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나 병원에서 고객과 환자를 '○○○씨'라 하지 않고 '○○○님'이라고 부른 지 오래됐다. 전화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도 '씨' 대신 꼬박꼬박
'님'을 붙인다. 씨(氏)는 사람 이름을 높여 부를 때 쓰던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씨'를 아무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라고 규정한다. "공식적
사무적인 자리나 다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엊그제 천주교 사제가 강론을 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내내 '박근혜씨'라고 불렀다. 정의구현사제단과 수원교구 공동선실현사제연대가
화성 기산성당에서 연 미사에서였다. 조한영 신부는 "박근혜씨는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와 국가정보원의 댓글 대통령이지 민의(民意)에 의한 대통령이
아니다"고 했다. 조 신부는 모두 여섯 차례 '박근혜씨'라고 불렀다. 그는 미사가 끝난 뒤 "미국 대통령도 '미스터 오바마'라고 하지 않느냐.
'○○양'이라 하기 뭐해서 '씨'를 붙였다"고 했다. '씨'라고 불러준 것도 다행인 줄 알라는 말로 들린다.
▶존댓말이 따로 없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가리킬 땐 '프레지던트 오바마' 또는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예의를 갖춘다. 평대(平待)와 하대(下待)에 쓰는 '씨'와는 다르다. 천주교 사제들은 교황을 향해 '교황 성하(聖下)'라며 고개를 숙인다. 세속의 전하·폐하에 해당하는 극존칭이다. 조 신부도 교황을 '성하'라고 부를 것이다. 자신의 종교 세계 지도자는 깍듯이 모시면서 나라의 지도자에겐 '씨'를 붙이는 것은 사제가 세속에 군림하겠다는 자세로밖에 안 보인다.
▶조 신부는 대통령의 세례명도 언급하며 "박근혜 율리안나 자매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했다. 제대에 선 신부가 평신도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 같다. 이날 미사에서 서북원 신부는 "사람이 희망이지, 개가 희망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사람보다 진도개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퇴근 후 진도개 희망이와 새롬이를 돌본다는 얘기에 빗댄 비아냥이다.
▶몇몇 신부 입에서 미움과 조롱의 말이 쏟아지면서 천주교 안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세상에 평화를 호소해야 할 성당이 일부 신부들 때문에 반목과 갈등을 부추기는 공간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김수환 추기경은 1986년 군사 정권 시절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미움만 남아 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정의를 독점한 듯 행동하는 '정치 사제'들이 새겨들어야 할 성직자의 말이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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