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는 해방둥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3남 3녀 중 둘째 아들인 그가 열 살 때 부친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떴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최인호는 형이 입던 교복을 늘 줄여 입고 다녔다. 여기저기 기운 옷이라 친구들이 '걸레'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가난이 안긴 열등감을 글쓰기로 이겨냈다"고 했다.
▶최인호는 1961년 서울고 1학년 때 잡지 '학원'에 시를 투고했다. '하늘은 마냥 힘찬 노래를 부르고 새는 퍼런 심연(深淵)을 그리고 앉았는데…'라는 시 '휴식'이었다. 박두진 시인이 우수작으로 뽑으며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안정된 정신 자세다. 더욱 정진하라"고 극찬했다. 이듬해 최인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보낸 단편 '벽구멍으로'가 가작에 뽑혀 문재(文才)를 떨쳤다.
▶최인호는 1972년 장편 '별들의 고향'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원래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다. 비련(悲戀)의 여인 '경아'가 겪는 짧은 삶을 그리려 했다. 그러나 조간 신문에 걸맞지 않은 이미지를 준다고 해서 '별들의 고향'으로 바꿨다. 그는 사랑의 세태 변화를 산뜻한 문체로 그려내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나중에 그는 "경아가 잠깐 호스티스로 산 걸 두고 평론가들이 '호스티스 문학'이라고 낙인찍다니"라며 혀를 찼다.
▶최인호는 1980년대 이후엔 소재 폭을 넓혔다. 역사추리소설과 선(禪)불교 소설, 유교 소설도 썼다. 가톨릭에 귀의하더니 기독교적 사랑을 다룬 소설 '영혼의 새벽'을 냈다. 그는 2008년부터 침샘암으로 투병하면서도 2년 전 마지막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했다. 그때 그가 전화를 걸어와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소설"이라고 말한 게 마지막 통화였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병상에서 마지막 순간엔 "주님이 오셨다"며 반겼다. 그는 딸이 "사랑한다"고 하자 "나도"라면서 웃으며 떠났다. 신과 인간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영원히 흐르는 것은 사랑뿐인가 보다. 최인호의 삶과 문학은 그런 진리를 일러주며 마침표를 찍었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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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인호 장례미사 열려… '30년 지기' 안성기씨가 시 낭송
"이 세상 떠난 형제 받아 주소서~. 먼 길 떠난 형제 받아 주소서."
가톨릭 성가 '이 세상 떠난 형제'와 함께 고인의 영정(影幀)이 제대 앞으로 옮겨졌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유고 시를 배우 안성기(61)씨가 낭송할 때는 훌쩍임이 메아리로 이어졌다.
고(故) 최인호(1945~2013)의 장례 미사가 28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가톨릭 성가 '이 세상 떠난 형제'와 함께 고인의 영정(影幀)이 제대 앞으로 옮겨졌다.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유고 시를 배우 안성기(61)씨가 낭송할 때는 훌쩍임이 메아리로 이어졌다.
고(故) 최인호(1945~2013)의 장례 미사가 28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 지난 28일 서울 명동성당의 최인호 장례미사. 배우 안성기씨가 ‘인호형’을 추억하고 있다. /뉴스1
영성체 의식 후 조사(弔辭)가 이어졌다. '고래사냥'(1984) 이래 30년을 형·동생으로 지내온 영화배우 안성기씨가 맡았다. 그는 양복 상의에 반바지를 입고 거기에 운동모자를 쓰고 자신에게 찾아왔던 투병 중의 작가를 떠올렸다. 안씨는 "조금은 이상한 행색의 형님에게서 놀랍게도 저는 한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면서 "얼굴의 주름은 깊어지고, 그 단단하던 몸은 앙상하게 말랐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고 추억했다. 그리고 "인호 형님이 너무 서둘러 저희 곁을 떠나신 것이 조금은 원망스럽지만, 함께 살아온 날들이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인이 남긴 유고 시를 낭송했다.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난다// 당신은 나의 먼지//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야 하겠다// 나는 생명, 출렁인다.'
장례미사 후 고별식이 있었다. 시신을 교회 밖으로 운구하기 전, 고인의 죄를 고하고 사함을 구하는 예식이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성수와 분향이 이어졌다. 고인의 영정 뒤로 딸 다혜, 아들 도단(성재)과 가족들이 따랐고, 시인 김형영, 연출가 윤호진, 가수 김수철, 영화감독 이명세, 김연수·한강 등 후배 작가와 독자·친지 600여명이 지켜봤다.
울음은 크지 않았다. 28일 서울에는 온종일 비가 흩뿌렸다.
-조선일보, 201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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