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42:1~5
제목: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군대생활 하면서 천리행군이라고 있었습니다. 행군 중에 갈증을 느낄 때 10분간 휴식의 고마움과 물의 소중함을 경험했습니다. 운동하고 땀 흘리고 갈증을 느낄 때 물한모금의 소중함.
본문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 같이 시인은 주님을 찾기 위해 영적인 갈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갈급함’이란 단어는 지독한 가뭄 때 하나님을 향하여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울부짖으며 찾음과 같이’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신 것과 같은 상황에서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죽으신 것처럼 생각 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이 지속될 때가 그렇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1. 침묵(1~2)
1~2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기도응답이 없는 것을 사슴에 비유했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고통스럽습니다. 울부짖는 들짐승처럼 하나님께 절규하며 기도해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박국선지자가 절규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기도응답이 늦을 때 답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늦을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면서 지체하셨습니다.
현대인은 더딘 것을 참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빨리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급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도 빨라야 살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못 참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도 수 주일이면 될 것을 40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을을 가르치셨습니다.
2. 조롱(3)
3절,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실종되었을 때 말레이시아 정부의 고위 관계자가 실종 여객기의 위치를 찾기 위해 주술사를 초청했습니다. 50년 경력의 주술사 라자 보모(보모는 '주술사'를 뜻함)는 조수들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을 찾아 각종 의식과 기도를 진행했습니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은 코코넛 열매와 낚시 통발을 이용한 그의 의식을 보기 위해 취재진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보모는 "비행기가 지금도 날고 있거나 추락했을 것"이라는 황당한 예언을 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네티즌들이 "대단하다. 내 생각과 똑같다"며 조롱했다. 중국의 한 네티즌은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중국은 10대의 인공위성을 동원해 수색을 하고 있는데 말레이시아는 주술사를 투입했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대적들도 시편기자를 마치 주술사 취급하듯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고, 설령 계시다 하여도 힘이 없거나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라는 조롱이 깔려 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느냐고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멸시당하는 고통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시편 기자의 눈물이 음식이 되었습니다. 마치 매일의 식사처럼 날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끼니를 거르지 않듯이 고통으로 흘리는 눈물이 밤낮으로 지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고통은 이렇듯 멈추지 않고 반복적으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참기 어렵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할 때 고통스럽습니다.
3. 상실(4)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고통 중에 상실의 아픔이 가장 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상실한 아픔은 치유가 어렵습니다. 천안함 폭침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행복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기억하고 위로를 받아야하지만 오히려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도리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을 서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마음이 더욱 상했습니다.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과거에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조롱하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어제의 동역자가 오늘의 비판자로 변할 때 마음이 낙심됩니다. 함께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떠나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로 돌변할 때 견디기 힘든 상실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울고만 있어야 합니까? 절망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며 조롱하는 사람들과 한 패가 되어야 합니까? 고통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시편기자의 대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하느냐고 반문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음으로 찾아오는 고통을 극복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조롱하던 그 조롱의 고통도 극복했습니다. 과거의 기쁨과 감사를 상실했던 고통도 극복했습니다.
대적자들은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도우심을 믿고 여전히 찬송하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상황과 환경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힘드십니까? 사람들의 조롱으로 고통스럽습니까? 잃어버린 상실로 고통스럽습니까?
시편기자처럼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백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여전히 찬송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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