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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채명신 예비역 중장 "派越 병사 묘역에 묻어달라" 유언

하마사 2013. 11. 28. 09:24

[故 채명신 예비역 중장 "派越 병사 묘역에 묻어달라" 유언]

蔡장군의 20년 보좌관 - "장군, 늘 병사들 죽음 슬퍼해"
올곧았던 蔡장군 - 박정희 前대통령 최측근이지만 유신 끝까지 반대하다 전역
국방부는 난색 - "병사묘역에 장군 묻힌 전례없어" 청와대가 "고인 뜻대로…"
오늘 서울현충원서 육군葬 - '베트남戰 위문' 패티 김이 弔歌

 

지난 25일 별세한 초대 주베트남 사령관 채명신(蔡命新·87) 예비역 중장이 국립현충원 장군 묘역이 아닌 일반 병사 묘역에 안장된다. "나를 파월 장병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국군 장성이 일반 묘역에 묻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7일 빈소에서 만난 부인 문정인(84) 여사는 "집(서울 동부이촌동)에서 국립서울현충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전역 직후부터 남편 뜻이 그랬고 병상에서도 여러 차례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채명신 장군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4년 8개월 동안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베트남 재임 시절 일시 귀국할 때마다 국립현충원을 찾아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장병 묘역을 참배, 눈물을 흘렸다. 20여년 동안 채 장군의 보좌관을 지낸 정재성(66)씨는 "병사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막사에서 남몰래 통곡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초대 주(駐) 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1966년 7월 일시 귀국해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의 월남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눈물을 닦는 모습이다(위 사진). 최윤희(왼쪽) 합참의장과 커티스 스캐퍼로티(왼쪽에서 둘째) 한미연합사령관이 27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戰死者묘역서 눈물 - 초대 주(駐) 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1966년 7월 일시 귀국해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의 월남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눈물을 닦는 모습이다(위 사진). 한미연합사령관·합참의장 弔問 - 최윤희(왼쪽) 합참의장과 커티스 스캐퍼로티(왼쪽에서 둘째) 한미연합사령관이 27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조선일보 DB·이명원 기자
채 장군은 원래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었다. 장군 묘역은 넓이가 26.4㎡(8평)로, 일반 병사 묘역(3.3㎡)의 8배다. 일반 병사 묘역에는 없는 단(가로 106㎝·세로 91㎝·높이 15㎝)을 세울 수 있고, 비석도 가로 36㎝·높이 91㎝로 일반 묘역(가로 30㎝·높이 76㎝)보다 크다. 장군 묘역은 봉분(封墳)으로 시신을 안장할 수 있지만, 일반 묘역은 화장한 유골만 안장된다.

채명신 장군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국방부와 국립현충원 측에서 "장군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전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문정인 여사와 정재성씨는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채 장군의 유언이 담긴 서신을 보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27일 오전 8시 청와대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 대통령께서 '고인 유지대로 하는 게 맞지 않느냐'며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문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저와 아이들을 특별히 한 달간 사이공으로 보내 남편 곁에 머물게 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마침 베트콩의 대공세가 벌어졌고, 포탄이 공관 주변으로 비 오듯 쏟아졌어요. 남편은 가족에게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부관에게 권총을 가져오라면서 바로 비행장으로 가더라고요. 그때는 '군인 가족이라는 게 참 허망하구나' 생각했어요."

채 장군은 1961년 5·16에 주도적으로 가담하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지만 1972년 박 전 대통령의 유신을 끝까지 반대했고 대장 진급에서 탈락해 전역했다. 문 여사는 "남편은 늘 박 전 대통령에게 직언을 했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10·26 사태 소식을 듣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유신에 대해) 직언할 때 '각하, 이러다 제명에 못 돌아가십니다'라고 말한 게 마음에 계속 걸린다고 말했다"고 했다.

1965년 채명신 사령관이 베트남 부임 후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
1965년 채명신 사령관이 베트남 부임 후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 /국방부 제공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채명신 장군의 빈소에는 김관진 국방장관과 최윤희 합참의장, 커티스 스캐퍼로티(Scaparrotti) 한미연합사령관, 백선엽 장군, 이상희 이종구 오자복 이상훈 김동신 정호용 윤석민 이양호 전(前) 국방장관 등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수성 전(前) 국무총리와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군 장성 출신인 황진하 송영근 의원 등도 조문했다.

채명신 장군의 영결식은 28일 오전 10시 서울현충원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하에 육군장으로 치러지며, 오후 3시 제2 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된다. 육군장은 전사자가 아닌 경우 4성 장군에게만 해당됐지만 지난 4월 규정이 바뀌어 육군 발전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사망한 장성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영결식에선 가수 패티 김이 조가(弔歌)로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부른다. 패티 김은 1966년 작곡가 길옥윤과 결혼한 뒤 신혼여행을 떠나는 대신 자비를 들여 베트남으로 가서 한국군 주둔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위문공연을 연 바 있다. 이 위문공연을 계기로 채명신 장군 부부와 가까워졌다.

 

 

-조선일보, 201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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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 兵士 묘역 戰友 곁에 묻히다

 

 베트남전 때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육군 중장 채명신 장군이 28일 국립서울현충원 2번 병사 묘역에 묻혔다.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한 평짜리 사병 묘지다. 장군의 묘지는 봉분을 쓰는 여덟 평이다. 채 장군은 건군(建軍) 이후 병사 묘역에 안장된 첫 장성이다. 그는 늘 서울 이촌동 집에서 동작동 현충원을 바라보며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채 장군은 이제 그 뜻을 이뤘다. 그가 영원한 쉼터로 택한 2번 병사 묘역은 파월참전자회 회장으로 베트남전 전사자 추모 행사를 열어 왔던 곳이다. 거기 잠들어 있는 1033명 가운데 971명이 베트남전에서 숨진 병사다.

채 장군은 광복 후 평양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월남해 육군사관학교 전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 소대장으로 부임한 부대에서 남로당계의 근거리 조준 사격을 받고도 살아나 '군신(軍神)'으로 불렸다. 6·25 때는 우리 군 최초의 특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었다. 그는 1965년 8월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3년 8개월 동안 파월 장병을 지휘했다. 그가 올린 전과(戰果)는 미국 언론으로부터 "2차대전 후 최고 승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군은 한국군에 작전권을 주지 않으려다 채 장군의 탁월한 게릴라 전술에 놀라 작전권을 내줬다.

채 장군은 자신의 전공(戰功)이 부하들의 희생 위에서 이룬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를 치켜세우는 자리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를 20년 넘게 모셨던 보좌관은 "채 장군이 병사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막사에서 남몰래 통곡하곤 했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부하들 목숨을 지키는 일을 앞세웠고 자신의 안위(安危)는 뒤로 미뤘다. 생(生)과 사(死)를 넘어선 사생관(死生觀)은 그가 웬만해선 철모를 쓰지 않으려 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병사들은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그런 채 장군을 마음으로 따랐다.

채 장군은 박정희 소장의 설득으로 5·16에 참여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군인이 있어야 할 자리는 적과 마주한 전선(戰線)이라며 군으로 돌아갔다. 채 장군은 6·25 이후 우리 군이 배출한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을 말리다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군복을 벗었다. 그의 삶의 좌표는 '군인의 본분은 위국헌신(爲國獻身)'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휘호 바로 그것이었다.

어제 신문들은 채 장군의 행적을 전하는 사진으로 1966년 그가 베트남전 전사자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골랐다. 그는 대통령에게 전황(戰況)을 보고하려고 잠시 귀국해서도 국립묘지를 찾았다. 채명신 장군은 전장에서 병사보다 몇 발짝 앞에 서 있었고 세상을 떠나서는 병사들과 나란히 누웠다. 곁에 있는 병사들이 채 장군을 반기며 외치는 환호가 들리는 것 같다.

 

-조선일보, 201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