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감옥을 교회되게

하마사 2014. 1. 1. 20:45

본문: 행 16:25-34

제목: 감옥을 교회되게

목표: 감옥을 교회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게 한다.

 

 

일간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 정신분석학자 조지 베일런트는 1937년 하버드대 2학년이던 268명의 삶을 평생 추적했습니다. '잘사는 삶의 공식'을 뽑아보기 위해서입니다. 70여년 대(代)를 이어 살펴봤더니 하버드 엘리트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은 평범하게 보이던 학생들이었습니다. 베일런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는 행복하게 사는 요소로 일곱 가지를 꼽았습니다. 고통을 유머로 극복하는 자세, 안정된 결혼, 교육, 금연, 금주, 운동 그리고 적당한 몸무게입니다.

믿음생활을 잘하면 최소한 금연, 금주 두 가지 요소는 확보할 수 있기에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감옥은 어둡고 절망적인 곳이지만 교회는 밝고 소망적인 곳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교회를 감옥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바울일행을 따라오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며 여러 날 동안 괴롭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바울이 선포하자 귀신이 즉시 떠나갔습니다.

여종의 주인은 점치는 수익이 끊어지자 바울일행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간수가 지키고 발을 차꼬에 채웠습니다.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하고 자유를 주었지만 오히려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뺨 맞는 격이 되었습니다.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감옥이 변하여 교회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간수가 변화되어 가족들과 함께 빌립보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옷감 장수 루디아와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중심으로 개척된 교회였습니다. 빌립보에서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빌립보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역사가 삶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감옥 같은 가정과 일터가 변화되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감옥 같은 내 삶이 변화되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이런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감옥을 교회되게 하려면

1. 구원이 있어야 합니다.(33)

33절,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는 소리를 듣고 간수는 물론 함께 있던 죄수들도 비난했을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억울하게 들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포자기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원망과 분노, 절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기도와 찬송을 한다면 아마도 짜증을 내면서 그만두라고 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전도를 하다가 욕을 먹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한해를 돌아보면 믿음생활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했지만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나라의 앞날도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도 밝지 않습니다. 북한문제도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됩니다. 주변국들과 풀어가야 할 숙제들도 많습니다. 노사문제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새해에 펼쳐지게 될 우리의 주변 환경이 결코 녹녹치 않습니다.

하지만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이 전도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절망과 고통, 사망의 음침한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속박과 억압의 쇠사슬이 풀리는 자유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둠과 고통이 심할수록 구원의 감격은 더욱 강렬합니다.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광복을 맞았을 때의 감격은 형언하기 힘들 것입니다. 60년이 넘는 공산치하에서 시달리는 북한동포들이 자유를 얻게 되는 날의 감격이 어떨까요? 70년 간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바벨론 포로들의 감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430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과 구원의 감격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소고를 치며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희망과 기쁨의 새아침이 간절합니다. 암흑이 짙을수록 구원의 감격은 더 큽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캄캄한 절망의 감옥에 복음의 빛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기도와 찬송으로 굳게 닫힌 옥문을 열었습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바울은 몸을 상하지 말라고 소리를 치고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렸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질문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간수는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간수가 죄수 앞에 엎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죄수를 사람취급 하지 않습니다.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간수가 죄수처럼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감옥을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간수와 간수의 가족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징표가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구원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생명구원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친교모임에 불과합니다. 세례를 통해 구원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구원의 은혜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는 곳입니다. 절망과 사망의 음침한 감옥에 복음의 빛을 전하여 구원을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와 가족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이 생겼으며 그 날 저녁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원이 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믿음을 얻게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는 곳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자주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전화를 드리면 아버님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고 전화를 받곤 하십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면 답답하고 불편하지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은 죽습니다. 육신은 살아서 숨을 쉬고 활동을 해도 영혼은 죽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혼이 사막으로 변합니다. 아모스 8: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곳이 영적인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육체가 약해지듯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혼이 죽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났지만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할 때 죽은 자가 수족을 동인 채로 살아났습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말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옥 같은 삶의 환경이 있습니까? 일터와 가정에 감옥 같은 어둠과 절망이 있습니까?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이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옥문이 열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간수의 가정처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말씀이 들려지게 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믿음이 생기고 성장합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절망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2014년 새해에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절망과 고통의 감옥에서 구원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옥을 교회되게 하려면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34상)

34절 상반절,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말을 타고 가던 신사가 땀을 흘리면서 목재를 운반하는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상사 한 명이 편안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신사가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함께 일하지 않습니까?" "난 졸병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상관이니까요" 하고 상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사는 말에서 내려 윗옷을 벗어놓고 병사들 틈에 끼어 땀을 흘리면서 통나무를 운반하였습니다. 신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 위에 올라타고는 상사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목재를 운반할 일이 있거든 나를 부르시오" "당신은 누구신지요?" 상사가 물었습니다. 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군대의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이요"

 

감옥을 교회되게 하려면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억눌린 감옥 같은 세상에 섬기로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섬기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섬김입니다. 왕궁이 아닌 마구간에 오신 것이 섬김입니다.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살면서 약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그들을 섬겨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섬김의 절정입니다.

바울과 실라 역시 예수님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낮아졌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처럼 낮아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낮아져야 합니다. 2014년 한 해 동안 예수님을 생각하며 낮아져야 합니다. 감옥처럼 어둠과 절망과 고통이 있는 현장으로 복음 들고 찾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감옥을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빛을 들고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둠을 밝히려면 빛이 들어가야 합니다. 빛이 임할 때 어둠은 물러갑니다.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환경으로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장소와 환경으로 던져 넣을 때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빌립보 감옥에 넣었듯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노예로 살게 하시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르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미디안광야로 몰았습니다. 다윗을 적국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넣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고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때로는 이처럼 원하지 않는 환경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버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인도방법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를 만나게 하시고 빌립보 교회를 세워가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순종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도와 찬송으로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집으로 초정받아 갔습니다. 그곳에서 간수가 매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음식을 차려주었습니다. 간수와 가족들이 죄수들을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섬김으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자색옷감장사 루디아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는 바울일행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루디아는 세례를 받고 바울일행을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하며 섬겼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와 간수의 가정을 중심으로 섬김으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섬기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러 오셨기 때문에 교회는 서로를 섬기는 곳이어야 합니다. 감옥은 섬김이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유머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섬김의 차이입니다. 천국은 서로 섬기려 하고 지옥은 서로 섬김을 받겠다고 하는 곳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수저가 길어서 혼자서는 식사를 할 수 없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혼자서 먹겠다고 긴 수저를 가지고 음식을 자기 입에 넣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먹지 못하고 천국은 서로 상대방의 입에다 음식물을 넣어준다고 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섬김의 차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감옥은 진정한 섬김이 없습니다. 간수가 죄수를 섬기거나 죄수가 간수를 섬기지도 않습니다. 죄수들끼리도 서로 섬기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은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섬겨주었습니다.

교회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기보다 섬겨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가 섬김을 받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구역장 권찰님은 구역식구를 섬겨야 합니다. 교사는 학생을 섬겨야 합니다. 선교회 임원은 회원들을 섬겨야 합니다. 반대로 성도는 목회자를, 구역식구는 구역장 권찰님을, 학생은 교사를, 선교회 회원은 임원을 섬겨야 합니다. 서로 섬기는 공동체가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이런 섬김이 있으려면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간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섬기는 간수가 되었습니다.

 

존 멕스웰이 쓴 '열매맺는 지도자'라는 책을 보면 서독과 동독이 통일되기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동독에 사는 사람들이 서독 베를린 진영에다가 쓰레기 한 트럭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것을 본 서독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쓰레기 대신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이 든 캔을 한 트럭 쏟아 놓았습니다.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을 세워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준다.”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자기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 못 걷는 사람이 구걸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섬겼습니다. 바울과 실라도 복음으로 간수를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으면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재능이 있으면 재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이 있으면 건강한 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물질로 섬기는 것입니다.

감옥은 섬길 일이 없습니다. 섬기지 않아도 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만 신경쓰면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간수가 매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음식으로 섬겼듯이 가능한 것으로 섬기는 곳이어야 합니다.

섬기면 감옥을 교회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식구들이 서로 섬기면 교회 같은 가정이 됩니다. 서로 섬기는 일터는 교회 같은 일터가 됩니다. 성도들이 서로 섬기면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2014년에는 섬김을 통해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옥을 교회되게 하려면

3.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34하)

34절 하반절,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간수와 가족들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가정에 구원이 임하자 기쁨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초상집, 유교는 제사집, 기독교는 잔치집으로 비유합니다. 교회는 잔치집과 같습니다. 매주일은 작은 부활절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기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기쁨으로 교제하고 섬기며 찬양하는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어 성도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빌립은 사람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성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복음을 전하자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소외와 절망의 땅 사마리아성읍에 큰 기쁨이 임한 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기쁨의 소식입니다. 생명의 소리입니다.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므로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있으면서도 찬송을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소리 대신에 찬송의 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습니다. 감옥은 기쁜 소리보다는 슬픈 소리가 많습니다. 희망의 소리보다는 절망의 소리가 많습니다. 감사의 소리보다는 불평의 소리가 많습니다. 긍정의 소리보다는 부정의 소리가 많습니다. 격려의 소리보다는 질타의 소리가 많습니다. 웃음소리보다는 싸움의 소리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감옥에서 찬송이 울려 퍼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상상을 뛰어넘는 곳이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자리에서 기쁨의 찬송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 술과 담배를 좋아하시는 분이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날 때면 약주 냄세를 많이 풍기곤 합니다.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를 갈 때 만나기도 하는데, 그 시간에 담배를 태우러 나갑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다녀와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분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사세요? 새벽에 교회가고, 땀 흘리며 운동하고 힘들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보기에는 참 힘들게 사는 사람처럼 보였나 봅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좋아서 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좋아서 하면 기쁩니다. 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운동하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한지 모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힘들게 산다고 할지모릅니다. 하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전혀 생소한 곳입니다. 자유가 없고 험한 곳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좋아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갔고 또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기뻤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유레카 신앙

그리스에 히어로 2세라는 왕이 세공관리에게 금덩어리를 주며 명품 왕관을 만들어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의심이 많은 왕은 불순물을 섞어 왕관을 만들까 걱정했습니다. 왕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를 불러 순도 100%의 멋진 왕관이 제작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의 순도를 측정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목욕탕 욕조에 몸을 담갔습니다. 욕조에서 물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때 퍼뜩 한 원리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물체를 물에 넣으면 그 질량만큼의 물이 자리를 이동한다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즉 ‘부력의 원리’였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옷 입는 것도 잊은 채 “유레카(Eureka).”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왔습니다. 유레카는 헬라어로 ‘알았다’, ‘찾았다’라는 뜻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외침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이 기쁨이 간수와 온 가족에게 전염되었습니다. 간수와 온 가족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 세례를 받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옥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감옥을 열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찬송입니다. 기도와 찬송으로 감옥 문을 열어야 합니다. 감옥 같은 삶의 환경을 불평하지 말고 기도와 찬송으로 옥문을 박차고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쁨의 기술’이란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옛날도 좋았는데 지금은 더 좋구나.

지금도 좋지만 내일은 더 좋을 거야.

겨울도 좋았지만 봄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여름은 시원한 바다가 있고 가을은 단풍든 산이 있구나.

아이 때는 순수해서 좋고 어른이 되면 지혜로워서 좋지.

갈 때는 새로운 것을 보고, 올 때는 그리운 것을 만나서 좋구나.

아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오고, 기쁨이 모이면 아픔도 이길 거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꿈과 희망으로 시작합니다. 감옥 같은 환경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혹이라도 그런 환경이 주어질 때 두려워하지 맙시다. 걱정하지 맙시다. 실망하지 맙시다.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감옥을 교회되게 하려면 구원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2014년 새해에 구원과 섬김과 기쁨이 넘치는 감옥을 교회되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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