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도록 꾸는 악몽이 있다. 여자는 시험 꿈을 자주 꾼다고 한다. 시험 시간에 늦어 뛰고, 답안을 반도 못 썼는데 끝 종이 울린다. 남자는 흔히 군대 다시 가는 꿈에 시달린다. 제대한 지가 언젠데 영장이 나온다. 아무리 "군대 갔다 왔다"고 하소연해도 소용없다. 환장할 노릇이다. 쉰 줄 다 돼서야 그 악몽이 가셨지만 지금도 내무반 꿈은 가끔 꾼다. 군복 각 잡아 관물대에 쌓는 재주가 없어 만날 더듬거린다. 소총이나 철모가 없어져 헤맨다.
▶군인의 분신(分身) 총을 잃어버리면 영창감이다. 총을 분해해 날마다 기름 먹인 헝겊으로 닦는 건 병영 생활의 첫 걸음이다. 언제든 총을 쓸 수 있게 관리하면서 마음도 가다듬는다. 예전엔 총 손질을 '총기 수입'이라고 했다. '청소한다'는 영어 'sweep'에서 나온 말이라고들 했다. 알고보니 '손질한다'는 일본말 '手入(데이레)'이었다.
▶어느 육군 병장이 제대 전날 K-2 소총의 총열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가 기소됐다. 이 '말년 병장'은 당직사관이 소총을 손질하라고 하자 홧김에 '세탁'해버렸다고 한다. '마지막 날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 검찰은 항명 혐의로 조사한 뒤 민간인이 된 그를 서울북부지검으로 넘겼다. 항명은 3년 이하 징역형밖에 없어 정식 재판을 받아야 한다.
▶지금은 안 쓰는 군대 말에 신참, 고참, 그리고 '갈참'이 있다. 전역이 50일쯤 남으면 일과나 작업에서 열외(列外)로 빼줬다. 내무반 TV 채널을 맘대로 돌리는 특권도 누렸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며 제대할 날을 꼽았다. 시간은 갈수록 더디 흘렀다. 게다가 요즘엔 웬만해선 열외로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미뤄둔 말년 휴가와 포상 휴가를 합쳐 다녀와 이튿날 전역하는 병사가 많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가라"는 말도 있다. 말년에 더 조심하라는 얘기다.
▶옛날엔 머슴을 대개 정월 대보름에 들여 섣달까지 부린 뒤 집으로 보냈다. 어느 부자가 섣달 그믐날 두 머슴에게 새끼를 열 자씩 꼬라고 했다. 한 머슴은 투덜대며 시늉만 했고 다른 머슴은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꼬았다. 주인이 광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부자가 됐으니 새끼에 엽전을 가득 꿰어 가게." 새끼를 튼튼하게 꼰 머슴은 엽전을 양껏 뀄지만 허술하게 꼰 머슴은 한 닢도 못 뀄다. 말년 병장의 심정은 남은 밥그릇 헤아리는 섣달 머슴을 닮았다. 총을 세탁한 병장은 마지막 하룻밤을 못 참아 전역의 기쁨을 날리고 법정에까지 서게 됐다.
-조선일보, 20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