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기타자료

소니의 추억

하마사 2014. 1. 29. 10:28

열네 살 소피 마르소는 1980년 영화 '라 붐'으로 세계 소년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파티에서 만난 사내아이가 마르소에게 헤드폰을 씌워줬다. 사내아이가 찬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 '라 붐'의 주제곡 '리얼리티(Reality)'가 흘렀다. 둘은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한국에선 극장 개봉을 하지 않아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는 친구 집에 모여 '라 붐'의 그 장면을 넋 놓고 봤다. 워크맨과 헤드폰 문화는 그렇게 한국에 알려졌다.

▶1980~90년대 한국 10대들 사이에서 소니의 워크맨은 지금 애플의 아이폰이었다. 손바닥만 한 게 얇고 날렵해 최첨단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일본 출장 간 아버지나 삼촌이 워크맨 사오기만 고대했다. 워크맨은 1979년 세상에 선보였다. 해외 출장이 잦던 소니 창업주 이부카 마사루가 '비행기에서도 음악을 즐길 수 없을까' 궁리한 게 출발점이었다. 워크맨은 걷거나 춤추며 음악을 듣는다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작년 초 단종되기까지 2억대 넘게 팔렸다.

[만물상] 소니의 추억
▶1990년대까지 소니는 지금 애플처럼 혁신의 상징이었다.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품이 1959년 트랜지스터 TV를 시작으로 82년 CD 플레이어, 90년 8㎜ 캠코더까지 이어졌다. 그런 소니가 더는 눈길 끄는 제품을 내놓지 못하면서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소니가 만들면 다 팔린다'는 자만이 화근이었다. 기술자들은 새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자기 부서 챙기기에 바쁜 관료로 변해 갔다.

▶소니는 TV 시장이 브라운관에서 평판으로 넘어가는데도 2000년대 초반까지 고집스럽게 브라운관 개량에 매달렸다. 그 사이 삼성·LG가 치고 나갔다. 부서 사이에 칸막이가 높아지면서 비슷한 기술을 여러 부서가 중복 개발하느라 빠르게 바뀌는 시장을 따라가지 못했다. 재작년 말 국제 신용 평가사 피치가 소니를 투기 등급으로 강등하더니 엊그제 무디스도 소니에 투기 등급을 매겼다. 2000년대 초 한 주에 1만6000엔까지 갔던 주가가 10분의 1토막이 나 1600엔 선에 거래된다.

어제의 글로벌 일류 기업이 허망하게 권좌에서 밀려나는 것이 이젠 새로운 일이 아니다. 노키아는 1998년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판매량 1위에 오른 뒤 14년이나 정상을 지켰다. 그러나 스마트폰 경쟁을 따라잡지 못하고 몰락해 작년 말 마이크로소프트로 주인이 바뀌었다. 필름 시장 절대 강자였던 코닥은 디지털 경쟁에서 뒤처져 재작년 초 파산했다. 혁신을 멈추면 생존마저 위협받는 게 글로벌 기업들이 살고 있는 '정글'의 법칙이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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