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비.
사적 제101호. 비신 높이 395㎝, 너비 140㎝. 1639년(인조 17)에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이다.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큰 비이다.
비양(碑陽)에는 왼쪽에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에 만주문(滿洲文)으로, 그리고 비음(碑陰)에는 한문으로 자경 7푼(약 2.1㎝)의 해서로 새겼으며 비액(碑額)은 전서(篆書)로서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라고 적혀 있다.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篆)하였다.
이 비는 1636년 12월 청 태종이 대병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전도 보람없이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하는 욕을 당하여 백성의 어육(魚肉)을 면하였던 사실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에 담아 세우게 된 우리 민족 치욕의 기록이다.
본래 청 태조가 청나라와 조선은 형제로 보고 서로가 예우(禮遇)로써 대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의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청 태종이 대로하여 쳐들어와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駐蹕 : 임금이 잠시 머무름)하고 항복 받은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한다는 강박(强迫)에 못 이겨 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몽고문·만주문·한문의 3종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이 비뿐이다.
[참고문헌]『朝鮮金石總覽』(京城 : 朝鮮總督府, 19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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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인조 17)에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淸)태종의 공덕비.
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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