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큰 기쁨

하마사 2013. 11. 17. 13:30

본문: 행 8:1-8

제목: 큰 기쁨

목표: 복음으로 큰 기쁨을 얻고 그 기쁨을 전해주며 살게 한다.

 

살면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입니까? 최근에는 어떤 일로 기뻐하셨습니까?

성경은 사마리아성에 임했던 큰 기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지역은 역사적으로 아픔과 상처의 땅이었습니다. 앗수르(앗시리아)에게 점령당한 이후 그들의 혼혈정책으로 타민족과 혈통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지방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땅을 밟기조차 싫어했습니다. 소외와 멸시의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초대교회도 사마리아에는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성에 빌립이 복음을 전파하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고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큰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1. 큰 기쁨은 생명의 기쁨입니다.(4-6)

4-6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본문에는 ‘크다’는 뜻의 단어가 네 번 등장합니다. 큰 박해(1절), 크게 울더라(2절), 크게 소리를 지르며(7절), 큰 기쁨(8절)입니다. 큰 기쁨이 임하기 전에 큰 박해가 있었고,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는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파되자 사람들에게 붙어있던 귀신들이 쫓겨나며 지르던 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큰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큰 기쁨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아름다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우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먹구름 속에서 치는 천둥소리, 간밤에 내리는 무서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픔과 상처의 땅 사마리아에 새 생명이 출생하는 큰 기쁨을 위해 큰 박해, 큰 울음, 큰 소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스데반집사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있자 사도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흩어져서 믿음을 포기하고 조용히 지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아죽는 스데반의 순교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믿음을 지키다가 자기들도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더 큰 박해와 더 큰 울음을 각오하고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과 능력이 있습니다. 큰 박해와 울음을 상쇄하는 큰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에 행복한 기쁨이 있습니다. 손주를 보고 기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 역시 행복해보입니다. 생명이 주는 기쁨입니다. 사고를 당해 죽을 상황에서 구출되었거나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났을 때 기쁩니다. 생명 얻는 기쁨, 구원의 기쁨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1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야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 세상에 생명이 임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사마리아성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버림받은 땅입니다.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취급을 하지 않고 상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피폐한 땅이었습니다.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큰 슬픔과 멸시의 땅이었습니다. 이런 아픔과 멸시의 땅에 복음이 전해지자 생명이 소생하는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사마리아성과 같은 이 땅에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버렸습니다.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박해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박해와 슬픔이 끝나지 않았지만 생명 얻는 기쁨이 더 크기에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신비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땅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홍해가 가로막혔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왔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자 바다가 갈라져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죽음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기쁨이었습니다. 홍해에 수장 될 위기에서 건짐 받은 기쁨이었습니다. 죽음에서 구원받는 기쁨이 가장 큽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이토록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거나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출애굽기 1장에 히브리 산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굽왕이 산파들에게 히브리여인이 출산할 때 아들이면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자기의 생명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고 어린아이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산파들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성경은 생명을 살리며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아기를 세상에 보내실 때는 하나님의 기업으로 그리고 상급으로 주셨습니다. 요즘에 생명경시사상이 만연하고 과학이 발달하여 마치 생명도 인간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시고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까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화)

2011년 10월 19일자 일간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납치돼 5년간 가자지구에 억류됐던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리트(25세)가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샬리트 병장은 이집트를 거쳐 이스라엘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겼습니다. 가족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가서 샬리트를 만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샬리트의 무사귀환 대가로 팔레스타인 수감자 1,027명을 석방하기로 하마스와 합의했습니다.

 

한 생명의 가치를 이처럼 소중히 여기는 이스라엘이 건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1,027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바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나의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의 생명역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큰 박해로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생명을 살리는 큰 기쁨의 복된 소식을 전했듯이 생명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큰 기쁨은 회복의 기쁨입니다.(7)

7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소중하게 여기던 가방을 분실하여 며칠 동안 상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은행에 두고 나왔는데 금요일 은행업무가 마감된 후에야 분실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이 은행휴무일이라 이틀 동안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가방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손에 익은 성경찬송도 들어있었기에 가방을 다시 찾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은행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연결이 되지 않아 은행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상냥한 은행여직원의 목소리였습니다. 가방 안에 있는 연락처를 보고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여직원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갑고 예쁘게 들릴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여러 번 하고 은행에 가서 가방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피자와 콜라를 선물로 돌리면서 은행직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와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와 주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통적으로 잃었다가 되찾은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큰 잔치를 배설했고, 양과 은전을 찾은 주인 역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했습니다. 회복의 기쁨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가 찾으면 큰 기쁨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시기를 원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중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일이 발생하여 오벧에돔의 집으로 잠시 모셨습니다. 3개월 후에 법궤를 다시 다윗성으로 모실 때 다윗이 춤을 추면서 기뻐했습니다. 회복의 기쁨이었습니다.

사마리아성에도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사마리아성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따를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 떠나갔습니다.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더러운 귀신들이 사람들의 기쁨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통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영혼의 치유가 일어나자 정신과 육체가 치유되었습니다. 전인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와 눈물이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을 전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의 전도사역 중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제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도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역사하던 성령이 이제는 사마리아에서도 강하게 역사하여 교회가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 147:2-3절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3]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하나님은 세우시고, 모으시고, 고치시고, 싸매어 회복시키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고,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영원히 종이나 포로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무너지고 상처난 부분을 회복시켜주는 분이십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건강,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물질 그리고 실추된 명예까지 회복시켜 큰 기쁨을 주는 분이십니다.

욥은 동방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욥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한순간에 10남매의 자녀들과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을 가지고 몸을 긁을 정도로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아내마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며 저주하고 떠났습니다. 생명 이외에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파산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욥기의 마지막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하나님이 갑절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다니엘은 30일 동안 왕 외에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다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어졌을 때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연회장과 하객들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삶에 결핍이 생길 때 기쁨이 사라집니다. 인생에는 결핍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에 결핍이 생깁니다. 물질의 결핍도 생깁니다. 인간관계의 결핍도 생깁니다. 결핍이 충족되고 회복될 때 기쁨이 찾아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높은 관직에 있었고 부자였지만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외톨이였습니다. 마음이 공허했습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자기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남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무너진 인격과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회복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생명뿐만 아니라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각색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질병으로 고통 받던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 문둥병, 중풍병에 걸린 사람, 맹인과 청각장애인도 고쳐주셨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해결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 무너진 개인과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회복의 기쁨을 얻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 미래 불안으로 오는 노이로제, 우울증, 강박증, 편집증 등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해결사 되신 예수님만이 모든 질병과 삶의 문제를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찢기고 상한 삶의 문제를 회복시켜주는 분이십니다. 가정과 일터에 무너진 부분이 있습니까? 건강이 무너졌습니까? 관계가 무너졌습니까? 사마리아성을 회복시키고 기쁨을 주셨듯이 우리 교회도 회복의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도, 건강과 관계도 회복되는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3. 큰 기쁨은 성취의 기쁨입니다.(8)

8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2007년 7월 5일 동계올림픽 장소가 소치라고 발표되던 날,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평창군민과 강원도민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더 많이 흘렸습니다. 4년이 지난 2011년 7월 7일 새벽은 그날과는 다른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쉬움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자크로게 IOC위원장이 평창이란 단어를 발표하는 순간 대통령과 토비도슨 선수가 부둥켜안았고 김연아선수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카메라는 잡지 못했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모든 유치위원들의 눈가에도 똑같은 기쁨과 감격의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다.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한 삼성선수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꿈을 성취했을 때 기쁩니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얻는 기쁨이 큽니다. 산악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산을 등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취감입니다. 극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었을 때 얻는 성취감으로 희열을 느낍니다. 꿈을 성취하는 기쁨이 크기에 오늘도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이런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목사님들과 복식조를 이루어 전국목회자테니스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두 번을 참가했지만 모두 예선탈락을 하며 전국대회의 벽을 실감했습니다. 한데, 세 번째 출전한 대회에서 드디어 예선을 통과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1승만 하자는 목표로 이창훈목사님과 함께 출전했는데 간신히 1승을 하여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둘이서 엄청 기뻐했습니다. 입상이 아니어도 1승이 너무 기뻤습니다.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있을 때 그 기쁨을 전해준 빌립 역시 크게 기뻤습니다.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사마리아성으로 내려가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주어진 사명을 완수했을 때 생기는 성취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과 비전을 성취시켜주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이십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시 37:4)

렘 33:2-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을 행하고 그 일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하시고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은 오늘도 성취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빌립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선용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성도들이 흩어질 때 오히려 사마리아지역에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미전도지역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지역과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기로 결심하고 사마리아성에 내려갔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려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구도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낮아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큰 기쁨을 얻거나 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귀신들이 떠나가고 질병이 나았습니다. 빌립이 얼마나 기쁘게 사역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성취감으로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듣는 사람도 기쁘지만 전하는 사람에게도 큰 기쁨이 있습니다.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 ‘천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전도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구역별로 한 가정씩 전도하자는 목표를 정했습니다.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빌립처럼 큰 기쁨을 체험할 것입니다.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면 전도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큰 박해와 울음이 있었습니다. 순교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사도 외에 모든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흩어졌습니다. 교회가 무너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흩어진 성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세상에서 얻는 성공과 성취도 대단히 기쁩니다. 그 보다 영혼구원을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성취는 더 기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는 분이십니다. 행복한 비전을 품게 하시고 성취케 하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꿈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꿈도 반드시 이루어 주실 분이십니다.

박해와 울음이 크면 클수록 기쁨도 커집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큰 박해와 울음이 사마리아성에 기쁨을 주는 동력이 되었듯이 성도의 삶은 기쁨으로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시련과 고난도 있지만 영원한 기쁨과 환희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큰 기쁨의 나라인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소망입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으로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생명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죽음과 절망을 가져왔던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고 약한 부분이 치유되는 회복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 빌립에게 성취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큰 기쁨을 누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고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을 주었듯이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 큰 기쁨이 임해야 합니다.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박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 생명과 회복과 성취의 큰 기쁨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큰 기쁨을 누리고 큰 기쁨을 전하면서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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