다려주어 고맙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림이 믿음의 고향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으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도 누군가를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속을 썩이는 자녀들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속을 뒤집어 놓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우리가 기다려주어야 할 사람이 세상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돌아올 때 아무 조건 없이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품에 안아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삶의 목적을 잃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3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골방에 숨어서 제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옛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낙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기다리고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갈릴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영적인 고향이었습니다.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숯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자신들을 책망하지 않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다시 재충전 받은 제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로 거듭났습니다.

고향은 기다려주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낙심한 제자들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넓은 품으로 성도를 기다려주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고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며 동구 밖을 서성거리는 아버지와 고향이 있음을 믿고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내 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그리움입니다.(17절)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고향을 이북에 두신 실향민들은 명절 때가 되면 고향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최북단에 가서 이북 땅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세 명의 동생들이 외국에 살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족들과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가 고통 가운데 그리던 곳이 아버지가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 때 누렸던 고향의 풍족함이 그리웠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는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돈이 많아 허랑방탕하며 살 때는 고향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돈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로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상열락을 즐기느라 고향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낭비하고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었을 때 그 많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세상에 취해 있을 때는 모릅니다. 모두가 친구인 듯 보입니다. 심방을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사람이 밀물처럼 모이더니 사업이 실패하자 썰물처럼 빠지더라고 했습니다. 전화와 발길이 동시에 끊기더라고 했습니다. 탕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고향과 풍족한 고향 아버지 집이 그리웠습니다. 매정하게 고향을 등지고 떠났던 아버지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도 그렇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땅으로 가서 살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잠시간의 흉년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이방땅으로 갔다가 가장 소중한 가족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때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자부 룻과 함께 쓸쓸이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친족 보아스로부터 은혜를 입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고향을 그리며 돌아갔을 때 이런 은혜가 임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실패했을 때도 그립지만 성공했어도 고향은 그리운 곳입니다. 다니엘이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기도했을 것입니다. 요즘도 출세한 사람들이 고향을 위해 장학금을 전달하거나 학교나 마을회관 등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기약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라반에게 고향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라반의 요구로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 더 머물렀습니다. 잠언 27:8절에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보금자리를 떠도는 새처럼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떠나 말년에는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죽으면서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창 47:30)고 요셉에게 유언했습니다.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고향에 묻히기를 소원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총리 아들의 효도를 받으며 평안히 살았지만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인생의 말년을 애굽에서 호강하며 살았지만 죽는 순간까지 고향을 잊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여기는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부귀영화를 누려도 이곳은 영원한 고향이 아닙니다. 혹은 지금의 삶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라도 끝이 있고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고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쁠 때나 좋을 때나 고향을 그리며 살았던 야곱처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도 고향을 그리며 삽니다. 철새와 물고기도 그렇습니다. 철새는 수천킬로미터를 날아 고향을 찾아갑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죽습니다. 강에서 태어나 자란 후 일정한 때가 되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죽을 무렵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서 죽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영원한 본향을 그리며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영원한 고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할 임시장막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임시장막에 모든 것을 다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올인하면 천국이 보이지 않거나 작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영원한 본향, 천국을 그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잔칫집입니다.(22-24절)

22-24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고향은 잔칫집과 같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배설해주는 곳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고향은 훈훈한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정겨운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타향살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랑과 정이 배어나는 곳입니다. 고향과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기쁨의 잔치를 배설해주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 고향과 같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4절) 세상에서 흘린 모든 눈물을 닦아주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9장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성도들이 복이 있다고 천사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의인된 성도들은 영원한 고향 천국에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황홀하고 기쁜 잔치자리이겠습니까? 잔칫집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를 기다리는 예수님과 그리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잔칫상을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몇 년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에 갔었습니다. 어떤 분이 저를 보고 반가워하며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동생과 연년생이라 어머님의 모유로 둘을 먹이기에는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 때 자기의 젖을 먹여주었노라 하시며 웃었습니다. 젖배를 곯는 다른 아이에게 젖을 물려주는 곳이 고향입니다. 훈훈한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모유까지 먹여주는 곳이 고향입니다. 이처럼 고향은 넉넉한 사랑이 있는 풍성한 잔칫집처럼 기쁨을 주는 곳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안개, 나그네, 풀과 꽃, 품꾼, 그림자, 장막, 잠깐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짧고 유한하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본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위해 하늘의 영원한 본향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천국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아름답고 고통과 저주가 없으며 영원한 안식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임시장막이지만 천국의 생활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천국의 모형을 만들고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번 추석명절을 통해 일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천국을 고향을 찾아서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고향은 기다림입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고향은 그리움입니다. 탕자가 그리워하는 풍족한 아버지의 집입니다. 고향은 잔칫집입니다. 만남과 기쁨이 있는 행복한 잔칫집과 같습니다. 이런 고향 같은 가정, 고향 같은 교회를 누리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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